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우연이 겹쳐 뭘 해도 안되는 날이 있다. 그저 운을 탓하며 하루를 보내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저 우연만이 아닌 필연들이 함께 불운을 만들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대나무에게도 올해는 이런 날들이었을까.
최근 남부 지방에서 대나무가 말라죽고 있다. 6월 국립산림과학원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지역 중 43%에서 고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23%는 이미 고사가 일어났다. 8월 5일 기자가 찾아간 경남 밀양도 그중 한 곳이다.
대나무는 보통 꽃을 피운 뒤 말라죽는다. 그런데 개화는 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나무 꽃은 짧으면 60년, 길면 100년에 한 번씩 핀다. 정재엽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바이오소재연구소 연구사는 “(개화 및 고사 현상이) 이렇게 넓은 범위에 걸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대나무를 찾아 밀양 초동면의 한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초록이 우거진 산 중턱에 마치 갈색 점처럼 변한 대나무 고사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 어귀를 올라 가까이 다가섰다. 건강한 대나무 사이로 바싹 말라 힘없이 쓰러진 대나무들이 숲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태풍이 할퀴고 지나가 폐허가 된 숲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날 초동면에서 마주한 대나무 고사지만 네 곳이 넘었다.
지역 주민도 죽어가는 대나무 숲을 안타까워했다. 인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주민은 “이곳 토박이로 6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며 “어릴 때 대나무 사이를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라 안타깝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 농부는 “밭으로 올라가는 길로 대나무가 계속 쓰러져 불편하기도 하고, 다칠 뻔도 했다”며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대나무 꽃이 이렇게 한순간에 피어날지 몰랐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갑자기 여러 곳에서 동시에 꽃을 피우는 건 우연일까. 정 연구사는 “관계 기관과 전문가들이 모여 이번 현상의 원인에 대해 토론한 결과 기후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겨울부터 혹한과 가뭄이 이어졌다. 대나무 숲의 양분이 고갈되고 기후가 바뀌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대나무 꽃이 피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바꿀 일이 벌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100년 만에 핀 꽃을 본 선조들의 기대와 걱정이 서려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2022년, 기후위기가 대나무 꽃처럼 활짝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