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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2일 오전 9시 7분 보스토크(러시아어로 ‘동쪽’이라는 뜻) 1호가 서서히 우주를 향해 솟아올랐다. 얼마 후 그 안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1934-1968)은 인간으로는 처음으로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보스토크를 타고 1시간 48분 동안 우주여행을 했다.


“지구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과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이 수평선에서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보았다. 지구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마구 풀어놓은 팔레트와 같았고, 그 주위에는 창백한 푸른 후광이 둘러 있었다. 이 띠는 점차 어두워졌다가 다시 청록색, 푸른색,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는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돌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지구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가린이 지구를 한바퀴 돈 후 보스토크 1호에서 탈출한 시간은 발사한지 1시간 48분 뒤였다. 그리고 낙하산을 타고 볼가강이 흐르는 우츠모리예의 한 농가 근처에 무사히 내려섰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우주나들이는 이렇게 마쳤다.

같은 시각(미국동부시간으로 새벽 2시) 휴스턴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머큐리 우주비행사들은 곤한 잠에 빠져 있다가 비상벨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그런데 잠결에 방금 전 러시아(옛소련)의 우주비행사가 우주여행을 나섰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더니, 이를 듣자 그들은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당했군.”


유리 가가린(왼쪽)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계획은 미국이 먼저 내놓았다. 1957년 10월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한 의회는 당시 우주계획을 총괄하던 항공자문위원회(NACA)에 호통을 쳤다. 빨리 유인우주비행 프로그램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최초의 유인우주비행만은 러시아에게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항공자문위원회는 급히 서둔 끝에 이듬해 3월 유인우주선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의회는 항공자문위원회와 육·해·공군에 흩어져 있는 우주개발연구소들로는 러시아와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7월에 항공우주법을 만들고 10월에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NASA가 항공자문위원회의 안을 바탕으로 새롭게 선보인 유인우주선은 1인승 머큐리(Mercury)로, 1959년 9월 첫 시험발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원숭이 샘(1959년 12월), 암컷 원숭이 미스 샘(1960년 1월), 침팬지 햄(1961년 1월)을 우주로 보내면서 착실히 노하우를 쌓아갔다.

한편 1959년 4월 ‘머큐리 7인’이라고 불리는 7명의 우주비행사가 5백명의 후보들 가운데서 선발됐다. 선발기준은 키는 1백80cm를 넘지 않으며 제트기 조종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다들 나이가 30살을 넘었다. 선발된 우주비행사들은 휴스턴에서 훈련을 받으며 최초의 우주비행을 꿈꾸며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불과 한달을 앞두고 러시아가 또 선수를 친 것이다.

원숭이 대신 개

미국에서 머큐리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러시아의 수상 흐루시초프는 스푸트니크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늦었지만 1958년 말 유인우주선 보스토크계획을 급히 수립했다. 물론 우주선 설계는 전혀 돼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방법은 하나,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선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

오히려 우주비행사 선발이 빨랐다. 먼저 3천명의 조종사 중에서 서류전형과 면담을 통해 1백2명을 선발한 다음 모스크바 중앙항공연구병원에서 정밀검사와 심리테스트를 거쳐 1960년 2월 최종 12명(미국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원래 20명으로, 러시아가 우주선을 타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선전에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후에 명단에서 뺏다고 함)을 선발했다. 이들은 20대 중반으로 머큐리 우주비행사에 비해 나이가 어렸고 키도 1백70cm를 넘지 않는 단신이었다.

우주비행사를 선발할 때 가장 크게 신경을 쓴 부분은 심리적인 안정감. 첫 우주비행이기 때문에 행여 발사 후 졸도라도 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보스토크의 조종을 우주비행사에게 맡기지 않고 컴퓨터에 의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경험많은 조종사를 뽑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보스토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거의 공 모양에 가까웠다. 지구에 재진입할 때 충격에 잘 견디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부공간도 넓어졌다. 보스토크는 산소만을 사용한 머큐리와 달리 1기압의 산소/질소 혼합공기를 사용했다.

보스토크는 1960년 5월에 첫 시험발사에 나섰으며, 8월에는 세번째 시험우주선이 ‘스트렐카’와 ‘벨카’라는 두마리 개와, 쥐, 생쥐, 파리, 식물씨앗, 균류, 조류(藻類), 식물표본들을 싣고 우주여행에 나섰다. 이들은 하룻동안 지구궤도를 돌다가 무사히 지구로 돌아와 우주여행을 마치고 살아돌아온 최초의 생물이 됐다.

그런데 개를 정밀조사한 과학자들은 개가 지구궤도를 4번째 돌면서 발작을 일으켰음을 발견했다. 결국 첫 우주비행사의 우주여행 계획은 하루에서 한바퀴로 줄여야 했다. 또 이후의 시험발사는 러시아 과학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12월 1일 ‘프첼카’와 ‘무슈카’라는 개들이 탑승한 우주선이 지구대기권으로 재진입하다가 불탔고, 12월 21일에 발사한 우주선도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추락했다. 게다가 러시아 유인우주계획 책임자였던 코롤료프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이 머큐리를 발사하기로 한 날이 두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가 돼서야 러시아는 겨우 인간이 탑승할 수 있는 3기의 보스토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첫번째 것은 1961년 3월 9일 '체르누슈카' (개)를 태우고 지구를 한바퀴 돌고 돌아옴으로써 성공적인 리허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때 우주비행사 훈련캠프에서 사고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카르타쇼프는 윈심분리기 훈련에서 출혈을 일으켰고, 바를라모프는 수영장에서 척추골절을 당했다. 또 최연소 후보였던 본다렌코(24세)는 10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고 나오다가 불에 타 죽었다. 보통대기보다 산소밀도가 높은 독방에서 알코올솜으로 몸을 닦고 그것을 버린 곳이 하필 뜨거운 곳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훈련 관문을 통과한 6명의 우주비행사들이 티우라탐(일명 바이코누르기지)에 도착한 것은 3월 말. 3월 25일 두번째 리허설에 나선 ‘즈베즈도츠카’(개)가 우주여행에 성공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우주여행을 나설 것이다. 다행히 즈베츠도츠카는 지구를 한바퀴 돌고 무사히 귀환했다.

1961년 4월 12일 아침이 밝았다. 가가린은 우주선에 탑승한 뒤 안전벨트를 맸다. 마침내 인류 최초의 우주 나들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하면서 한 일이란 거의 없었다. 약간의 음식을 먹고, 라디오를 켜고, 몸을 묶었던 안전벨트를 풀고 무중력에서 움직여보는 정도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최초의 우주영웅이 됐다. 살아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가가린은 훗날 다시 한번 우상화에 이용된다. 그가 사망한 것은 1968년 3월 27일 비행기 사고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고는 20여년 동안 은폐됐다. 소문에 따르면 음주비행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밝힌 바로는 당시 그는 최초의 우주도킹을 준비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게 된 상황이 발생해 그는 다른 비행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땅을 향해 돌진했다. 90도 각도로 땅에 처박힌 비행기가 이를 증명한다는 것. 이때의 사고로 소유즈 2호와 3호의 도킹계획은 취소되고, 대신 소유즈 4호와 5호가 그 몫을 해냈다는 게 러시아의 주장이다.


미국의 머큐리 7인. 왼쪽부터 세퍼드, 그리섬, 글렌, 쿠퍼, 카펜터, 쉬라, 슬레이턴(유일하게 머큐리를 타지 못함)


머큐리와 보스토크

미국이 최초의 유인우주비행에 나선 것은 1961년 5월 5일, 가가린이 우주에서 돌아온지 20여일 뒤였다. 그러나 그나마 우주여행이라고 하기엔 비행시간과 비행거리가 턱없이 짧았다. 머큐리를 타고 처음으로 우주에 올라간 사람은 해군 소속의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앨런 세퍼드 주니어(37세). 그는 레드스톤로켓으로 발사한 프리덤(자유) 7호를 타고 15분 동안 준궤도비행(탄도 비행)하는데 그쳤다. 두번째 우주비행사인 버질 그리섬(35세) 역시 15분에 그쳤다.

미국이 최초로 지구궤도를 돌 수 있었던 것은 아틀라스 로켓이 완성된 뒤였다. 존 글렌은 1962년 2월 20일 프렌드십(우정)을 타고 4시간 55분 동안 지구를 3바퀴 돌면서 러시아의 뒤를 좇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보스토크는 미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미 멀찌감치 도망갔다. 1961년 8월 6일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를 태운 보스토크 2호는 25시간 18분 동안 지구를 16번이나 돌았다. 그는 우주에서 하루를 보낸 첫 우주인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우주생활은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우주멀미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고, 히터가 고장나 실내온도가 6℃로 내려가는 바람에 벌벌 떨면서 지내야 했다. 하여간 티토프의 우주여행으로 힘을 과시한 러시아는 몇일 뒤인 8월 13일 동독에게 압력을 넣어 베를린 장벽을 쌓도록 했다.

1962년 8월 니콜라예프가 탄 보스토크 3호와 포포비치가 탄 보스토크 4호는 첫 우주랑데부를 시도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5km도 채 되지 않았다. 보스토크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보스토크 5호와 6호의 랑데부. 보스토크 5호에 탑승한 발레리 비코프스키는 무려 1백19시간 동안 우주에 머물렀다. 보스토크 6호에 탑승한 사람은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가 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26세)였다.

테레슈코바는 1937년 야로슬라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트랙터운전사, 어머니는 방직공장 노동자였다.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날 여성우주비행사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응시했다가 운좋게 합격했다. 평소 ‘낙하산 점프’라는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우주비행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술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테레슈코바는 3일 동안 우주에 머물다가 돌아왔다. 여성우주비행사가 우주에 갔던 것은 순전히 러시아의 수상 흐루시초프의 장난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주비행사들이 기록을 갱신하는데 흠뻑 맛을 들이고 있다가, 뭔가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여성우주비행이었다.

이후 테레슈코바는 가가린만큼이나 유명인사가 됐다. 또 우주비행사 중 유일한 총각이었던 니콜라예프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해 더욱 유명해졌다. 첫 우주커플이 된 것이다. 결혼식은 흐루시초프의 축배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훗날 테레슈코바는 소비에트최고회의 위원이 됐다.

한편 머큐리 우주비행사들도 고군분투했다. 미국 우주비행사로서는 처음으로 우주에서 하루를 보낸 사람은 고든 쿠퍼(36세)였다. 그는 1963년 5월 15일 머큐리를 타고 34시간 19분 동안 우주에서 지냈다. 이로써 1인승 보스토크와 머큐리의 경쟁도 끝이 났다.

흔히 1960년대를 우주시대라고 부른다. 이 우주시대는 보스토크와 머큐리를 앞세운 러시아와 미국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는 1인승 보스토크(1961-1963), 2인승 보스호드(1964-1966), 3인승 소유즈(1968-현재)를 개발했고, 미국은 1인승 머큐리(1961-1963), 2인승(1965-1966), 3인승 아폴로(1968-1972)를 개발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전까지 미국은 계속 러시아의 꽁무니를 좇아다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길고 긴 우주경쟁은 1975년 7월 17일 아폴로 18호와 소유즈 19호의 도킹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엄청난 비용이 쏟아야 했던 우주경쟁을 두나라 모두 감당하기에 벅찼던 것이다.


1961년 5월 5일 우주여행을 떠나기 위해 프리덤 7호에 탑승하는 미국의 세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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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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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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