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권리 가운데 사람의 목숨에 관한 권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조선 시대뿐 아니라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산 이후로 억울한 죽음이 없던 적이 있었을까? 우리 조상들도 주검을 검사하여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였으리라.
조선시대의 검시(檢屍, 주검을 검사함)를 자세하게 알 길은 없다. 다만 사료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검시와 관련된 책을 보면 조선 초기까지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원(元)나라 때 왕여(王與)가 만든 ‘무원록’(無寃綠)은 중국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져 검시 지침서로 널리 활용됐다.
세종대왕은 ‘무원록’이 난해하고 우리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도 많음을 보고 책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석을 덧붙인 조선판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최치운 등이 주석과 음훈을 달아 1438년 ‘신주무원록’(新註無寃綠)을 간행했다. ‘신주무원록’은 이후 3백년 이상 조선의 검시 교과서로 쓰였다. 그 후 영조 때 구택규는 ‘신주무원록’을 바탕으로 우리 현실에 맞게 논리적으로 거의 새로 쓴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1792년에 발간했다.
최근 ‘신주무원록’의 한글 번역서가 출간돼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당시 조상들은 각종 죽음의 원인을 어떻게 밝혀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세종의 어명으로 신주무원록 간행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처럼 검찰청이나 법원이 따로 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사부터 판결 그리고 양형(量刑, 형의 경중을 정함)까지 모두 고을의 수령, 예컨대 원님이나 사또가 맡았다.
조선시대의 검시제도는 한 마디로 복검제(覆檢制)로 설명할 수 있다. 복검제란 원칙적으로 검시를 두번 시행하는 제도다. 즉 살인사건 또는 살인이 의심되는 사건이 생기면 일단 해당 고을의 수령이 주검을 검사하는 초검(初檢)을 하고, 그 결과와 무관하게 이웃한 고을의 수령이 다시 한번 검시하는 복검(覆檢)이 뒤따른다. 만약 두 결과가 일치하면 이를 받아들이지만, 서로 다르면 형조(刑曹)같은 상급 관청에서 세번째로 검시한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검시로써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려 했다.
초검의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①변사자가 있다는 신고가 있으면, ②당해 고을의 수령이 검험관(檢驗官)으로 서리(書吏), 오작, 항인(行人) 등을 데리고 출동해, ③현장과 주검을 검사하고, ④관련인들을 조사하고, ⑤시장(屍帳, 검시 결과를 기록한 장부)을 작성한다. 이 시장은 상급 관청인 도(道)에 보고한다. 복검(覆檢)이나 삼검(三檢)도 같은 절차로 시행했다.
위 문헌들은 검험관의 마음가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장에 나가기를 미루거나 현장에서 주검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오작이나 항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동을 금했다. 또 현장에서 밤을 지내는 경우 사건 관련인의 집에서 묵지 않도록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의 진술을 받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잘 살피게 했다.
한편 이처럼 최대 세차례나 검시를 하도록 한 것은 당시 주검을 검사하는 방법이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번의 검시로써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굳이 여러번 검사할 필요가 없다.
유교의 영향으로 주검을 해부하여 검사하는 부검(剖檢)을 할 수 없었던 당시로는 검시에서 생길 수 있는 잘못을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기 위해서는 여러번 검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활용되는 법의학 지식 많아
당시의 검시 방법은 현재에 비하여 미흡한 면이 적지 않다. 과학과 인체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못하던 시대였으므로, 현대 법의학에서 적용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신주무원록’에는 오늘날 법의학자가 실제로 적용하는 지식이 적지 않게 수록돼 있다.
검시 방법을 보면 부검을 못한 대신 주검을 겉으로 살피는 일이 강조돼 있다. 따라서 거의 모든 항목에서 얼굴 색깔이 어떠하며, 눈을 떴거나 감았으며, 손을 쥐었거나 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객관적이지 못하고 재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굴이 붉은 때에도 적자(赤紫), 적흑(赤黑), 담홍적(淡紅赤), 미적(微赤), 미적황(微赤黃), 청적(靑赤) 등으로 구분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이를 달리 표현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당시의 지식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도록 한 점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목을 매어 사망한 경우에 얼굴이 검붉은지 여부는 지금도 중요하다. 대들보에 목을 매 발이 공중에 매달린 채 죽은 경우는 체중이 실려 목의 동맥과 정맥이 모두 막혀 울혈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목을 맨 것으로 위장한 경우는 얼굴색이 검붉다. 목을 조를 경우 정맥만 막히기 때문에 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묘한 색깔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반면 ‘신주무원록’이나 ‘증수무원록’에서 강조한 것처럼 목을 맨 장소가 목을 맬 수 있는 높이인지, 목을 맨 대들보 위에 어지러운 흔적이 있는지, 끈의 길이가 적절한지, 또 매듭의 형태는 어떤지 등은 지금도 검시할 때 반드시 살펴야 할 대상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법의학의 근본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 ‘정확성’과 ‘엄격함’이다. 다만 과학의 발전이 요즘만 못했고 부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점이 큰 제약이었다.
비록 현대의 검시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라도 ‘신주무원록’이나 ‘증수무원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상들이 지닌 인권 의식과 검시에 대한 철학만큼은 높이 기릴만 하다.
1.검험하는 방법
신 새로 기름칠한 비단이나, 기름칠해 반투명한 우산으로 보고자 하는 곳을 가린 후, 햇빛을 향하여 우산을 그 사이에 두고 보면 흔적이 바로 나타난다. 만일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숯불로 비추어본다. 이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 주검을 검사하는 일에서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빛이 너무 강해도 반사되는 빛 때문에 또 너무 어두우면 잘 보이지 않아, 상처를 간과하기 쉽다. 따라서 적절한 조명이 필요하다. 새로 기름칠한 비단이나 기름칠해 반투명한 우산이란 빛을 가리되 너무 어둡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어두우면 빛을 비추되 촛불처럼 중심 부위와 주변 부위의 차이가 큰 빛보다는 숯불처럼 넓은 부위가 비슷하게 밝은 빛을 권한 것이리라.
2.독극물 검사의 경우
증 독을 먹고 죽은 것을 검험할 때는 은비녀를 사용하는데, 조각수(쥐엄나무의 껍질을 삶은 물)로 씻은 후 죽은 사람의 입안과 목구멍에 집어넣고 종이로 밀봉하였다가, 얼마 지나 빼내보아 청흑색(靑黑色)이 되었으면 다시 조각수로 씻어내 색깔이 지워지지 않으면 바로 이것이 중독사(中毒死)요, 만약 독기(毒氣)가 없다면 그 색깔이 선명하게 흰색으로 된다.
-달걀 요리에 은수저를 넣으면 검게 변한다. 이는 달걀에 있는 유황 성분이 은과 결합하여 얇은 검은 막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질산염이나 비소에서도 같다. 예전에 사용하던 독극물 가운데 유황, 질산염, 비소 등을 포함하였다면 은으로 이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독극물에는 반응하지 않으므로 완전한 방법은 못된다.
증 흰밥 한 덩이를 죽은 사람의 입안 목구멍 속에 집어넣고 종이로 덮어 한두 시간 지난 후 밥을 꺼내 닭을 주어 먹이면 닭도 또한 죽는데 바로 이는 중독사다.
-증수무원록에서 언급한 반계법(飯鷄法)은 매우 흥미롭다. 다만 사용한 닭을 먹고 죽는 사람이 있어서 영조 6년에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쓴다면, 사용한 닭은 바로 폐기하도록 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극물은 많다. 현대의 법의독물학에서도 중독사에서 원인 물질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한가지 방법으로 부검 도중에 주검의 위 내용물을 실험쥐에 먹여 실험쥐가 죽으면, 일단 독극물이 있다고 보고 이를 찾는 정밀검사를 실시하는 방법을 아직도 사용하는 곳이 있다. 따라서 반계법은 조선판 동물실험인 셈이다.
3.의사(縊死, 목매어 죽음)의 경우
증 활투두와 사투두로 목을 맨 경우는 발이 땅에 닿고 아울러 무릎을 꿇어도 모두 죽게 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발이 땅에 닿아도 목을 매어 죽을 수 있다. 심지어 엎드린 채로 머리만 들리는 정도로도 사망한다. 이 경우는 숨이 막혀서라기보다는 머리로 가는 혈액이 끊겨서 죽게 된다. 몸 전체의 무게가 실리지 않아도 목에 있는 정맥이 막힐 수 있어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4.익사의 경우
신 물 깊이가 3-4척(1척은 약 30㎝)만 넘어도 죽을 수 있다.
-실제로 물 깊이가 키보다 얕아도 익사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이유로 의식을 잃으면 한 뼘 정도의 얕은 물에서도 익사한다
신 입과 코 안에 흰 물거품이 나온다.
-매우 중요한 소견이다. 물에 빠져 호흡을 하다가 들이마신 물과 기관지에 남아 있는 공기와 점액이 사망하기 직전의 껄떡호흡으로 인해 섞여 잘고 흰 거품이 돼 나온다. 이는 물 속에서 살아있었다는, 즉 익사했다는 중요한 증거다.
신 남자는 양기(陽氣)가 얼굴로 모이므로 얼굴이 무거워 익사하면 반드시 엎드리고, 여자는 음기(陰氣)가 등에 모이므로 등이 무거워 익사하면 반드시 드러눕는다.
-옳지 않다. 대개 머리와 팔다리는 부피에 비하여 뼈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므로 비중이 높고, 상대적으로 몸통은 비중이 낮다. 따라서 주검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있었다면, 남녀에 상관없이 머리와 팔다리가 아래로 늘어지는 엎드린 형태로 발견된다.
5.불에 타 죽은 경우
신 본 시체는 피부가 모두 타고 살이 문드러졌으며, 손과 발을 모두 오그리고 있고, 입, 코, 귀 안에 모두 그을음과 재가 들어 있으니 이는 생전에 불에 타 죽은 것이다. 시체가 온전한 경우, 죽기 전에 불을 피해 도망치다가 입을 벌려 재와 그을음이 들어갔을 것이므로, 곧 입과 코 안에 검은 재와 그을음이 있는지 없는지 살핀다. 있다면 생전에 불에 타 죽은 것이요, 없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주검이 화재 당시에 생존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현재에도 매우 중요하다. 살해한 주검을 은폐하거나 사망원인을 오인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후에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가장 중요한 소견은 입과 코(부검을 하였다면 기관(氣管)이나 기관지)에 검댕이 있는지 여부다. 만약 숨이 드나드는 길에 검댕이 있다면, 이는 화재 당시에 숨을 쉬었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화재 당시에 생존하였음을 증명한다.
6.살해된 여자의 검험
신 처녀인지 아닌지 검험할 때는 산파로 하여금 솜으로 싼 손가락을 음호(여성생식기) 내에 넣어 검은 핏자국이 있으면 처녀요 없으면 처녀가 아니다.
-피해 여자가 처녀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처녀막이 온전한지 여부를 직접 보아서 판단한다. 당시에는 여자의 음부를 속속들이 볼 수 없었을 터이므로 산파로 하여금 손가락을 넣어보도록 한 것 같다. 그러나 설사 손가락으로 처녀막을 파손하더라도 시체의 경우 출혈이 없다. 한편 처녀라도 성행위가 아닌 외력으로 처녀막이 이미 파열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솜에 핏자국이 있으면, 처녀 여부와 상관없이 강간 등의 성폭행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고, 또 월경중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7.칼날 등에 의해 살해된 경우
신 상흔 어귀의 피육에 피가 있고, 내막이 뚫렸으며, 살이 넓게 벌어지고, 화문(花文)이 밖으로 나와 있으며 손가락으로 집으면 선홍색 피가 나온다. 사후에 칼날로 베어 손상을 입힌 것은 건조하고 희며 피가 없으며, 손으로 누르면 맑은 물이 나온다.
-살아있을 때에 입은 예기(銳器, 날카로운 도구) 손상에는 반드시 피가 나와 상처의 주변에서 응고했거나 상처 속으로 스며든 피가 있으며, 생전의 근육 수축 때문에 상처가 넓게 벌어진다. 이는 생활 반응이다. 화문은 ‘속살의 결 무늬’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근육의 결을 뜻한다고 본다. 반면 사후에 칼로 베면 출혈이 없고, 눌러도 피가 섞이거나 섞이지 않은 맑은 조직액이 배어 나오기 쉽다.
8.친자감정의 경우
증 피를 떨어뜨려 친자를 확인하는 방법: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대개 자식은 아버지가 남긴 몸뚱이(遺體)요, 낳은 자는 어머니다. 시험하기를, 자식의 몸을 찔러 한두 방울의 피를 내어 부모의 해골 위에 떨어뜨리면 친생(親生)의 경우는 피가 뼈 속으로 스며들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스며들지 아니한다.
-옳지 않다. 아마 당시에도 친자인지 여부를 감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나보다. 그러나 부모의 해골 위에 피를 떨어뜨려 스며드는지 여부로 친자를 감정할 수는 없다. 매장한 뼈에 지방 성분이 분해되지 않았거나 골막이 유지돼 있으면 혈액은 스며들지 않고 흘러내린다. 현대에는 유전자검사(DNA검사)로 약간의 조직만 남아있어도 틀림없는 감정을 시행한다.
9.남자가 지나치게 성교해 사망한 경우
신 대개 남자가 방사를 지나치게 많이 하여 정기가 모두 소모돼 부인의 몸 위에서 죽은 경우는 진위를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인 경우에는 양물(음경)이 오그라들지 아니하고, 거짓이면 오그라든다.
-방사가 지나쳐 즉사하는 경우는 없다. 흔히 성교와 관련한 죽음을 복상사(腹上死)라고 하는데, 사망원인은 심장 질환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성교 도중이기보다는 성교 직후에 사망하는 예가 많다. 만약 성교 도중에 급하게 심장이 정지하면 음경이 커진 상태일 수도 있으나, 심장 발작이 일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약간의 지체가 있어도 그사이 음경이 오그라들 수 있다. 따라서 음경의 상태는 사망원인을 판정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10.상해를 입어 죽은 경우
신 만약 이로 물어 상해하였다면, 이 안에는 독이 있어 그 독이 창구에 들어가 사망하는 자가 많으니 살아나는 경우가 적다. 이에 물려 파상된 상처 부위에는 창구가 한 줄로 둘러져 있는데, 뼈가 부러지면 반드시 농수가 축축하게 고이고 피육이 상하여 문드러지므로, 이 때문에 치료하여도 낫지 않아 죽게 된다.
-이로 물어도 이에는 독이 없으므로, 독에 의하여 사망하지는 않는다. 혹시 이에 물린 상처(교흔, 咬痕)로 2차감염이 되더라도 그 때문에 사망하기까지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현대에서 깨문 자국은 주로 성폭행과 관련된 상처이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