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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뺑소니 [김준녕 저, 2022년 11월호]

블랙홀 하나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런 지극히 ‘과학적인’ 일에 왜 나 같은 보험사 직원을 불렀는지 알지 못했으나, 사건이 마무리된 지금에서는 최선이었다는 판단이 선다.
그것은 C580ED라 불리며 백조자리 근처에서 발견된 초대질량블랙홀이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블랙홀이라 연구소는 한국, 칠레, 미국, 중국에 있는 전파 망원경을 활용하여 그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어제까지 약 삼십 년간 주시하고 있었다. 관측을 시작한 순간부터 어제까지 변화는 없었다. 천체 물리학에서 10년, 20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초 단위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오늘날 연구소 직원들이 넥타이에 정장을 벗고서 셔츠와 루즈 팬츠를 입고, 구두를 벗고 크록스를 신고 다니게 될 때까지도 블랙홀은 어김없이 빛을 비롯해 주변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며 열심히 돌기만 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 한순간에 그것은 말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관측기나 컴퓨터가 고장 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태양 질량의 130배에 달하는 천체가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실제로 벌어지기에는 극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연구원들은 각 연구소에 연락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관측 기기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류를 감수하고서 컴퓨터도 재부팅 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있어야 할 곳에 블랙홀은 없었다. 연구원 모두가 당혹스러워했으나 잠시였다. 연구원들은 빠르게 이를 근거로 ‘블랙홀 증발 이론’을 구체화하려 했다. 노벨 물리학상이 눈앞에 다가온 것만 같았다. 
그가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는 당당하게 연구소 정문으로 걸어왔다. 그의 외양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말 그대로 그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과라 말하면 사과가 떠오르지만 그 사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우리의 인식에서만 존재하는 어떠한 ‘추상체’였다. 아마 그를 마주한 모두가 각자 다르게 그를 보았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유료 이미지 다운로드 사이트에 나오는, 동양인에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인식됐고, 이가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연구소장에게는 백인에, 나이는 50대 중반 정도인 교수로 기억됐다. (후에 CCTV로 확인해보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에다 대고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정문에 등장한 그는 (벽을 넘어 바로 우리에게 올 수 있었음에도) 정중하게 경비원에게 책임자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문은 혼비백산에 빠졌다. 경비원 하나는 귀신이라며 까무러쳤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가스총을 겨누다가 그가 다가오자 발포해버렸다. 다행히 그는 물리적인 공격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마침 정문을 통과하던 연구소장이 그 광경을 목격하곤 그를 차에 태운(가둔) 후에 연구소 안으로 데려왔다. 연구소장은 그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더니 금방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색이 된 표정으로 ‘어떡하지?’라는 말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선임연구원에게 들은 전부다. 
연구소장은 지금은 업계를 떠난 선배에게 인계받은 내 오랜 고객이었다. 선배가 보험금을 지급받아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연구소장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시작은 자동차 보험이었고, 이어서 실비 보험, 생명 보험, 연금 저축성 보험 등 보험이라는 보험은 나를 통해서만 계약했다. 하여튼 연구소장이 처음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사람이라도 친 음주운전자처럼 난처해하고 있었다.
“연구실로 와주게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소장에게 물었다.
“어떤 사건이죠?”
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교통사고.”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막상 사고가 나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자동차 사고나 강도라도 당한 것인가 싶었다. 나는 세일즈맨답게 정장을 차려입고는 바로 연구소로 향했다. 액셀을 밟으며 도로를 거칠게 가로질렀다. 고객 만족이 최우선이었다. 사고가 나면 어쩌냐고? 그러면 나 같은 멋진 보험사 동료가 사고가 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가 어디에 있든 사건 현장에 달려갈 것이며, 그는 멋지게 사건 현장을 처리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내 손을 잡으며 ‘괜찮을 겁니다’라 말할 것이다. 그를 믿고서 내 차는 우주선처럼 까만 도로 위를 날아갔다.
그렇게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연구소에 도착했다. 연구소 분위기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검문소 문은 아무렇게나 열려 있었고, 경비원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도로에 주저앉아 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임연구원은 정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신일지도 모릅니다.”
소장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선임연구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복도 한쪽을 가리켰다. 소장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눈알을 흰자위가 보이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멸망이야!”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언젠가 벌어질 보험금 지급 심사를 대비하여 녹음기를 켜고, 사진을 찍었다. 현장 상황을 잘 기록해둬야 했다. 소장은 침을 흘리며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나는 능숙하게 선임연구원의 어깨를 두들기며 소장을 부탁하곤 조심스럽게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

나의 첫 마디는 이랬다.
“보험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회의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분명 그랬다. 마치 이산화탄소 덩어리처럼 말이다.) 노이즈(그가 만들어낸 특유의 소리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소리가 아니라 머리에 직접 전달되었다. 이것도 압력으로 내 뇌에 직접 정보를 쑤셔 넣는 것 같았다. 과음한 다음 날처럼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정확히는 생각했다.)
“저도 보험사 직원입니다. 지구에는 보험사 직원이 인간밖에 없다더군요. 아무튼 환영합니다.”
나는 복잡하게 회사명이나, 연구소장에게 전화를 받고 왔다는 말은 집어치웠다. 상대에 맞춰야만 했다. 보험사끼리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됐다. 그리 유쾌한 다른 두 문명 간의 첫 만남은 아니었다. 자고로 보험사라 하면, ‘사고가 났을 때만 만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외계인이 보험사 직원이라니. 나는 늘 처음 마주하는 외계인은 과학자나 기술자이기만을 바랐다. 정치인이나 군인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더한 놈을 만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동종업계라니. 나도 보험회사 직원이었지만, 정말이지 그와의 기 싸움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절로 몸이 긴장되더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최대한 얼굴을 펴야 했다. 인공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노이즈에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얼마 전에 저희 고객에게 발생한 사고 때문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물건과 충돌했는데, 알고 있습니까?”
“잠시만요. 사건 개요 좀 다시 정리해봅시다.”
외계인이기 이전에 보험사 직원이었다. 그 점에서 흔들리면 안 됐다. 나는 사건 개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노이즈는 내 물음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서 약관을 읊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 ‘여러분들’이라 함은 지구에 계시는 모든 생명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희 고객이 여러분들의 청소기, 11011111과 1240 픽셀 전에 부딪히셨습니다. 고객 정보는 비밀 유지 조약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이 정도면 이해가 가실까요?”
주변 공기가 더욱 묵직해졌다. 노이즈가 공기 분자들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원심 분리기에라도 내던져진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상사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내게 뭐라 할까? 아니면 실적을 쌓았다며 좋아할까? 이 생각에 피가 머리 쪽으로 솟구치는 것 같기도 했다. 노이즈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저 지나칠까도 싶었는데, 고객님 양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정말 멋진 분 아니십니까? 그러니 바로 합의하시죠.”
노이즈가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모든 양자 정보가 담긴 일종의 메모리 칩이었다. 가만히 메모리 칩을 손에 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낑낑대던 나를 보던 노이즈는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내 머릿속에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종이 형태의 합의서를 띄워 주었다. 
합의서는 나름 합리적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주체는 ‘지구’ 혹은 ‘태양계의 3번째 행성’으로 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지구의 질량과 가속도로 정의되어 있었다. 숫자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어마어마한 계산값은 일단 넘기고서 합의서를 훑어보았다. 노이즈가 말한 그대로 사건 개요가 적혀 있었고, 이어서 그의 고객이 제시한 보상안이 보였다.
행성 이주를 위한 우주선 2대 제공.
‘행성 이주라니. 무슨 말일까? 뜬금없이?’
나는 협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의도로 노이즈에게 물었다.
“이게 뭐죠?”
그러자 내 반응에 노이즈는 흥분해서 압력을 더욱더 강하게 했다. 나는 몸이 뒤로 밀려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주 7일, 휴일도 없이 고객들을 상대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이 도움이 됐다. 머리도 터질 것처럼 속에서부터 압력이 느껴졌으나, 휴일 숙취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노이즈가 말했다.
“보상안입니다. 저희 고객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쓰셨습니다.”
“어디 부분이요?”
노이즈에게 다리가 있었더라면, 이 시점부터 다리를 꼬았을 것이다.
“우주선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라는 점입니다. 한쪽에 수컷, 다른 한쪽에 암컷, 이렇게 탑승하면 되겠군요.”
체세포 분열을 하는 생명체들은 어디에다 탑승하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내가 그렇게 묻는다면 논점은 2대이냐 3대이냐로 흘러간다. ‘우주선을 받는다’는 제시안은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깔리게 되어버리니 나는 다르게 물어야 했다. 다른 허점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지점을 맹렬하게 파고들어야 했다. 정보가 부족했다. 질문을 이어가야 했다. 
“정확히 어떤 물건과 충돌한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청소기요.”
노이즈는 진지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청소기라니? 지금 청소기와 부딪혔다고 어딘지도 모를 은하계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인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노이즈는 얼굴로 보이는 쪽 좌우로 픽셀 깨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손 쪽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노이즈가 무언가를 읽어내렸다.
“여러분들 용어로는 블랙홀, 말입니다.”
아까 선임연구원에게 들은 C580ED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나는 노이즈에게 물었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그럼 저희 고객님께 그렇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노이즈의 존재가 희미해졌다. 그는 분명 사라지려 했다. 놓쳐서는 안 됐다.
“잠깐만요.”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때 촉이 발동했다. 보험사 직원끼리 암묵적으로 벌어지는 기 싸움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반응이었다. 아마 노이즈 역시도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숨겨진 게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노이즈에게 물었다. 
“그게 없어지면, 우리한테 어떤 영향이 있죠?”
노이즈는 답답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우주에 등장하신 지 얼마 안 된 지구 분들께서는 잘 모르시겠습니다만, 우주 모든 것엔 다 목적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주로 생명체를 위해서죠. 블랙홀은 각종 행성이나 항성, 온갖 것들을 다 빨아들이는 청소기입니다. 그 주변에 있으면 모든 게 깔끔해지죠.”
“깔끔해지면요?”
내 질문에 노이즈는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듯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질문이 조금 이상하네요. 당연히 그것들이 생명체가 있는 행성에 부딪히면 말 그대로 ‘큰일’이 나니까요. 사라져야 할 것들이죠. 이번에 사라진 건 얼마 전에 출시된 신형 모델이네요. 청소기가 뭔지는 아시죠?”
은근하게 우릴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압력이 너무 강해 그러지 못했다.
“그럼, 지금 뭔가 충돌한다는 말입니까?”
노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올 것처럼 공기가 묵직해졌다. 그가 다시 무언가를 보고 읽었다.
“여러분들 시간으로는 정확히 5분 뒤에 항성 하나가 이리로 올 겁니다. 곧장 바로 이 장소에 부딪히겠죠.”
내가 아득한 표정을 짓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마 충돌하기 오래전에 여러분들은 모두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식은땀이 흘렀다. 지구 멸망을 앞두고 있다니! 연구소장을 비롯해 이곳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더불어 보상안으로 주어진 행성 이주용 우주선에 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지구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나 같은 보험사 직원에게 지구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노이즈가 보채듯이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서명하시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선배 생각이 났다. 그는 50세 이후에 암에 걸릴 경우 치료비를 지급한다는, 3밀리 크기로 계약서 구석에 적혀진 특약 사항을 발견하곤, 49세에 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고도 1년간 치료도 받지 않고 버티다가 그만 죽어버렸다. 선배의 패배였다. 어느 판사의 말대로 돋보기를 끼면 볼 수 있었으니까. 어리숙한 사람은 죽어버리는 세상이니까. 다급해진 나머지 논점을 그만 보상안 강화로 옮겨 버렸다.
“그 행성 이주용 우주선에 지구 생명체 전부가 탈 수 있습니까?”
“아뇨. 모든 생명체 두 쌍만 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면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옮기지 않았겠어요?”
비아냥거리는 어투에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나, 상대에게 형체는 없었다. 이제는 주변 사물마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의자가 작은 행성처럼 보였고, 중앙 탁자는 항성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협상은 기세였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처럼 보여야 했다.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 이야기를 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수용할 수 없어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이즈가 덥석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걸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저도 사실 고객님의 결정을 수용할 수 없어요.”
이 말을 듣고 잠깐 좋아했던 것이 탈이었다. 노이즈가 시차를 두고서 말했다.
“여러분께 보상안을 주다니요. 귀책사유가 여러분들한테 있는데요.”
금시초문이었다. 우리가 그쪽으로 우주선이나 핵탄두를 날린 적도 없었건만, 다짜고짜 우리 책임이라니. 화가 솟구쳤다. 이제까지는 아무리 협상이 엎어진다고 해도 내 고객에게 손해가 가는 것이었지, 내게 손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내 목숨도 함께 달려 있었다. 전 재산을 내 목에다가 건 느낌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노이즈는 잠시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 넥타이를 조금 풀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뒷머리가 저릿했다. 설마 노이즈가 머릿속을 볼까 봐 어제 보다 만 공영방송 시트콤을 떠올렸다. 재미가 더럽게 없어서 다행히 압력이 조금 준 것 같았다. 노이즈가 다소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이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 아이 울음보다도 못한 전파 망원경으로 관측만 안 했더라도,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내 머릿속에 그림 하나를 그렸다. 눈이 번쩍거리면서 시야가 흐려졌으나, 마우스 커서 같은 것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장면만은 명확하게 보였다. 그것은 꼬리에 무언가를 내뿜으며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노이즈가 말했다.
“저희 고객님께서는 웜홀을 타시고서 도로를 달리고 계셨습니다. 그때 청소기 주변을 스치듯 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파동 형태로 말이죠.”
연구소장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용어들이었음에도 머리가 욱신거렸다. 말을 따라가려 귀를 기울여야 했다. 노이즈가 말했다.
“마침 급한 일이 있어서 저희 고객님은 그렇게 파동 형태로 신나게 달리고 계셨는데...”
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노이즈의 말을 이었다.
“저희가 그분을 관측하는 바람에 입자가 되어버린 거군요.”
빌어먹을 양자역학. 
내 짧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건만,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관측 순간 중첩 상태는 붕괴하여 하나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 문장을 암기하듯이 외우고 있었다. 관측만 하지 않고 있었더라면, 우리가 그와 상호 작용만 하지 않았더라면 충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런...”
노이즈는 내 탄식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눈에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고, 어떤 형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객님께서 여러분들의 청소기, 아니 블랙홀과 부딪힌 겁니다. 저희 고객님이 조금만 핸들을 틀었어도, 여러분 행성과 부딪혔을 수도 있었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고객님께 오히려 감사함을 표시해야 하죠.”
정신이 아찔해졌다. 여기서 내가 어떤 변론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노이즈는 자기가 이긴 것을 직감했다는 듯이 압력을 최대로 낮추었다. 창문에 엄청난 빛이 들어섰다. 노이즈가 말했던 항성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달의 크기였다가 점차 지구로 다가오며 커지기 시작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것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자,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요? 이러다 지구 전체 생명체가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얼른 결정하시죠. 아까 말씀 들으신 대로 저희도 양보해서 이렇게 해드린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인데.”
노이즈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머릿속으로 대화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음에도 말이다.
“당신은 꼭 우주선에 태워 드리겠습니다. 이왕이면, 가장 앞자리에요.”
분명 인류에게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노이즈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마치 내 모든 행동에 어떤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야기 같기도 했다. 보험 사건 사고 사례집에 있었나 싶었다. 
모든 생명체 두 쌍을 우주선에 태우다니. 
그런데 이 말을 들으니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왔다. 협상이 어긋나도 이제는 내게 위협은 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보험을 팔면서 살 수는 없겠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실적 압박이나 고객들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제 내 일이 아니게 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의사가 자기 몸을 수술하기 어렵듯이 보험 직원도 자신의 보험 관련 업무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갑자기 노이즈가 다시 압력을 높였다. 분명 내 생각을 이미 읽었을 것이다. 나는 넥타이를 완전히 풀고서 히어로처럼 미간을 모으며 노이즈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우리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행성이라 하셨죠? 우리가 어딨는지, 누군지 아셨던 것 같은데, 왜 조심하지 않으셨을까요?”
노이즈가 대답하지 못했다. 허점이었다. 나는 더욱 밀어붙였다.
“거기다가 핸들을 조금만 틀었으면 우리 행성이 끝장났다니. 속도가 얼마나 됐는지도 궁금하네요.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 문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관측하지 않고서 관측하는 방법도 모르는데요. 이렇게 지구에 대해 잘 아시는 걸 보니 분명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럼 혹시 고객님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까요? 그렇다면, 원점부터 다시 논의해야겠는데요?”
노이즈는 당황한 듯 압력을 크게 했다. 이제는 협박 수준으로 느껴졌다.
“그러면 바로 항성이 여길 덮칠 텐데요. 모두가 죽고 나서 협상해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미 기세가 크게 꺾여 버렸다. 노이즈는 압력을 크게 낮추고는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용했다. 마지막 일격을 날려야 했다. 자리에 앉아 몰디브 해변에서 칵테일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해보시죠.”
“네?”
노이즈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넥타이를 다시 매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당신들처럼 기술이 좋지는 않지만, 메시지는 날릴 수 있습니다. 혹시 보이저 1호 아십니까? 벌써 저기 멀리까지 갔다고 하던데요? 어디 날리는 건 정말 잘한다니까. 어디 한번 당신 상사나 전 우주에 메시지를 날려 볼까요? 당신이 말한 아이 울음 같은 전파 망원경으로요.”
노이즈가 점차 내게 다가왔다. 이윽고 거리는 매우 가까워졌다. 인간 대 인간이라면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 숨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가 내 목을 조르고는 저 다가오는 항성에 던져 버릴 수도 있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겨야 했다. 인류의 운명이 내 혀끝에 달려 있었다. 이제 결정을 압박해야 했다. 나는 침묵하고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게···”
노이즈는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크기에서 강아지 정도로, 강아지에서 개미로. 꽁무니를 빼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고객 정보를 노출하지 않으시려는 것 보니 어디 높으신 분인 것 같은데 피차 피곤해지지 말고 합의 보시죠.”
“어떻게요?”
이겼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 고객님께서도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따로 위자료는 청구하지 않을 테니, 원상 복구만 해주시죠.”
노이즈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는 척했다. 서류 가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땀으로 손잡이 부분이 잔뜩 젖었다.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모두를 죽게 만드는 셈이었다. 인류 종말이 내 행동에 달려 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점차 작아지던 노이즈는 점이 되어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일단 보험사에서 파손 물품을 원상 복구 해놓겠습니다. 비용 문제는 추후에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노이즈는 사라졌다. 항성도 새벽녘의 별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곧장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목은 탈 것처럼 말랐다. 소장에게 이 사실을 전하려 했으나,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선임연구원도 ‘찬양하라’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목회자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내 실적은 반영되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마지막에 위로금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어 다음에 다시 노이즈에게 연락이 온다면 중력건이나 포탈건을 달라는 등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다신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보험사 직원이 영웅이 되는 일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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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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