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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콘텐츠는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의 재원으로 운영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성과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증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나와의 채팅방’이 이름 그대로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언제쯤 깨달았는지 나는 모른다. 모두 자기가 한 메모를 보며 ‘이걸 내가 썼다고?’ 하는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 알았다. 매사에 정신줄을 반쯤 놓고 사는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래의 메시지를 보고도 나는 별 생각 하지 않았다.
{이게 뭐여}
그 메시지는, 그날 오전에 편의점 창고를 채우다가 떠오른 영감을 급하게 메모한 것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남긴 메모는, [편의점에서 벌어지는 일: 창고에 갇히면 며칠 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 생존하지 못한다면 편의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상황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런 메모를 남겼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호프집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그것들을 보고 생각했다. 이게 뭐여. 아이디어치고는 다소 민망한 것이어서 못 본 척 버스에 올랐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만원인 버스에서 손잡이를 거의 뽑을 기세로 매달린 채,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상태도 아닌 슈뢰딩거적 상태로 버티던 나는 고양이가 뛰어들 듯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번쩍 눈을 떴다.
저건 절대로 내가 쓴 게 아니야!
이건 단순히 헷갈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했다. 나는 얼른 나와의 채팅방을 확인했다. {이게 뭐여} 옆에 찍힌 시간은 내가 한창 맥주통을 옮기던 22시 18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매뉴얼에 쓰여 있는 스케줄만큼은 틀릴 수 없었고, 그건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따라서 이 메시지는 내가 쓴 것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로그를 뒤져볼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잇달아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어? 잘못 본 거야. 아니면 버그거나. 그래, 그 편이 가장 가능성 높았다. 전국민이 쓰는 거나 마찬가지인 메신저라고 버그가 없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버그가 드러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문제가 있는 건 나일지도 모르지. 편의점 메모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이게 뭐냐’고 물었을 수도 있다. 그러고는 그 자체를 또 잊어버린 거다. 그러면 설명이 되지 싶었다. 실수로 정거장을 잘못 내려 집까지 걸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란 놈이 그럼 그렇지.
날이 바뀌어서야 집에 도착한 나는 대충 씻고 안전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나와의 채팅방에 들어가 편의점 메모를 다시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뭐긴 뭐여 메모 아녀]라고 쓰고는, 메모를 토대로 새로운 장면을 쓰기 시작했다. 좀 황당무계하지만 재밌었고 무엇보다 이거다 싶었다.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느끼는 기분에 도취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그래서였다. ‘나’로부터 온 또 하나의 메시지를 한참이나 뒤에 확인한 건.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나와의 채팅방’이 이름 그대로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잠을 못 자 식물 상태로 편의점 카운터에 자리잡은 나는 여전히 소설 쓰기에 한창이었다. 엔딩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보통 막혔을 땐 처음으로 돌아가는 편이었고, 그래서 아이디어 메모를 다시 확인해 본 나는 귀신이라도 목격한 듯 온몸의 털이 삐쭉 솟는 것 같아 두 눈을 부릅뜨고 나와의 채팅방을 노려봤다.
{이거 뭐여 미친 거여}
미친 걸까? 아니면 꿈? 그러고 보니 내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가 좀 아리송했다. 또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원룸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그랬다간 낭패였다. 어떻게 구한 편의점 알반데. 나에게는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꼭 따져보는 조건이 있었다.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가. 소설을 쓰는 데 다양한 인간군상을 아는 것은 중요하고, 그런 측면에서 편의점은 매우 좋은 일자리였다. 그런데 자칫 짤릴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우선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부터 확인하기 위해 점장님한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말했다.
“점장님, 저 그만두고 싶어요.”
“그러든가.”
미처 예상치 못한 전개였고, 고로 꿈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나는 꿈이기를 바라며 다시 말했다.
“소설 쓰는 거 말이었어요.”
“아냐, 관두는 김에 다 관둬. 이참에 아예 인생도 관두지그래?”
“그렇게 심한 말씀을…….”
“너야말로 심한 거 아니냐? 창고 정리를 그 따위로 하면 어떡해! 뒤엣사람 죽으라는 거야 뭐야! 너 때문에 관두는 알바가 한둘인 줄 알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그놈의 소설인지 뭔지 쓴다고 넋 놓고 다니지 말고, 응?”
나는 무릎을 꿇을 기세로 백배사죄했다. 사실 사과하는 일은 나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행히 사과를 반복하면서 쌓인 노하우가 나와 내 일자리를 살렸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통화를 마친 뒤 나는 나와의 채팅방에 썼다. [미친 것은 아녀 꿈도 아녀 대체 뭐여]
와, 라임 오졌다. 나는 미소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아주 제대로 돌았네}
나는 조금 기분이 상해서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할 소리지] {해킹이냐} [내가 할 소리라니까] {너 뭐야} [너는 뭔데]
그런 식으로 정보값이 0에 수렴하는 대화가 한참을 오갔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그 같은데 이만 신고하고 각자도생 합시다] {버그는 아니야}
[그걸 그쪽이 어떻게 장담해?] {그게 내 일이니까} [오 그쪽도 해커?] {너도?}
나는 아차 싶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가랑비처럼 뇌를 적셨다.
[지금은 아니고…] {아무튼, 버그는 아니야} 
[그럼 뭐지? 재밌네. 소설로 써야지 ㅋㅋ] {너도 소설 써?}
너도? 이건 무슨 조화일까. 나는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너 뭐냐니깐?}
결국 정보값 없는 대화가 또 이어졌고, 몇 가지 허튼 증명을 통해 나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필요한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와 ‘나’가 ‘나와의 채팅방’을 통해 얽힌 ‘우리’라는 가설.
‘우리’가 얽힌 시점은, 시간적으로는 약 2년 전 겨울이었고, 공간적으로는 어느 대학의 연구소였다. 당시 썼던 계약서에 따르면 그때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나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권한이 없는데, 다만 그곳이 세계 최초는 아니지만 국내 최초로 100 큐비트 양자컴퓨터 개발에 성공한 곳이라는 정도는 말해도 될 것이다. 물론 기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가 된 그곳이었다.
그곳에 나와 내가 합류한 해커팀 ‘그건네사정이고’는 개발에 성공한 100 큐비트 양자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섭외된 일종의 들러리였다. 당시 우리 ‘그건네사정이고’는 버그 바운티 대회를 휩쓸며 제법 유명세를 구가했는데, 특히 팀의 리더 지수는 트위터에서 대단한 인기 몰이를 했다. 나는 팀에서 청일점이자 대외적인 골든리트리버로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해커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었고, 사실은 그냥 어렸을 때 인연으로 이어진,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내 역할 중 하나는 팀의 공식 계정을 관리하는 거였는데, 어느 날 스팸이 아닌가 싶은 메일을 받게 되었다. 무슨무슨 연구소의 장 대리라는 사람한테서 온 메일에는 다짜고짜 우리 팀이 이런저런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나는 적당히 요약해서 단체방에 전달했다. 우리 팀에서 빌런을 맡고 있는 슬기가 아니나 다를까 빌런답게 말했다. ‘짤라. 우리가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아. 차라리 아이돌 불러서 퀀텀 콘서트를 하지?’
나는 대꾸했다. ‘그건 무슨 괴 콘서트지? 하지만 보수가 어마어마한데. 바운티 평균 액수의 두 배야.’
‘이 자식 눈 돌았네.’
‘나 곧 있으면 전세 계약 만료라 돈 필요해.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슬기의 필터링조차 할 수 없는 육두문자가 쏟아졌지만 이미 면역이 되어있어 견딜 만했다. 나는 못 본 척 말했다.
‘우리더러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해킹을 해달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혹시 이 사람들 해킹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닐까 싶어서 참고하라고 링크 몇 개 보내줬어. 그건 그렇고, 큐비트가 100개래. 이 정도면 RSA도 몇 시간 만에 뚫어버리는 거 아니야?’
굉장히 큰 자연수를 소인수 분해하는 일은 슈퍼컴퓨터로도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RSA 알고리즘은 우리가 인터넷에 매일같이 흑역사를 남길 권한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는 그것을 깔끔하게 뭉개버릴 수 있다. 그래서 정부나 기업 등 일부 사설 통신망에는 양자암호키 분배나 양자내성암호 등의 기술이 적용되어 있는데, 좀 치사한 일이었다.
‘그런 걸 상대로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그러자 지수가 늘 그렇듯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점 중 하나였다. ‘홍보.’

장 대리의 안내로 처음 본 양자컴퓨터는 사실 RGB LED 조명으로 장식된 일반 컴퓨터에 비해 별거 없는 외관이었다. 꼭 스테인레스 드럼통을 천장에 매달아놓은 모양새였다. 저게 RSA 알고리즘을 단 몇 시간 만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장 대리가 말했다.
“별거 없어요. 아직은 독자적인 운영체제도 없어서 결국은 일반 컴퓨터 연결해서 써야 하고요.”
“잘됐네요. 아시다시피 그건 저희 전문이니까요.”
우리는 시연 준비를 했다. 엄밀히 말해 우리 팀이 그랬고, 나는 그저 양쪽으로 앵무새처럼 말을 옮길 뿐이었다. 원래 나는 팀에서 깍두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더불어서, 해킹 일을 관두는 것을 고민하기도 했는데, 이 일은 ADHD에 어쩌면 아스퍼거 증후군일지도 모를 나에게 있어 편안한 일이었지만, 딱히 재미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연회는 시간 관계상 미리 작업해놓은 작업의 결과를 공개하는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얘기를 들은 기자들 반응이 안 좋았다며 장 대리가 우려했다. 아마도 퀀텀스러운 뭔가를 기대했던 모양이라는 말에 나는 즉흥적으로 제안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뭘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RSA 키 500비트 정도면 꽤나 퀀텀스럽게 풀 수 있을 텐데요.’
‘그거 숫자로 하는 거죠?’
‘뭐, 기본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꼭 숫자일 필요는 없어요. 예를 들어 500비트짜리 문장을 아스키 변환해서 사용해도 되고요.’
‘결국은 같은 그림이잖아요.’
나는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지수의 오랜 조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혹시 스마트폰 잠금을 풀면 어떨까요. 그럼 그림이 좀 살 것 같은데.’
패턴 인식의 경우의 수를 비트화해보고는 그러자고 했다. 그러고는 패턴을 이진수로 대응시켜 프로그램을 짰다. 테스트를 해볼 수는 없었는데, 내 노트북으로는 내가 죽을 때까지 풀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자컴퓨터를 이용하면 순식간에 풀릴 터였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페르마의 원리 같은 최단거리 찾기 작업이 가능한데, 모든 경로를 동시에 시뮬레이션해 그중 가장 빨리 도착하는 경로를 찾는 것이다. 언젠가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면 자동차 길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길도 좀 찾아주면 좋지 않을까. 뭔가 괜찮은 생각 같아서 나는 시연회 전날 밤을 새워 소설을 썼다.
붉게 충혈된 눈을 한 채 연구소로 향했다. 은색 드럼통처럼 생긴 양자컴퓨터를 주인공 삼아 우리와 연구소 관계자, 그리고 기자들이 빙 둘러 자리를 잡았다. 지수가 아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세팅을 점검했다. 잭을 꽂는데 아무리 해도 안 돼서 확인해보니 잘못 꽂고 있었다. 옆에서 슬기가 쏘아붙였다.
“똑바로 안 하냐.”
“미안.”
세팅을 마친 나는 방청객처럼 행사를 관람했다. 장 대리의 설명을 시작으로,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난 정부 관계자가 축사 같은 것을 하고는 다시 뿅 하고 사라진 다음, 마침내 지수가 등판했다. 내가 맡은 역할 중에는 팀 SNS 계정에 주로 지수의 사진을 올리는 것도 있었다. 열심히 지수를 찍고 있는데 옆에서 슬기가 말했다.
“준비 확실하게 했지?”
나는 응, 답하며 연속 촬영에 집중했다.
지수가 몇 가지 결과를 소개하며 양자컴퓨터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세 지루해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지수와 바톤 터치를 하고 사람들 앞에 섰다. 약을 조금 더 먹을 걸 그랬나 싶었다. 나는 땅만 보며 내 스마트폰을 컴퓨터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모니터를 응시한 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야기했다. 미리 준비한 대사가 그럴듯했는지 실내의 공기가 달라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나는 눈만 겨우 뜨고 준비했던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잠금을 해제하는 데 실패했고, 나는 팀에서 방출되었다.

또 다른 나와의 채팅을 통해 비로소 그때 내가 왜 잠금을 풀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내가 말했다.
{그때, 나는 잠금장치를 풀었어.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지. 어, 그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 난다. 약 먹고 올게.}
[너도 먹는구나]
나는 또 다른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또 다른 내가 말한 대로,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어서 나도 약을 먹기 위해 이불 밖으로 나오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다.


그때 내가 양자컴퓨터를 가지고도 일반 스마트폰의 패턴을 풀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나는 성공했기 때문이고, 그 또 다른 나와 여기 있는 내가 양자적으로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양자 얽힘이라니. 그것은 양자 통신과 같은 보안 이슈로서 접해본 게 전부였다. 양자역학의 무수히 많은 불가해한 성질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을 활용하면, 이론적으로는 정보를 빛보다 빨리 전송할 수 있다.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는 증명으로 세상을 바꾼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거리 작용’이라며 대경실색할 만했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 넘어져도 양자 도약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가 말도 안 된다며 쓴 논문으로부터 양자 순간이동 같은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의 현실적인 표현이 다름 아닌 양자 통신이다. 얽혀있는 전자 쌍을 쪼개어 멀리 떨어뜨린 다음, 한쪽 전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나머지 전자의 상태가 결정되는 성질을 활용하는 식이다. 전자의 상태 중에서도 스핀처럼 경우의 수가 두 가지인 것을 이용하면 이진법으로 통신이 가능하다.
특히 양자 얽힘 상태의 두 입자는 결코 같은 상태가 될 수 없다는 성질이 나와 또 다른 나에게는 중요하다. 이쪽이 0이면, 저쪽은 1이다. 이쪽이 1이면, 저쪽은 0이다. 따라서 나와 얽힌 또 다른 내가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면, 나는 풀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법칙이니까.
하지만 왜 하필이면 스마트폰을 풀지 못한 게 또 다른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나일까. 문득 양자역학 하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머릿속에서 가르릉댔다. 나는 머릿속에서 중첩된 고양이를 밀어내고 다시 안전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또 다른 내가 보낸 메시지가 와있었다.
{결론은 그때 스마트폰을 푸는 순간 내가 우리가 된 거야}
[그리고 문제의 스마트폰에 의해 우리가 얽혔다?]
{그렇지. 역시 나라 말이 통하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넌 어떻게 됐지?}
[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왔지. 그리고 공모전에 당선됐어.]
연구소로부터 날아올 뻔한 내용증명을 막기 위해 내가 했던 일을 그대로 옮기기엔 너무 구차했고 쪽팔렸으며 무엇보다 귀찮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연구소 측의 용서를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팀에서 나왔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지수의 말이 고마웠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는데, 나는 비로소 내가 쓴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리듯 공모전에 던질 수 있었다. 그동안 두려운 마음에 일정만 확인하고 한 번도 내보지 않았었는데, 단번에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뭐지 싶었다. 이듬해 출간도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책은 팔리지 않았고, 이후에 쓴 소설은 발표할 지면이 없었다. 결국 상금을 까먹으며 또 다른 공모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스마트폰 잠금을 푸는 데 성공한 또 다른 나는, 역시나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나처럼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소설 쓰는 일을 접었다고 했다. 연구소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그건네사정이고’의 인지도는 그야말로 도약에 도약을 거듭했다. 덩달아 또 다른 나에게도 상당한 관심이 쏟아졌다고.
[힘들었겠네] 나라면 그랬을 테니 한 말이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좋았어. 어쩌면 그때 스마트폰 상태만 갈라진 건 아닐지도 몰라. 그날 이후로 새 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할까.}
[하지만 너도 약 먹잖아]
{약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지. 양극성 장애가 울증과 조증을 함께 보이잖아. 말하자면 나는 조증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 거지. 아마 너는 그 반대겠지?}
정확했다. 나는 그날 이후 팀에서 나오고 지수를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진 거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걸 양자 얽힘과 다세계 해석에 근거해 평행 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퍽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나?
{그러네} [그래도 너는 좋겠네. 지수랑 함께일 거 아냐.] {왜 당연하게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지수와는 안 되는 건가. 나는 또다시 몹시도 우울해졌다. 물론 특기할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또 다른 ‘나’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별건 없어. 고백했다가 까였지, 뭐}
참으로 허망한 대안적 사실에 나는 스마트폰을 꺼버렸다.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이 기함할 상황에 처했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퀀텀스럽게 바뀌지는 않았다. 양자역학의 성질을 활용한 사기적인 행동을 궁리해보기는 했는데, 어렸을 때 본 만화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생성해 위험한 상황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네가 분신이지?}
결국 우리는 가끔 아무한테도 할 수 없는 말을 털어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와의 채팅방은 어느새 우리만의 대나무 숲이 되었고, 우리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됐다. 따져보면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실 생산적인 이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나’이면서 ‘나’가 아니라는 점을 활용해 서로가 서로에게 제3자의 눈이 되어주었다. 다시 말해 전담 리뷰어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나의 코드를 봐주었고, 반대로 또 다른 나는 내 소설을 봐주는 식이었다. ‘그건네사정이고’에서 탈퇴한 뒤로는 코드는 물론 그 비슷한 형태의 글을 일부러라도 피해왔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코드는 어렸을 때 책장이 해지도록 읽은 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느낌을 줬다. 아는 것에 대한 편안함과 함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움을 찾는 설렘이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내가 이렇게 코딩을 좋아했던가? 그 정도는 아니어서 결국 팀에서 탈퇴한 게 아니었던가?
[이거 트랜잭션 격리 수준 너무 강박적인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냐}
[그러라고 보여준 거잖아. 이 정도로는 동접 100명만 돼도 터질걸.]
{아니면 내 속이 불안증으로 터지던가. 아무튼 무슨 말인진 알았어. 네 소설 재미없어.}
[그게 뭐여]
우리는 잠시 자웅을 겨뤘다. 결국 또 다른 내가 내 소설의 어디가 어떻게 문젠지 열거했는데, 비판에서 피할 수 없는 창피함은 둘째치고, 하나같이 내가 글을 쓰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본 것이어서, 그런데 게으른 마음에 모른 척했던 지점이 여지없이 융단 폭격을 당하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나의 한계를 맞닥뜨린 것 같았다. 털썩 주저앉은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무언의 합의라도 한 듯 조용히 각자의 문제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다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소설을 공모전에 던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이불을 더 칭칭 몸에 감았다. 그러고 있으려니까 또 다른 나는 코드를 잘 수정했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귀찮게 괜찮냐고 물어볼 만큼 각별한 사이는 아니어서, 나는 그냥 지수의 SNS에 들어가봤다.
지수의 인스타그램에는 나 아닌 누군가가 찍은 사진들이 기계적으로 업데이트 돼있었다. 하드코딩을 하는지 살기 어린 표정으로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지수, 좋아요. 시연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뭔가를 말하는 지수, 좋아요. 부족한 잠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조는 것으로 대신하는 지수, 좋아요. 아니, 좋지 않아서 취소.
트위터에서 지수는 각종 IT 정보를 공유하며 때때로 정치적인 발언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런 지수의 모습에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수의 말은 수만 명이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리트윗과 마음을 찍고 있는데, 디엠이 왔다.
지수였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을 잡아 뜯으며 트위터 메시지함 위에 뜬 숫자 1을 보았다. 숫자는 2가 되었다.
‘뭐 해?’, 그리고 ‘야’.
나는 답변을 썼다. ‘뭐’
‘뭐 하냐고’
‘네 트윗 리트윗’
‘내 SNS 보기 전엔 뭐 했는데’
‘공모전에 소설 응모했어’
‘또?, 나도 아직도 상금 사냥하지, 또’
이걸로 끝이구나 싶어서 나는 안도와 아쉬움을 함께 안고서 트위터를 껐다. 그런데 또 알림이 울렸다.
‘오랜만에 밥이나 먹을까?’
‘ㅇㅇ’
그리고 나는 후회했다.

나는 식당의 저 끝에서 지수를 발견하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 쪽을 돌아보는 동시에 도망칠까 생각했다. 슬기가 날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는 지수를 향해 거의 소리를 질렀다. “쟤가 여기 왜 있어?”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불렀어.” 그러고는 덥석 내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정말 개처럼 끌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행은 슬기와 기존 멤버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경험상 둘 중 하나였다. 대회에서 우승했거나, 팀에서 사고 친 누군가가 탈퇴를 하거나. 지수가 내 어깨를 짚은 채 말했다.
“초면인 사람도 있겠지. 이쪽은 남주영. 작년까지 우리 팀이었어.”
슬기가 말을 가로챘다. “너네도 알지? 양자컴퓨터 시연회 망치고 잠수 탄. 뻔뻔도 하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뭐, 원래 좀 뻔뻔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
“나는 시연회를 망칠 수밖에 없었어.”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슬기는 당연히 화를 냈는데,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밥 좀 먹자.”
지수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하는 동안 나와 슬기는 눈으로 맞짱을 떴는데 그건 좀 할 만한 것이어서 나는 모처럼 투지를 불태웠다. 반면 가슴속에 용광로를 품고 사는 것 같은 슬기는 곧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지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화장실.”
두당 5만 원짜리 코스 요리가 그 서막을 열었다. 전채 요리인 수프를 다 먹을 때쯤 돌아온 슬기가 자리에 앉자 분위기는 다시 냉랭해졌고 나는 가슴께가 뭉치는 것을 느꼈다. 더 있다간 단단히 체할 것 같았다. 비싼 밥 먹고 체하는 것보다 허무한 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불러줘서 고마워. 안녕. 아, 혹시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축하하고, 혹시 또 누군가가 사고 치고 나가는 거라면… 그건 딱히 할 말이 없고.”
슬기가 버럭 말했다. “지금 해보자는 거야?”
나는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지수를 봤는데 그건 그냥 습관이었다. 지수는 키가 1미터도 안 될 때부터 나를 자기 인형처럼 데리고 다니며 내가 아리송해 하는 모든 것에 답을 주었다. 그중 일부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정확한 답이 아닌 것도 있었지만, 최소한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답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답을 원했기에 지수를 쳐다봤던 것이다. 그러나 지수는 약간 피곤한 듯한 얼굴을 떨군 채 조용히 수프를 긁어 먹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헤집어지는 기분으로 식당을 나섰다.
길을 걸으며 상황을 복기했다. 상황 파악이 느려 안 좋게 끝나버린 일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상황을 무식하게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같은 상황이 닥치면 다른 행동을 취한다. 물론 그 또한 적절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러면 또 다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
걸리는 게 있어서 나는 횡단보도 중간에서 멈춰 섰다. 슬기한테 내가 왜 그날 스마트폰을 풀지 못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편히 못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뀐 것도 개의치 않고 다시 돌아서서 달렸다. 때맞춰 달려오던 오토바이를 피하느라 크게 넘어졌지만 아랑곳 않고 거리를 달렸다.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간 나를 사람들이 쳐다봤는데, 하나같이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날, 나는 스마트폰을 풀지 못할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그때 다른 세계의 나는 스마트폰을 푸는 데 성공했고, 그 또 다른 나랑 여기 있는 내가 모종의 이유로 양자 얽힘 상태였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이 말 하려고 돌아왔어. 이제 진짜 갈게. 안녕.”
그리고 돌아서서 나가던 나는 그대로 고꾸라져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땐 체크 패턴 커튼으로 둘러싸인 응급실 병상 위였다. 가만히 천장 타일 속 무늬에 집중하고 있는데 잘 아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남주영.”
지수가 옆에 있었다. 나는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통증이 몸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내가 혼란스러워 하면 늘 그렇듯 지수가 설명해주었다. “찰과상이래. 근육들이 놀라서 당분간 쑤시듯이 아플 거래. 너 또 앞뒤 안 재고 달리다 넘어졌지? 그러다 차라도 치이면 죽어.”
“오토바이였어. 잘 피했고.”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말을 쏟아냈다. “너도 양자 얽힘에 대해서 알잖아. 얽힌 상태의 두 입자는 절대 동일한 상태를 가질 수 없어. 안 그러면 양자컴퓨팅, 양자 통신 아무것도 성립이 안 되니까. 그렇잖아.”
“그래.”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보면 그 순간 나는 절대로 스마트폰을 풀 수가 없었던 거야. 왜냐하면 또 다른 나는 스마트폰을 풀었으니까! 하필이면 스마트폰을 푼 쪽이 내가 아니라 또 다른 나라는 건 아쉽긴 하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확률이라는 것의 특징인데. 그래서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만, 너희가 그 점을 고려해줬으면 좋겠어. 전적으로 내가 그 일을 망친 건 아니라고…….”
“남주영.” 지수가 내 손을 턱 잡았다.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 없어. 슬기 걔 그러는 거 어디 하루이틀이야? 걘 새똥을 맞아도 중력을 욕하는 애야. 너도 이제는 알 만큼 알잖아.”
나는 손을 뺐다. “내가 똥을 싸기는 쌌다는 거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한 말을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맞지? 그런 거지?”
“또 그런다. 아니야, 그런 거.”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내 물건을 챙겼다. 지수가 날 잡았다. 그 손을 뿌리치는 것은 나한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냈다. 나는 지수의 눈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물론 네 생각이 어떻든 그건 네 자유야. 나는 다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사실이라고?”
나는 지수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그 애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수의 서글퍼 보이는 눈을 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지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수의 저런 눈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내 몸이 멋대로 움직여 스마트폰을 꺼내 나와의 채팅방을 열어 지수에게 보였고, 내 입이 멋대로 움직여 말했다. “여기, 또 다른 나랑 대화한 기록이야.”
지수가 꼼꼼하게 스마트폰 화면을 살폈다. 나는 지수의 눈이 커지는 것을, 그리고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올 감탄사, 또는 나를 향한 인정 같은 것을 기대하며 1초 1초를 기다렸다. 마침내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뗀 지수가 나를 보더니 한 말은 내가 생각한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다시 말해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요새도 밤에 잘 못 자? 글 계속 쓰는 거야?”
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수가 또 다른 나의 메시지를 보지 못한 거였다. 하지만 나와의 채팅방 특성상 객체 구분이 어려운 것은 별수 없었다. 나조차도 가끔은 이게 내가 쓴 말인지, 또 다른 내가 쓴 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나의 메시지를 구분해주기 위해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또 다른 내가 쓴 메시지가 사라져있었다.

서른여섯 번째로 또 다른 나를 불렀지만, 스마트폰은 조용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뜯으며 서성이다가 떠오른 것이 있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태 풀지 않고 처박아뒀던 이삿짐 상자에 그게 있었다. 시연회를 망치고 팀에서 탈퇴한 이후 쳐다도 안 본 물건. 내가 팀에서 활동하면서 사용한 시스템을 고스란히 복제한 이미지 디스크. 그것을 노트북에 연결한 다음 가상화 프로그램을 통해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동안 해는 모습을 감추었다.
작업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연결해 로그를 분석했다. 거기에 있었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메시지를 보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기쁨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왜 얽힘이 풀렸는지 알아내야했다.
로그만으로 자세한 걸 알 수는 없었지만, 또 다른 나는 내가 응급실에 뻗어있는 동안에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지수한테 채팅방을 보였을 땐 얽힘이 풀려있었다. 왜지?
내가 깨어나서 했던 일: 지수한테 채팅방을 보여준 일… 보이다… 보다… 관찰. 관측?
혹시 타인이 채팅방을 보는 행위가 양자 얽힘을 풀었던 걸까? 상자 속 고양이를 관찰함으로써 생사를 결정짓듯이?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허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상하지만 뜻이 잘 맞는 친구를 잃은 것 같아 마음이 몹시도 헛헛했다. 이대로 영영 끝인 건가? 다시 볼 수는 없는 건가? 다시 얽힐 수는…….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양자컴퓨팅 클라우드 서비스를 검색해 그 자리에서 내 남은 생활비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시연회 때 했던 그대로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했다.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성공해서 나는 또 허무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나와의 채팅방에 대고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여]
입술을 뜯고 뜯고 또 뜯었다. 피 맛이 났다. 비위가 상해 헛구역질을 하는데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긴 뭐여 뻘짓이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반가운 마음에 타자를 치는데 또 메시지가 떴다.
<;와, 라임 오졌다>;
{????}
《!!!! 2^2》
내가 넷이 되어버렸다.
알림이 울려 움찔했다. 메일이었다. 확인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공모전에 당선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달 안으로 아래의 계좌로 소정의 심사비를 입금하시면 바로 협회의 정회원으로 등록을 해드릴 테니…….’  

 

 

2022년 7월 과학동아 정보

  • 김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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