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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메타버스가 열린다, 비대면 실험실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마련된 한 연구실. 이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할 수 있는 비대면 실험실을 만드는 일이 한창이다. 인간의 오감을 활용한 실감기술, 현실과 가상을 연결한 확장현실(XR), 초고속 네트워킹 등 다양한 기술로 쌓아 올리는 연구실은 어떤 모습일까. 과학자들의 비대면 실험실, 그 문 너머를 들여다 봤다.

 

“이 화면은 외부에서 접속한 연구원들이 실험을 하는 모습이에요.”


8월 8일 조금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오픈XR융합연구단장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실험실의 한 쪽 벽면에는 모니터들이 붙어 있었다. 화면에는 비행기 날개처럼 생긴 모델이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떠 있었다. 화면의 정체를 묻자 “가상 공간에서 유체의 흐름을 시뮬레이션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곳의 정체는 ‘비대면 실험실’이다. 비대면 실험실은 물리적인 공간에 연구원들이 모이지 않아도, 실험 대상이 눈 앞에 없어도 실험을 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이다. 실제로 이날 실험을 진행한 연구원은 다른 곳에서 원격으로 접속한 상태였다.


비대면 실험실을 위한 준비물은 화려했다. 가상현실/증강현실(VR/AR) 디스플레이와 촉각을 구현하는 슈트 등 쉽게 보지 못하는 장비들도 있었다.


조 단장은 “비대면 협력의 효율을 높이려면 단순히 가상공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높은 품질의 몰입감을 선사해야 한다”고 장비에 대해 설명했다.

 

메타버스보다 정확하고 생생하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과학자들의 이동과 만남을 막았다. 대면 연구가 어려워지면서 전세계 전문가들이 모여 진행하는 초대형 과학 프로젝트에도 제동이 걸렸다. 2020년에는 제임스웹우주망원경 개발이 잠시 중단됐고, 7개국이 공동연구하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의 중심장치인 ‘JT-60SA’의 시운전은 3개월 가량 지연됐다. 현실의 연구실을 벗어나 과학자들을 위한 가상 실험실이 필요해진 배경이다.


Open eXtended Reality(개방형 확장현실). 줄여서 OXR플랫폼융합연구단이 2021년 12월 출범했다. OXR은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이 연계된 현실을 뜻한다. 기술 구현 방식에 따라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로 나뉘는 가상 공간의 개념을 통합해 사용할 때 쓰는 용어다.


 연구단은 이곳에서 교육과 건축, 의료 등 사회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KISTI를 비롯해 KAIST,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등 4개 기관의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한다. 가상 공간에서 여러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메타버스와 연구 플랫폼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연구 플랫폼은 보다 정확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장희진 선임연구원은 “비대면 연구 플랫폼을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공간’에 대한 정밀한 측정”이라고 말했다. 가령 건축 안전에 대해 연구할 때는 실제 건물을 스캔해 가상의 건축물 모델을 짓는다. 그리고 여러 환경 조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시뮬레이션해야 한다. 이 과정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모델링이 필요하다.


장 선임연구원은 “기존 게임이나 메타버스 플랫폼 등에서는 공간을 정확하게 구현할 필요가 없다”며 “반면 OXR 플랫폼을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공간 동기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고속 네트워크 기술도 필요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컴퓨팅 용량이 많이 필요한 3차원(3D) 모델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네트워크 속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시뮬레이션, 모델링 속도를 줄이는 기술도 개발해야 한다. 신정훈 책임연구원은 “건물 구조 전문가와 자재 전문가가 다른 공간에서 각자 조건을 바꿔가며 동시에 연구할 때, 통신이 느리다면 실험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며 “수백 초가 걸리는 시뮬레이션을 수 초 내로 줄이기 위해 인공지능(AI) 알고리즘, 원격 렌더링 등을 함께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상 공간에서 느끼는 손길


한의학을 바탕으로 치매 환자를 관리, 연구할 수 있는 기능도 탑재할 예정이다. 의료인과 환자가 온라인으로 만나는 비대면 진료처럼 연구도 원격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갈수록 늘고 있는 고령층의 건강상태와 치매 등 인지장애를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디지털 치료와 비대면 진료의 중요성은 높아지는데 실제 임상시험은 미흡한 상황이다. 2020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디지털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을 고시했지만, 현재 임상 시험이 진행되는 사례는 10건 내외에 불과하다. 이승민 선임연구원은 “의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OXR 환경을 구축하고 실감 기술의 품질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의학 연구를 위해서는 가상 환경에서 감각을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촉각의 몰입감을 높이는 기술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 선임연구원은 “사람의 손과 다리의 감각이 다르고, 세기나 속도 등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다른 만큼 이를 사실처럼 구현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상에서 현실을 새롭게 만든다


비대면 연구 플랫폼은 2027년까지 개발을 마무리하고 연구 기관과 기업 등 민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현재는 기초 연구를 하는 단계다. 연구에 필요한 데이터는 현장에서 수집한다. 신 책임연구원은 “건축 관련 데이터는 신도시 개발 현장에 직접 방문하고, 의료 데이터는 협력 한의학병원에서 받는 등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한 플랫폼에 담아내는 만큼 융합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 선임연구원은 “우선 건축과 헬스케어, 교육 등을 중심으로 개발을 마치는 것이 목표지만, 환경이나 국방 분야로도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메타버스는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는 개념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하지만 OXR플랫폼융합연구단의 연구원들은 현실을 기반으로, 현실을 위한 가상 공간을 만들고 있다고 입모아 말한다. “누군가는 우리가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간다고 말하겠지만, 우리의 연구는 가상이 아닌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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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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