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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원한 방랑자 집시의 메시지

친절한 마을·개조심 은밀하게 알려


집시의 호보 기호. 방랑민족 집시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의식주에 필요한 정보를 간단한 부호로 표시했다. 늘 낯선 환경과 접하기 때문에 정착할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이 필수다.

고대에 알파벳을 비롯한 문자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그림을 통한 메시지 전달이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문자 체계는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와서 완전히 습득하는데 지난한 노력이 필요했다. 중세 유럽의 경우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지배층 중에서도 극소수에 한정됐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그림 표시를 개발해 의사를 소통했다. 한 예로 중세의 상인들은 상점 표시를 할 때 그림을 주로 사용했다. 어류 상점에는 물고기, 신발 가게는 구두 모형을 만들어 내거는 식이다.

보다 광범위하게 그림 표시가 사용된 사례는 집시(Gypsy)에게서 발견된다. 집시는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 널리 분포하는 방랑 민족을 일컫는다. 집시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언어나 생활 양식을 살펴보면 인도 북서부의 하층 종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종은 피부가 갈색이고 머리털은 검거나 검은 갈색이다. 평균 키는 1백65cm 정도.

집시는 9-10세기경부터 유럽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14-15세기에 가장 많았고 현재에도 그 수가 약 5백만명에 달한다(1천만명이라는 집계도 있다). 집시는 수십 가족이 천막이나 포장 마차를 집으로 삼고 여기저기로 옮겨다닌다. 이들은 가축을 팔거나 대장간, 꽃장수, 점쟁이 일을 하며 생활한다.

집시는 계속 돌아 다니기 때문에 늘 낯선 환경과 접한다. 그런데 정착민 입장에서 볼 때 집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기 일쑤다. 집시의 일부는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정착민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그래서 집시를 미워하는 주민을 만나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집시 사이에서 통하는 아이콘인 호보가 오래 전부터 발달해 왔다. 한 마을을 거쳐간 집시가 이곳을 찾아올 새로운 집시에게 보내는 기호다. 집시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한 종류의 문자로 써두기는 곤란하다. 더욱이 집시는 사회의 하류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또 정착민들이 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형태여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은밀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 기호가 개발됐다.

호보의 내용은 주로 ‘좋고 나쁨’에 관한 것이다. 즉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좋은지, 마을 사람들이 집시에게 호감을 가지는지, 그리고 집에 친절한 부인이 있는지 또는 사나운 개가 있는지 여부를 간단한 그림 기호로 표현했다. 이들에게 호보는 생존에 필수적인 내용을 담은 진지한 메시지였다.

성화 '블라디미르의 성모 마리아'(1131년경)

엄숙하게 그려진 성인의 얼굴, 성화 - 교육에서 출발, 숭배 대상으로 발전

아이콘(icon)의 또다른 사전적 의미는 성화(聖畵)다. 즉 예수를 비롯해 성모, 수많은 성자들을 묘사한 성스러운 그림이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정식 국교로 채택되기 전 기독교도들은 수많은 박해를 피해다니며 비밀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신자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일생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층민들에게 문자가 통할리 없었다. 당연히 이들이 사용한 것은 그림이었다. 즉 예수가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일일이 그림으로 그려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이때 가장 사실적인 묘사가 그림의 목적이었다. 마치 고대의 동굴벽화처럼 사실 전달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이것이 ‘성화’로 해석되는 아이콘의 기원이다.

그러나 330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성화’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현 터키의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원래 기독교를 믿지 않았지만, 공중에 십자가 형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스스로 기독교를 믿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부터 성화는 단순한 사실 표현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모든 선과 색은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예를 들어 금색은 성스럽고 장엄함, 진홍색은 힘, 녹색과 갈색은 겸허함을 뜻했다. 또 성화를 그릴 때 어두운 색부터 칠하기 시작해 밝은 색을 입혀 나간다. 마지막에 얼굴과 옷에 가장 밝은 색상을 입힌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화는 한마디로 성스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성화를 바라보는 일은 기도에 마음을 집중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겨졌다. 또 성화를 그리는 행위 자체는 기도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성화에 대한 숭배는 또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그 결과 725년에는 성화를 그리는 일을 금지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가리켜 우상파괴론자라 부르는데, 영어로는 성화를 뜻하는 ‘icon’과 파괴한다는 뜻의 ‘clast’를 합쳐서 iconoclast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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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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