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의 작은 마을에 최근 들어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팽나무 한 그루를 보기 위해서다. 높이 16m, 둘레 6.8m에 나이는 약 500살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요즘 ‘우영우 팽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 우영우가 친어머니와 함께 이 팽나무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면서 붙은 이름이다.
우영우는 “소덕동 언덕 위에서 함께 나무를 바라봤을 때, 좋았습니다”라고 회상한다. 이 기억으로 우영우에게 소덕동 언덕 위 팽나무는 세상 어느 나무와도 다른 나무가 됐을 것이다.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에게도 이 팽나무는 시간 내어 찾아가 보고 싶어질 정도로 특별해진다. 관계를 맺는 건 이렇게 쉽다. 잠깐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된다. 그런데 팽나무 하나만 10여 년 동안 들여다본다면 어떨까.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 연구원의 박사 학위논문 제목은 ‘한반도 팽나무속의 계통분류학적 연구’다. 식물은 진화를 거듭하며 저마다 고유한 형질을 갖춘다. 형질이란 생명체의 모습이나 속성을 뜻한다. 종을 구분하기 위해선 형질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다양한 형질 중에서도 종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기준점이 있다. 꿀샘일 수도, 겨울눈일 수도, 꽃받침일 수도 있다. 팽나무속의 경우 열매에서 과육을 제거하고 난 딱딱한 씨앗 겉부분(내과피)이 그 기준점이었다. 허 연구원이 내과피를 토대로 팽나무속 하나를 분류하기까지 꼬박 10여 년이 걸렸다. 연구할수록 팽나무에 대한 짝사랑이 깊어졌다는 그를 8월 4일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만났다.
짝사랑이 깊어졌다, 연구할수록
“내과피는 식물이 씨앗을 지키기 위해 고안해낸 거예요. 복숭아 씨앗을 떠올리면 쉬운데, 보통은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게 목질화돼있죠. 그런데 팽나무의 경우 내과피가 아라고나이트라고 하는 광물로 돼 있어요. 신생대 4기에 출현한 이 나무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광물을 쓴 걸까요? 헤어나올 수 없었어요. 내가 온전히 알고 사랑하기엔 어려운 존재인 걸까 하는 아득함도 느꼈죠.”
허 연구원이 전공한 식물분류학은 식물의 작은 부분을 보고 먼 과거를 되짚어 가는 학문이다. 허 연구원은 “식물에는 지구에 적응해 살아오면서 생긴 형태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며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다양한 면을 종합해 그 식물의 종을 찾는다”고 했다.
고요한 연구실에서 표본만 보는 일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햇볕이 따가운 한낮, 허 연구원과 함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걸었다. 그는 만나는 식물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나눴다. 길가에 노란 꽃이 자잘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 안개가 낀 것 같았다. 허 연구원은 꽃을 “마타리”라고 소개하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소녀가 양산을 닮았다며 꽃을 들어보이는 대목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뿌리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는데, 익숙해지면 냄새만 맡고도 근처에 마타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기자에겐 느껴지지 않은 옅은 냄새다.
딸랑딸랑 곰을 쫓으며 전국 산을 누비다
한반도에서 자라는 풀(초본)과 나무(목본)를 모두 합하면 3500여 종이다. 냄새만 맡고도 이들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식물분류학자의 신묘한 능력은 쓰임새가 많다. 허 연구원은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식물을 지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크게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우선 보호지역을 지정하기 위한 근거자료를 만듭니다. 산 하나를 두고 거기 사는 식물종을 전부 밝히는 거예요. 외래종은 몇이고, 멸종위기종은 몇이고 하는 식물의 분포 정보를 보고서로 정리하죠. 또 나라에서 관리하는 희귀식물에 등급을 매기기 위한 연구도 합니다. 희귀식물이 사는 곳을 추적해 서식환경을 평가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는 해발 1300m 이상 아고산지역의 침엽수종을 관찰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살피는 연구를 해요.”
전국의 식물을 만나러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누빈다. 못 보던 꽃이 보인다는 지역 주민의 제보를 받고 무인도의 절벽을 탄 적도 있다. 인터뷰 다음 주엔 덕유산 등지를 조사하러 간단다. 허 연구원은 “반달가슴곰이 사는 곳이라 곰을 쫓기 위해 방울을 딸랑거리며 다녀야 한다”며 웃었다.
정제돼있는 도시 생활을 하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을 체감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허 연구원에게 식물이 맞닥뜨린 위기는 더 강하고, 더 빠르게 와닿는다. 지난 3월 울진·삼척 등지에 대형 산불이 났다. 산불이 일어난 곳은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험준한 산에서만 사는 꼬리진달래의 대규모 군락지이기도 했다. 허 연구원은 “군락지에 워낙 많은 개체의 꼬리진달래가 살다 보니 그간 우리나라에선 꼬리진달래 멸종위기에 대한 위기감이 크지 않았다”며 “현재는 대규모 군락지가 한 번에 타버린 후, 회복이 어려운 상태”라고 했다.
백두대간을 따라 번성하던 침엽수 분포 면적이 줄어드는 것도 걱정거리다. 허 연구원은 “지난 2019년부터 전국 31개 산지에서 침엽수 자생지 500개 지점을 조사한 결과 32%가 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래라면 나무가 세대를 교체하며 이어져야 할 숲이다. “숲이 존속하지 못하고 죽고 있어요. 침엽수의 떼죽음이 현실이 된 거죠.”
종 대 종으로 예의를 갖추는 수업
허 연구원은 식물과 사람이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다. 팽나무는 셀티스 시넨시스(Celtis sinensis)다. 그는 “종 대 종으로 보면 식물은 인간보다 오랜 시간 지구에서 사는 방법을 배워온 대선배”라고 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지구의 46억 년 역사를 시계처럼 두고 생물의 출현과 멸종 시기를 그려보는 거예요. 지구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기후변화 패턴을 가늠해보다 보면 인간이 번성한 시간이란 정말 짧죠. 한 종으로서 겸손해지게 돼요. 앞으로 식물을 대할 때 도구로, 수단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지구에서 공존하고 있는 하나의 종으로서 예의를 갖춰 존중해야 한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식물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유년 시절부터였다. 허 연구원은 초등학교 전교생이 100명이 안 되는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식물을 가꾸는 걸 좋아하던 아버지와 약으로도, 음식으로도 활용되는 식물의 다양한 면을 소개한 할머니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연 그 자체가 그의 근처에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었어요. 절 키워준 나무기도 해요. 친구들과 모이는 장소도, 숙제하는 장소도, 책 읽는 곳도 모두 팽나무 밑이었죠. 그러다 정월 대보름이면 팽나무에 새끼줄을 두르고 마을 제사를 지냈어요. 팽나무에 소원을 빌면 들어줄 거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신을 만나는 방법 중 하나가 팽나무에게 말을 거는 거구나’라고 여겼죠.”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팽나무가 전한 식물 수업은 세대를 거듭해 이어지고 있다. 허 연구원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엔 9살 동생을 데리고 숲을 걸으며 식물 수업을 했다. “우리가 앞으로 오래오래 살기 위해선 식물들을 잘 지켜줘야 해”라고 가르쳤다. 지금은 초등학생 조카를 데리고 아파트 화단을 거닌다.
“조카가 이제 아파트 화단의 풀 이름을 다 외워요. 선생님에게 자기 꿈이 이모처럼 식물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했다더라고요. 자연과 책을 오가며 식물을 배워야 해요. 책을 보고, 거기 나온 식물을 자연에서 만나면 식물을 알아보는 눈을 갖출 수 있어요.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내가 하는 일은 뭐, 초록(草錄)이고 목록(木錄)이지”라는 말버릇을 가진 그다. 지난 7월 출간된 허 연구원의 책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에는 풀과 나무를 기록하는 그의 일이 고스란히 담겼다. 식물에게 쓴 연애편지를 엮어놓은 듯한 책이다. 날씨가 조금 서늘해지는 가을, 이 책을 들고 산책을 해 보자. 우영우와 허 연구원의 팽나무처럼 식물 하나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삶 속에 들어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