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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IBM과 일곱난쟁이

풀어쓰는 컴퓨터역사④

군사용으로 쓰이던 컴퓨터는 IBM/360의 개발을 계기로 산업용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전쟁은 끝났다!'(War is over!)라고 쓰여진 호외가 뉴욕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시민들은 환호하였고 그 지루하고도 참혹했던 제2차세계대전은 마침내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2차대전의 숨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은 원자폭탄개발의 성공이었다.

2차대전이 만들어낸 우울한 발명품인 원자폭탄은 이후 인류를 새로운 광기의 역사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전쟁이 인류에게 준 교훈은 한두개가 아니였다. 새로운 학문(예를 들면 산업공학)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확한 무기를 개발해내는데 필요한 자동계산장치의 절박함이었다.

전쟁직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컴퓨터는 국방관련 무기개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쟁은 어떤 개발비용도 너끈히 마련해 주고, 윤리적인 비판도 마비시켜준다. 그 결과 전자계산기는 군사용으로 필수 불가결한 도구가 되어버렸다. 수백개의 독화살보다 잘 정비된 한 자루의 총이 훨씬 더 위력이 있듯이, 눈짐작으로 화약열기를 헤쳐가며 시린 눈으로 퍼부어대는 곡사포 10대 보다는 정밀계측기계가 딸려 자동적으로 폭파지점을 보정해주는 한대의 대포가 훨씬 더 위력적이었음을 2차대전은 똑똑히 보여주었다.

하여간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냥 만세만 부를 일이 아니였다. 그동안 국방부에 비싼 무기들을 납품했던 일단의 군수업체는 사라져가는 고객들에게 굿바이 인사만 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고객들을 찾아야만 했고, 모두들 우왕좌왕하였다. 지금도 그렇듯이 평화가 오면 무기상인들은 세상이 조용해질까봐 밤잠을 설친다. 돈은 세상이 어수룩할수록 잘 벌어지나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IBM은 창업이래 자동계산기 분야에서 항상 수위를 지켜왔다. IBM이 선두를 빼앗기지 않은 것은 IBM회사의 제품이 특별히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였다. IBM이 주된 장기로 내세우는 것은 탁월한 마케팅전략과 고객들에 대한 친절한 사후서비스였다. 그리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사한 짓도 서슴지 않는 점 때문이었다.

전자계산기 개발초기 어떤 회사가 천신만고끝에 훌륭한 과학계산용 시스템을 개발했다. 회사의 사운을 걸고서 개발한 이 시스템은 당시의 모든 진보적인 기술을 종합하여 만든 뛰어난 것이었다. 발바닥에 유리조각을 찔린듯한 위기감을 느낀 IBM은 한가지 치사한 꾀를 생각해냈다.

그 회사가 완성된 제품을 팔려고 여기저기에 내놓았을때 IBM의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 나팔소리는 이러했다. "기대하시라! 드디어 최신형 컴퓨터가 두어달 뒤에 발표된다. 이 시대의 진정한 컴퓨터! 놀라지 마시라. 가격은 시중에 떠도는 제품의 절반 수준. 두어달간의 인내가 여러분을 수년간의 만족으로 이끌어줄 것 입니다." 대개 이런 뜻의 선전이었다. 드디어 IBM이 바라던 효과가 나타났다. 그 회사의 제품을 구입하려던 고객들(주로 국방관련 연구소)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좀더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신제품을 개발한 회사는 낙심천만이었다. 막 팔려고 내논 제품들이 전시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회사는 IBM을 제소했고 재판은 몇년을 끌었다. 결국 IBM의 흑색선전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싸움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평했다. IBM은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했다. 거인 IBM의 체면은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2차대전이 끝나자 IBM은 새로운 개발전략을 짜야만 했다. 보다 시장을 넓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만 했다. 그 첫번째 조건은 상업용으로 성공하기 위해 가격이 적당한 수준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360시스템의 세가지 원칙

IBM특유의 밀어붙이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회장 토머스 왓슨2세와 빈센트 리어슨 신제품개발담당이사는 IBM 개발부서 대표자들을 어느날 조용히 한 호텔방으로 불렀다. 그리곤 그들을 꽁꽁가두어 버렸다. 한마디의 숙제가 주어졌다.

"IBM컴퓨터의 새로운 세대를 열기 위한 전략을 세울 것.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면 아예 방밖으로 나올 생각은 말 것." 이 지령을 받는 위원13명의 대장 에반스는 얼떨떨하였다.

60일이 지나갔다. 모두들 1백m 경주를 질주하는 느낌으로 한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IBM시스템/360의 개발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자그마치 원자폭탄을 완성시킨 맨하탄계획의 2배보다 많았다. 드디어 컴퓨터분야에 원자폭탄 보다 2배의 위력을 지닌 새로운 정보폭탄이 투하되었다.

IBM/360이 고수하고자 하는 원칙은 세가지였다. 첫째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가격이 충분히 저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다용도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차대전 동안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특별한 목적에만 사용되도록 만들어졌다. 사무용 탄도계산용 핵분열계산용 등 한 응용분야에서 다른 응용분야로 넘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비용이 소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분야에서 컴퓨터가 쓰임에 따라 각각의 목적으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개발전략임이 드러났다.

세번째 원칙은 호환성(compatability)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IBM내에서도 각 연구팀끼리 프로그램이나 자료를 교환해서 컴퓨터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각 컴퓨터마다 고유의 CPU와 출력장치 입력장치 프로그래밍방법들이 있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겨져왔다. 자신의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모든 프로그램이 다른 컴퓨터에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 이런 일은 짜증스럽게 변해갔다.

더욱이 IBM의 소형기종에서 대형기종으로 업그레이드(up grade)시키고 싶어도 이전에 사용된 프로그램들이 하루아침에 휴지로 변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무척이나 꺼려했다. 이전에 값싸게 팔아먹은 소형기종이 도리어 대형기종 판매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지금은 프로그램의 호환성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지만 그 시대에는 마치 프랑스인이 러시아에 가서 문학가가 되겠다는 정도로 의아하게 받아들여졌다.

한편 다용도 컴퓨터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이견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용도의 단점은 '모든 곳에 사용되면서도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해버리는데 있다. 개발위원중에 몇명은 죽도 밥도 아닌 다용도 개발에 투자하는것 보다는 보다 강력한 CPU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운영체제(OS)의 도입

고뇌에 찬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IBM회장 왓슨은 원래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고, 1964년 4월7일 왓슨은 77개 언론사를 초청한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드디어 IBM시스템/360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시스템/360시리즈라고 명명된 제품은 모두 6개의 모델로 구성되어 있다. 1964년 4월은 컴퓨터 발전사에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필적할만한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시스템/360에서 360이 의미하는 바는 3백60도 즉 어떤 목적에도 적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컴퓨터는 제3세대가 시작되었다. 360시리즈는 사용자들의 능력에 따라서 6개의 모델중에 하나를 골라 쓰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상위기종으로 전환하려할 때에도 별다른 부대비용없이 이전에 사용된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스템 360은 운영체제(operating system)라고 하는 시스템 프로그램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 360시리즈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면서 소프트웨어에 관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360시리즈의 운영체제를 작성하는 일은 이전의 어떠한 프로그래밍과제보다는 더 거대한 것이었다. 이 과제를 주도한 브룩에 따르면 소프트웨어과제는 다른 과제를 완성하는 것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고 한다. 즉 프로그램의 완성을 앞당기기 위해서 더 많은 프로그래머를 투입하면 할수록 전체공정은 도리어 늦어지게 된다는 다소 아이러니컬한 교훈이 얻어졌다.

이로써 종전에는 하드웨어의 부속품정도만 인식됐던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전산학의 새로운 분야가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IBM이 개발한 시스템/370도 360에서 사용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 IBM의 고객으로 발목잡힌(?) 사람들은 계속 IBM의 고객이 되는 것이 유리한 일로 되어버렸다.

IBM에 플러그만 꽂으면…

IBM의 지위는 시스템/360의 등장으로 일약 거인중의 거인이 되었다. 이제 거인의 그늘아래 옹기종기 모인 군소업체들은 IBM의 그늘아래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히 뛰쳐나가 뙤약볕아래에서 고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른바 플러그컴페티블(plug-compatible)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졌다. IBM에서 생산해내지 않는 주변장치를 만들어서 그것을 단순히 IBM의 시스템/360에 플러그만 꽂는 정도로 동작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른 조정장치없이 IBM의 제품과 상호통신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이득이 되었다. IBM은 360의 성공으로 엄청난 흑자를 보면서 전체 컴퓨터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시대의 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서 'IBM과 일곱난쟁이'가 있다. 즉 IBM과 경쟁하는 7개의 컴퓨터제조회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난쟁이중 더러는 IBM에 부분적인 공격을 하여 성공하기도 했지만, IBM의 튼튼한 지위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360의 성공을 계기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지위가 역전되었다는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컴퓨터의 이용이 더이상 전문군사기술이나 과학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사무작업에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다 하겠다.

일곱난쟁이 가운데 몇몇은 IBM이 파고들지 못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고심했다. 그 결과 미니컴퓨터라고 하는 새로운 기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DEC(Digital Equipment Company)라는 회사는 MIT출신의 공학자 몇명이 모여 출범했다. DEC는 먼저 과학실험 실습용의 염가 컴퓨터시장을 노렸다. 거인 IBM의 굵은 손가락으로 잡아낼 수 없는 조그만 동굴속을 DEC는 후벼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초반까지 DEC는 IBM에 버금가는 컴퓨터 회사로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1960년 DEC는 먼저 PDP-1 이라는 데이터처리용 컴퓨터를 만들었다. 당시 가격으로 12만달러였지만 가격대 성능비로 보아서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쓸만하였다.

PDP-11 까지 이어진 PDP시리즈의 개발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그것은 곧 DEC의 주종 상품이 되었다. PDP 계열의 매력은 단연 싼 값, 빠른 속도, 그리고 소규모 연구소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 DEC가 판매한 PDP-8은 대성공이었다. PDP-8은 1980년대까지 무려 5만대 이상이 팔렸다. 그리고 IBM시스템/360시리즈보다 무려 5분의 1가격밖에 되지 않았다. 1970년대 초까지 DEC는 미니컴퓨터시장의 34%를 차지하였고, 이것은 이 분야에서 IBM 하니웰 휴렛팩커드의 매상고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대형기종에서 IBM의 우위는 갈수록 더해갔지만, 미니컴퓨터시장에서는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DEC는 '같은 다홍치마라면 더 싼값으로'라는 사용자들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대형기종의 능력을 잘라서 여러군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일마다 미니컴퓨터를 설치하고 이를 컴퓨터네트워크라는 새로운 통신기술로 묶어서 운영하는 새로운 기술로 나아가기 시작하게된 것이다. 대형기종이 초대형인 슈퍼컴퓨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면 소형은 네트워크기술의 도입으로 더욱더 분산처리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양극단의 발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스템/360으로 시작된 제3세대 컴퓨터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규모집적회로(LSI)의 등장으로 또 한번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컴퓨터부품의 LSI화는 덩치큰 부품을 하나의 칩위에 모두 수용함으로써 개발과정을 보다 기계화 단순화시켰다.

1971년 인텔사에서 발표한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는 마이크로컴퓨터의 주춧돌이 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등장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프로세서의 가격을 급격히 하락시킨 것이며 또 하나는 이렇게 내린 가격덕택으로 모든 공업제품에 마이크로컴퓨터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제는 방대한 컴퓨터의 부품 하나하나가 각각 LSI화되어서 다른 기기속에 내장되는 것이다.

더구나 마이크로 컴퓨터는 컴퓨터의 소유에 있어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 장본인은 잘 알고 있듯이 애플컴퓨터다. 컴퓨터는 이제 가정에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초기 괴물과 같은 덩치의 에니악에서 이제는 그 정도의 능력을 한개의 마이크로 칩 하나로 줄인 손바닥만한 크기로 변화했다.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진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초기 마법사와 같은 능력으로 보였던 컴퓨터프로그래밍 작업을 이제 뜨개질배우는 정도의 아주 저급한 기술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오직 그만이 컴퓨터라는 신과 통화할 수 있었던 컴퓨터에 관한 성직자 계급은 마이크로전자기술과 보편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발로 몰락하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과 루터의 성경번역이 한 역사의 종지부를 기록했듯이 새로운 기술은 하늘의 컴퓨터를 지상으로 끌어 버렸다. 그리고 이 모두는 과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기인하겠지만 자본의 자기증식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경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1960년 미국 대통령선거 보도에 등장한 컴퓨터. 사진은CBS뉴스룸
 

199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환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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