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로 들어갈 0차원의 세계는 비어있는 공간입니다. 2022년 9월, 오윤석 울산과학기술원(UNIST) 물리학과 교수와 김태헌 울산대 물리학과 교수 공동 연구팀은 “‘0차원 공허’에서 새로운 메모리 기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텅 비어있는 공간과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제어한다는 말과 함께요.
공간이라면 최소 3차원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던 세계에선 응당 그렇습니다. 그런데 몇몇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이 ‘차원’이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생김새’입니다. 공간에 생김새가 있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 얘기일까요? 그건 직접 0차원 공간에 들어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점을 닮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며 텅 비어있다는 0차원 공허로 사다리를 내려 하나씩 밟아 내려가 보겠습니다.
단단한 결정 속에 숨어있는 결함을 찾아라
우리 여행의 출발점은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 결정입니다. 탄소가 고온에서 높은 압력을 장시간 받았을 때 만들어지는 다이아몬드에 가까이 다가가면 결정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탄소 원자가 다른 4개의 탄소와 결합해 정사면체 구조를 만들고 이 정사면체가 3차원으로 배열돼 있는 규칙적으로 정렬된 모습이죠.
분자 사이의 거리가 매우 먼 기체, 특별한 모습 없이 흘러다니는 액체와는 다르게, 고체는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이온, 분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배열된 상태를 ‘결정’이라 부릅니다. 즉 결정성이 있다는 것은 규칙적인 배열을 갖는다는 말이죠. 다이아몬드도 결정성 고체입니다.
그런데 이 결정 구조를 가까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성 성분이 완벽하게 배열돼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완벽한 결정이란 이론적인 개념일 뿐, 모든 결정은 이가 빠졌든지, 결이 살짝 어긋났든지, 불순물이 들어갔든지, 결함을 하나씩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결정 결함(Crystal Defect)’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결정에 구조적 결함이 있거나 소량의 불순물이 들어가면 초록색이나 노란색 다이아몬드가 돼죠. 우리가 찾고 있는 0차원 공간도 바로 이 결정 속에 결함의 형태로 숨어있습니다.
0차원 결함에 텅 빈 공간이 있다
이제 결정 구조 더 가까이 다가가서 결함을 찾아봅시다. 과학자들은 결정 결함을 기하학적인 모양에 따라 0차원, 1차원, 2차원, 3차원으로 나눕니다. 결함의 생김새가 점과 선, 면 등의 형태라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겁니다. 즉 0차원 결정 결함은 ‘점’처럼 생긴 결함입니다. 그래서 0차원 결함은 점 결함, 1차원 결함은 선 결함, 2차원 결함은 면 결함, 3차원은 체적 결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붓으로 찍은 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그라미의 선이 울퉁불퉁하듯, 결함의 기하학적인 모양은 완벽한 도형의 형태가 아닙니다. 0차원 결함의 세 가지 종류인 ‘공공’과 ‘침입형 원자’, ‘치환형 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이와 너비가 엇비슷한 형태입니다.
‘얘 어디 갔니?’
가장 단순한 0차원 결함인 공공은 쉽게 말해 ‘빈 자리’입니다. 원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원자가 빠져있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결정이 성장하다보면, 배열의 어느 한 부분에서 원자가 위치를 바꾸거나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 기존 결정의 원자는 재배열됩니다. 이 재배열 과정에서 어디로 갔는지 제 자리를 이탈한 원자의 빈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공공은 비어있는 공간입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목표 지점인 ‘0차원 공허’죠.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공간이 비어있고, 또 비어있는 공간이 0차원인지 알게 됐습니다.
‘너는 왜 여기 있니?’
다른 종류의 0차원 결함인 ‘침입형 원자’는 틈새라고도 불립니다. 침입형 원자는 결정 내에서 어떤 원자가 정상적인 배열이 아닌 다른 원자들의 빈틈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원자의 크기보다 작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 원자는 대개 주변 배열에 비틀림을 만듭니다. 이 비틀림도 중요한 0차원 결정 결함의 연구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눈치챈 분들이 계시겠죠.
‘누구세요?’
마지막 치환형 원자는 외부 원자가 기존 결정 원자를 대체하며 배열에서 공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외부 원자로 치환됐다는 의미로 치환형 원자라 불립니다.
이제 0차원 공허가 무엇인지, 비어있는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성 고체를 볼 때마다 결함의 차원 세계를 떠올릴 수 있겠죠. 이제 이 세계가 현실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살펴봅시다.
0차원 결함으로 차세대 메모리 만든다
결함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결함은 물질의 특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새로운 특성을 탐구할 때나 원하는 특성을 얻고자 할 때 결정에 의도적으로 결함을 만들기도 합니다.
결함은 재료의 강도, 전기전도도 등 재료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결함은 결정의 형태를 바꾸기도 합니다. 결정의 형태가 바뀌면 물질 특성에도 영향을 미치니 결함이 물질 특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죠.
우리를 0차원 결정 결함으로 초대한 UNIST, 울산대 공동연구팀은 강유전체 박막에 0차원 결함인 공공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외부에서 물질에 힘을 가하면 내부엔 저항하는 힘이 생기는데 이를 응력이라 부릅니다. 연구팀은 바륨지르코늄 산화물 기판 위에 티탄산바륨 박막을 쌓아 올리며 박막의 원자 간격을 조금씩 늘렸습니다. 처음에는 원자들이 늘어나며 사방으로 가해지는 힘을 버텼지만 어느 순간 산소 하나가 빠져나갔습니다. 연구팀은 이렇게 ‘산소 결함’에 의한 공공을 만들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공공을 만들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강유전체 박막은 전기 분극이 한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공을 만들고 난 뒤, 만들어진 공공을 이웃하고 있는 원자 전기분극이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방향의 차이는 박막 소재의 유전율 크기를 바꿨습니다. 분극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하면 유전율이 낮아지고, 나란하지 않으면 유전율이 높아진 것이죠.
유전율의 값이 달라지는 것이 ‘0차원 공허’가 차세대 반도체 메모리 기술과 이어질 수 있는 지점이 됩니다.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는 메모리는 메모리 소자의 저항 크기를 통해 0과 1을 구분해 두 개의 상태만 있죠. 그런데 이번 연구처럼 각각이 다른 유전율을 가지는 상태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하나의 소자에 정보값을 3개 저장할 수 있게 됩니다. 0과 1 그리고 2까지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반도체 메모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결함’을 통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