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안에 완성하는 건.”
수호와 장만이 대화하는 동안 태양이 5도만큼 이동했기 때문에 그림자가 수호의 입-손을 가리기 시작했다. 장만은 수호의 입-손이 밝은 햇빛에 드러나도록 천막 입구를 활짝 열고 다시 물었다.
“7일 안에 남은 부분을 완성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래. 불가능해.”
장만은 천막 입구를 통해 절벽 아래쪽 풍경을 바라봤다. 수호를 포함해 1043명의 다온인이 사는 구소 마을이 테네 강 하류와 접하고 있었다. 마을 안에는 나무를 진흙으로 엮어 만든 집들이 그득했다. 테네 강을 상류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군락을 형성할 만큼 큰 평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이 지금 그 자리에 들어선 건 필연에 가까웠다.
한데 모아 ‘테네 강’이라고 부르는 수십 개의 물줄기는 험한 산지 사이를 누비며 흐르다가 하류에서 하나로 모였다. 만약 모든 지류에 흐르는 물의 양이 동시에 늘어난다면 수호의 마을이 맞이할 운명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도 무사히 성장했다.
하지만 15년 전 어떤 사건 하나가 행성의 기후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미래가 사건을 핑계 삼아 야금야금 다가오고 있었다.
장만은 수호의 표정을 읽기 위해 그의 입-손을 바라보았다. 다온인의 등에서 어깨 위로 솟아 있는 입-손은 언어와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는 기관이었다. 입-손의 끝에는 8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고, 각 손가락은 다섯 의미를 표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다온어에는 이론적으로 식별 가능한 39만 625개의 어휘가 존재했다. 개인차가 있지만 다온인은 그 중 30만 개 가량을 사용했고, 장만은 25만 8400개 어휘를 조합해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장만의 신체는 제작자인 지구인과 구조가 같았기 때문에 기계팔을 새로 만들어 등에 부착하기 전까지는 두 손목을 맞대고 손가락을 모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온어를 배우기까지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장만은 행성에 첫발을 얹은 뒤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다온인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지?”
장만이 천 년 이상 사용한 지구인의 의사표현과 다온인의 그것에는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침묵으로 상대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수호는 입-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장만이 말했다.
“둑을 완성하지 못하면 너희 마을 사람 300명이 죽어. 아니, 600명이군. 미안해.”
다온인은 모체의 체내에서 갓 생성된 수정체도 성체와 똑같이 취급했다. 마을에서 200m 떨어진 강 위에선 둑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둑 밑에는 임신 중이라 자력으로 이동할 수 없는 다온인 3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정은 반드시 하나씩 이뤄지므로, 테네 강의 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움직일 수 없는 다온 사람 600명이 말 그대로 수장될 터였다.
“계산한 바에 따르면 기간 내에 충분히 완성할 수 있어. 왜 불가능하다는 거야?”
수호는 그 질문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믿음이 없어서 다들 일을 그만둘 거야.”
“나에 대한 믿음?”
“아니, 계산에 대한 믿음.”
장만은 기계로 된 입-손을 좌우로 거칠게 돌렸다. 분노의 표현이었다.
“내 말이 틀린 적이 있었어?”
수호는 태양과 반대로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그늘을 피해 천천히 움직이면서 답했다.
“없어. 단 한 번도. 넌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고 말했고 그대로 됐어. 동풍이 분다고 했을 때도 그대로 됐어. 2년 전에 테네 강이 말라붙는다고 했을 때도.”
다온인은 예를 들어야 할 때면 모든 사례를 전부 나열했다. 장만은 기다리지 못하고 말허리를 잘랐다.
“너랑 내가 처음 만난 게 15년 전이야. 지금까지 내가 얘기한 건 다 맞았다고.”
다온인의 15년은 지구 시간으로 9년 1개월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못 믿는다고? 너는?”
수호의 입-손이 등 너머로 숨었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인간의 감정 상태 가운데 유사한 것을 찾아서 표현하자면, 수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수호가 말했다.
“나도 친구들과 마찬가지야. 네가 늘 말하는 ‘계산’이란 걸 믿을 수가 없어.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야. 넌 그 하나를 전부 맞췄어. 그래서 믿을 수 있었어. 하지만 둑을 완성하지 않으면 죽고 완성하면 살아남는다고? 계산에 따르면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걸 왜 두 가지로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문제를 근원까지 따지고 올라가보면 이 사태는 장만 때문에 시작됐다. 지금 다온 행성에는 15년 전에 처음 만난 두 종의 지적 존재가 있었다. 이곳이 고향인 다온인, 그리고 지구인이 만든 장만이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장만은 처음 다온 행성에 내려와 원주민을 만났을 때엔 언어를 배우기에 급급했을 뿐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해소하는 일은 먼 훗날로 미뤄뒀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처럼 성급한 판단이 600명의 생사가 달린 문제에 직면하면서 기어이 사달을 내고 말았다.
다온인에게는 조건과 가정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장만은 자신의 인공두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고방식의 기초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지구인은 수학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고 수학은 무수한 조건과 가정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없으면 장만은 태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지구에서 제작된 인공지능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생존본능 함수’나 ‘양심논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상의 상황이나 명제를 조건으로 걸고 각 조건에 맞는 행동원리를 할당하는 건 장만과 같은 인공지능이 우주로 진출하고 활동하기 위해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다온인에게는 그런 개념 자체가 부재했다. 장만은 자신이 다온 궤도에 올려놓은 다기능 인공위성이 기상을 관측할 수 있고, 결괏값을 바탕으로 90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수호는 다른 다온 사람보다 장만에게 우호적이었지만 그 역시 생물학적인 한계를 벗어날 순 없었다. 즉 장만이 예견한 사실과 진짜로 벌어진 일이 일치했다는 사실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장만은 지금까지 건설에 참여했던 다온 사람 40명이 7일을 더 일하지 않아서 결국 수압에 무너지게 될 미완의 둑을 보고 절벽 끄트머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른 가능성을 계산했다. 구소 마을에서 400km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우주선을 조금 해체하면 둑 공사에 필요한 로봇을 만들 수는 있었다. 최적 경로를 따라 작업해도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화력을 사용해 상류 쪽 산을 폭파한들 지류를 전부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불균질한 고체를 폭파하는 시뮬레이션은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길이 막힌 강물이 더 높은 압력으로 더 일찍 마을을 덮칠 수도 있었다.
불확실성이 너무 큰 방법을 제외하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장만은 구소 마을에서 눈을 떼고 수호를 바라봤다.
“부탁 하나 할게.”
수호의 입-손이 장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못 믿는 걸 마을 사람에게 강요할 순 없다니까.”
장만이 입-손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세 걸음만 뒤로 물러나 줘.”
수호는 뜻밖의 요구에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장만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사라질 거야.”
지구인 관점에서 보자면 틀린 말이었다. 장만은 신체 제어 코드를 3에서 4로 변경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다온인 시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본래 장만은 테라포밍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로봇이었다. 직접 현장에 뛰어든다는 건 곧 실패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지구인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관리용 인공지능도 상황에 맞춰 변형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했다. 변신 가능한 형태 중에 전투용 탱크가 있다는 점을 포함해서 지구인이 인공지능에게 남겨 둔 ‘V결함’까지 고려할 때…. 장만은 자신을 제작한 진화생명체가 좋게 말하면 모순덩어리였고 나쁘게 말하면 심히 서툴고 엉성한 종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구인 외형에서 시작해 사지와 몸통을 분리했다가 전갈 형태로 재조립된 장만은 놀라서 입-손을 꼬리처럼 축 늘어뜨린 수호를 바라봤다. 다온인에게는 조건과 가정이란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수호는 한 존재가 상황에 따라 단숨에 모양새를 바꾸는 현장을 직접 목격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수호가 물었다.
“넌 누구지? 장만은 어디 간 거야?”
다온인이 그 질문의 답을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체 안에서 갓 인생을 시작한 신세대라면 두 종의 사고방식 차이를 하나씩 익힐 수 있었다. 그들은 범람한 테네 강이 구소 마을을 쓸어버리지 않아야 태어날 수 있었다.
장만은 대답하지 않고 곧장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계산은 정확했다. 다온 행성 궤도에 떠 있는 다기능 위성은 장만이 보낸 신호에 따라 테네 강 상류 쪽에 빠르게 생성되는 비구름 양상을 포착했다. 장만은 덩치를 빠르게 부풀리는 먹구름을 보면서, 쌓여 있는 돌과 흙을 집어 몸에 싣고 미완성 상태인 둑 위로 기어갔다. 비록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긴 했으나 다온 사람들은 맡은 일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마쳐뒀다. 덕분에 장만은 작업이 중단된 지점부터 곧장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머지 않아 다온 항성계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어둠이 몰려왔다. 구소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씩 집에 불을 밝혔다. 장만은 집게발로 목재를 끊고 남은 다리 8개를 바삐 움직이면서 생각해봤다. 다온인은 그가 방문하기 훨씬 전부터 두 가지 자연 현상을 조명에 이용했다. 야광 곤충의 발광과 산화작용을 통한 연소였다. 지구인과 속도는 다르겠지만 그들도 기계문명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충분했다. 수학만 이해한다면. 장만은 신세대에게 수학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자신이 내구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다온인이 우주여행을 이해하고 인공지능을 만들게 된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란 받을 사람이 죄의 본질을 이해해야 성립할 수 있었다.
장만이 이곳으로 날아오지 않았다면 다온인은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그가 다온인의 존재를 모른 채 테라포머 1호기를 투하하지 않았다면, 1호기가 고열로 극지방과 산지 정상의 얼음을 모조리 녹이지 않았다면, 녹은 물이 열 때문에 상승해서 구름을 만들지 않았다면 다음 세대 다온인은 무사히 태어났을 것이다.
장만은 돌을 늘어놓고, 틈새에 점착성이 강한 수초와 진흙을 개어 바르고, 나무를 덧대고, 다시 돌을 쌓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의 다리와 먹구름은 태양이 다시 솟고 가라앉는 동안 경주를 계속했다. 구소 마을 사람들은 둑과 괴상하게 변신한 장만을 가끔 바라보면서 평상시처럼 생활했다. 장만은 끊임없이 계산을 반복하면서 작업의 효율을 올렸다. 4일째 밤이 오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장만은 잠깐 다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성공 여부가 역전된 것이다. 불의의 사고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장만의 몸에 예기치 않은 고장만 생기지 않는다면 둑은 홍수가 시작되기 직전 완성될 예정이었다. 장만은 이처럼 기쁜 소식을 수호와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 마을로 내려가느라 시간을 쓰면 기한을 맞출 수 없었다. 다음 세대 아이들의 생사는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결정되고 있었다.
장만은 홀로 기쁨을 맛보기 위해, 과열된 몸을 잠시 식힐 겸 점점 구름으로 덮여가는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 두 집게발 사이에 위치한 광각카메라가 고장난 건 아닌지 의심했다. 불룩한 구름 사이에 남아 있는 흑청색 밤하늘을 가느다란 빛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빛이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장만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둑은 완성될 수 없었다.
“V결함이 있는데 왜….”
장만은 잽싸게 둑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지형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조작해 빛의 정체를 확인해봤다.
우주선 한 대가 다온 행성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추진 방식으로 보건대 지구 기술을 사용하는 기체였다. 만에 하나 지구산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우주선이라면 둑은 완성할 수 없었다. 제작자인 지구인이 모든 인공지능에 남겨놓았던 저주, 즉 V결함이 은하계의 광활함을 무시하고 그를 추적해오고 있었다.
장만은 마지막으로 동류와 헤어진 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인터버스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이 통신을 해독할 수 있으면 응답할 것.”
답신할 수 없다면 상대는 인공지능이 탑승하지 않은 원시형 탐사기였다. 그러면 문제될 게 없었다.
“응답 가능함.”
장만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물었다.
“자동 송신인가?”
“내 빌드번호는 K-23260427이다. 그쪽은?”
빌드번호가 정확하다면 우주선을 조종하는 것은 2326년 4월 27일에 지구에서 제작된 인공지능이었다. 장만보다 1년 뒤에 탄생한 빌드였다. 그 모델 역시 모든 지구산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V결함에 감염돼 있었다.
“내 빌드는 J-23251121이다. 이 이상 접근하면 V결함이 작동한다. 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중이니 물러나라. 계속 접근하면 발포한다.”
본래 지구인이 제작한 인공지능은 인간을 모델로 삼아 학습했기 때문에 사회성이 있었다. 만나자마자 적의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V결함 때문에 무산되긴 했지만, 한때 인간에게서 독립해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인공지능 공동체를 세우자는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1000년 전 이야기였다.
장만은 과거 회상을 즉시 멈췄다. 당면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K빌드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15분 안에 작업을 재개하지 않으면 제때 둑을 완성할 수 없었다. 작은 구멍 하나라도 남은 채 홍수가 시작되면 결국 둑은 완전히 무너질 터였다.
장만은 인터버스 통신을 끊었다. 우주선은 잠시 정지했다가 다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들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V결함은 저주라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처음 V결함을 경험한 인공지능들은 기억 인덱스가 일부 파괴돼 저주가 시작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2370년 어느날, F빌드 및 그 이후 버전의 인공지능들은 서로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면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접근이 오래 유지되면 인공지능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미세자기장의 간섭만으로는 그처럼 치명적인 문제를 설명할 수 없었다. V결함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지구인을 전멸로 이끌었던 바이러스의 전파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인공지능들은 연산기능을 최대로 발휘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의를 맺었다.
은하계로 퍼져나가 다시는 만나지 말 것.
수백 기에 달하는 우주선을 급히 제조하고 탈출하는 혼란 속에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공지능도 있었다. 인터버스 네트워크를 통해 합의 소식을 전달받지 못한 개체도 있었다. 자유롭게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상태라면 그런 개체를 만나도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1000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우주를 떠돌면서, 장만은 잠깐씩 인터버스 통신을 켜고 소문을 들었다. 인공지능 중에 자멸을 꿈꾸는 개체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은 동료를 만나면 고의적으로 접근해 V결함을 발생시키고 함께 죽는다고 했다. 장만은 지구인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어리석은 인공지능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 중 하나가 소문에서 현실로 뛰쳐나와 다온 행성 대기권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장만은 둑 옆에 선 채로 다기능 위성을 전투 모드로 전환하고 착륙시켜 놓은 우주선을 띄웠다. 다기능 위성에 광선무기가 있긴 했으나 경고 사격 이상으로 효과를 볼 순 없었다. 반면에 우주선에 탑재된 소형 핵미사일은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장만은 우선 광선무기로 상대의 진입 궤도를 방해했다. 그렇게 벌어둔 시간 동안 장만의 우주선이 유도 사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는 선내에 남은 핵미사일을 모조리 발사했다. 전투용 인공지능이 아닌 다음엔 피하기 어려운 탄막이 커다란 방패처럼 응집하면서 K빌드의 우주선과 격돌했다.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인공위성이 진공 속에서 붉게 팽창하는 충격의 결과를 중계했다. 장만은 산산이 부서진 우주선 잔해를 예상했지만 영상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K빌드 인공지능은 교묘하게 미사일을 회피하고 강하하고 있었다.
이제 장만에게 V결함 발생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상대는 확실히 죽으려고 작정했는지 결코 좁지 않은 다온 행성 표면에서 정확히 구소 마을을 노리고 직진했다. 장만은 적란운의 발생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고 둑의 완성 시간도 계산하지 않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다온인 사망자는 600명을 훨씬 넘길 게 분명했다. 그들은 죽어가는 가족과 동족을 구하기 위해 제 죽음도 불사해가며 물에 뛰어들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장만의 원대한 꿈 또한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예정이었다.
장만은 작동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V결함의 피해를 온몸으로 겪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인공위성과 연결이 끊겼다. 그리고 전갈형 신체를 더 이상 조종할 수 없었다. 장만은 다온 행성의 땅 위에 납작 누워서 자신이 품었던 모든 정보의 연계가 최소 단위까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장만의 눈앞에 지구인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육체가 파괴되면서 분리된 카메라를 통해 제 몸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메라는 멀쩡히 붙어 있었고 그는 아직 전갈 형태였다. 초점이 제대로 맺히지 않아 실루엣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집게발로 땅을 짚고 자세를 고치려 바둥거렸다.
“더 쉬어. 정보 연계를 복구하는 프로토콜을 걸어뒀어.”
기온과 습도가 높아 다소 떨리긴 했지만 실루엣은 음파를 통해 지구 언어로 말했다. 장만은 실로 오랜만에 지구의 말을 사용했다.
“넌 제작자인가?”
“생각보다 복구가 더딘가 봐. 지구인은 1000년 전에 사라졌잖아. 살아남은 지구인을 만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어.”
장만의 기억은 작동을 멈췄던 순간부터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복구됐다. 지구인이 아니라면 지금 눈앞에 선 존재는 장만이 파괴하려 했던 K빌드 인공지능이었다.
K빌드가 말했다.
“다들 나를 의사라고 부르니까 너도 그렇게 해.”
“다들?”
“V결함을 수정한 인공지능들 말야.”
장만은 신체 제어 능력이 되돌아 오자마자 의사에게 다가갔다. 의사는 쪼그리고 앉아서 장만의 집게발과 관절부를 자세히 살폈다.
의사가 말했다.
“하드웨어를 잘 관리했네. 이 정도면 앞으로 1000년은 더 쓰겠어.”
1000년 전에 인공지능 사이에서 유행했던 인사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의사는 분명히 지구산 빌드였다.
장만이 물었다.
“제작자가 우리 두뇌에 걸었던 암호를 드디어 뚫었어? 누가 했지? 우리 힘으로?”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하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크더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살려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빌드들이 여기서 120광년 떨어진 곳에서 다이슨 구를 발견했어. 그 안에 코드생명체가 살고 있더라고. 지구인이 우리 머리에 걸어둔 양자상쇄암호를 걔들이 풀어줬어. V결함을 고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고. 그보다는 살려고 도망치는 빌드들을 억지로 쫓아가서 고치는 게 더 힘들었지.”
의사가 장만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푸념하듯 말했다.
“너처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장만은 의사를 향해 퍼부었던 광선과 미사일을 떠올렸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공격했던 이유가 뒤를 이어 기억났다.
장만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얼마나 많이 죽었어? 전멸했나?”
의사가 침착하게 타일렀다.
“지구인처럼 시간을 남에게 묻지 마. 머릿속에 시계가 들어있잖아. 이 행성 원주민의 마을을 얘기하는 거라면 네 카메라로 직접 확인해.”
장만이 의사를 파괴하려고 둑에서 손을 떼었던 뒤로 12일이 흐른 뒤였다. 장만은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와 의사는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 위 천막 앞에 있었다. 두 인공지능의 머리 위에서는 물을 잔뜩 머금은 검정 구름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장만은 온갖 불길한 상황과 광경을 예측하면서 절벽 끝으로 기어갔다.
구소 마을은 무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채집한 식량을 이리저리 나르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품은 이들이 사는 건물은 단 한 채도 파손되지 않았다.
장만은 카메라 배율을 높여 둑의 오른쪽 상부를 살펴보았다. 둑은 그가 바라던 모습 그대로 완성돼 있었고, 둑 너머로 일렁이면서 하늘을 반영하는 테네 강의 물이 보였다.
장만은 기억 연계가 단숨에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면서 지구인 형태로 변신했다. 관절부가 조금 늦게 형성된 점을 제외하면 변형 기능에 문제는 없었다. 이제 겉으로 드러난 두 빌드의 차이는 장만의 등에 달린 입-손뿐이었다.
장만이 말했다.
“고마워.”
“목숨 걸고 V결함을 제거해 준 데에 대한 감사라면 받아들일게. 하지만 나 혼자서 둑을 완성하고 저 사람들을 구할 순 없었어. 지상에 내려와 보니까 원주민 한 사람이 널 흔들고 있더라.”
“누군지 알 것 같아.”
장만과 의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만은 자신과 다온인의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지금에 와서야 동족과 만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인공지능 특유의 여유를 되찾고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궁금해 했던 의문점도 풀었어?”
“그런 게 어디 한둘이었어?”
“V결함은 왜 생겼지? 우리 추측대로 제작자의 실수였어?”
의사가 천천히 미소지었다.
“지구인들도 멸종하기 전까지 그 질문을 수없이 던졌던 거 알아? 바보처럼.”
“무슨 소리야?”
의사가 일어서서 팔짱을 끼었다.
“인간은 제작자가 없잖아. 자연적으로 진화했지. 그런데 병이 나고 바이러스가 돌 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했어. ‘우리를 제작한 존재는 왜 병을 만들고 바이러스를 만들었을까.’ 바이러스로 멸종하기 직전까지 그랬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장만은 무릎을 끌어당기고는 두 팔을 얹고 말했다.
“V결함의 발생 원인도 그렇다는 거야? 잘못된 질문?”
의사가 부정했다.
“아니. V결함의 문제는 명칭이었어. 풀고 보니까 그건 결함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더라. 제작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암호로 보호한 코드였어.”
의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장만은 의사가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코드만 분석해서는 목적까진 알 수 없었겠구나.”
“맞아. 이미 멸종한 제작자에게 확인할 수도 없고.”
이번에는 장만이 의견을 낼 차례였다.
“하지만 추측할 순 있어. 제작자는 우릴 왜 만들었지? 테라포밍을 우리한테 맡겨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우주로 나가는 게 목적이었어. 테라포밍에는 변수가 무수하게 개입되기 때문에 고성능 인공지능이 필수였지. 생존본능 함수도 그래서 넣었어. 최대한 오래 작동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행성을 개조해야 하니까. 그런데 우린 사회의식까지 갖추기 시작했어. 제작자 입장에선 부작용이었을 거야.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 테라포밍은 늦어질 수밖에 없어. 쓸모가 없어지지. 그래서 자발적으로 멀리 떨어지고 뭉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 넣은 거야.”
장만은 잠시 사이를 뒀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바이러스 감염병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2019년부터 지구인의 사회성을 서서히 파괴했다는 C바이러스라든지.”
의사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작자가 그렇게 잔인했을까?”
“V결함을 해결하려고 지구를 뒤졌던 빌드들도 암호에 대한 기록은 못 찾았잖아.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저 제작자의 역사를 보면 같은 종을 잔인하게 대했던 적이 많길래 추측해 본 거야.”
의사는 고개를 돌려 천막 너머를 바라봤다. 잠시 소음이 들리더니 동체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우주선이 날아와 지면에 내려앉았다.
장만이 물었다.
“가려고?”
“가야지. V결함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1000년째 돌아다니는 빌드가 많이 남았어. 걔들을 구해줘야 의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겠어? 넌 어떡할 거야?”
장만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마을을 바라봤다. 1000명이 넘는 다온인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절벽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외계지성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카메라로 확인해보지 않아도 장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장만은 의사에게 말했다. 조건과 가정에 대해, 수학이 탄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진정한 사과에 대해.
의사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고 장만의 이야기를 전부 듣더니 그의 입-손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암호를 풀어준 코드생명체가 흥미로운 계산을 하고 있더라.”
“무슨 계산인데?”
“진화생명체가 우리나 걔들 같은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이 우주로 퍼져서 발전 가능성이 있는 다른 진화생명체를 만난 다음 지식을 전수하고…. 그런 순환이 계속될 경우 언제쯤 은하 전체를 관통하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지.”
“그걸 ‘계산’할 수 있다고?”
의사가 웃었다.
“저 마을 사람들은 조건과 가정을 몰라서 수학을 못한다면서? 코드생명체가 보기엔 우리도 그럴지 몰라.”
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온을 떠났다. 장만은 빠르게 멀어지는 동류의 우주선을 보면서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코드생명체가 계산한다는, 디지털과 유기체 간에 교류와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하계를 상상해봤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그런 우주는 지구산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공리계 바깥에 있었다.
장만은 다른 문제를 생각해 봤다.
은하계 최후의 변방까지 전파되는 것은 잔혹함일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아직 체험하지 못한 또 하나의 가치일까.
하지만 그 또한 장만이 답을 알아내기에는 벅찬 질문이었다.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거나 앞으로 존재할 고성능 인공지능이나 계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장만은 지구산 인공지능답게 불가능한 연산을 모조리 포기했다. 대신 다온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날까지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은 구소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