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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수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흔히 서양의 중세를 문화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찬란한 학문적 성과와 문화적 전통이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에 잠자던 그리스문명을 이어와 서유럽의 번영을 가져오기까지 이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기 7세기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소화해냄으로써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고 다시 서유럽에 전해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중국과 조선의 수학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는 ‘산대’라는 계산용 수 표기 도구를 발명했는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산대를 이용한 계산법이 보편화됐다. 산대는 2천 년 가량 제 역할을 하다가 명나라때 상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주판이 이용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산대는 중국 전통 수학에서 계산을 비롯한 각종 수학 연구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서 놀라운 계산력을 보여주는 도구였다.


중국 수학의 기본이었던 산대가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됐다. 중국에서는 주판에 밀려 산대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조선 숙종 때 수학자 홍정하가 쓴 ‘구일집’이라는 수학책에도 산대가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그 존재가 잊혀졌지만 조선에서는 계속 산대를 사용하며 일어난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됐다.

“360명이 각각 은 1냥 8전을 낸다면, 합계는 얼마나 되겠소? 그리고 은 351냥이 있다고 합시다. 쌀 1가마니의 값이 1냥 5전이라면 몇 가마니를 구입할 수 있겠소?”

1713년 한양에서 몇 명의 중국 수학자와 조선의 수학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중국인 수학자 하국주는 간단한 방정식 문제로 조선의 수학자들을 시험했다. 대적하던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는 간단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첫 문제는 648냥이고 두 번째는 234가마니요.”

하국주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한 단계 어렵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했다.

“넓이가 225평방자인 땅이 있소, 각 변의 길이는 얼마겠소?”

홍정하는 금방 ‘15자’라고 답을 맞혔다. 그러자 중국 수학자 하국주는 새삼 홍정하를 칭찬하면서 자신에게도 문제를 한번 내보라고 권유했다. 하국주와 함께 온 다른 중국인은 그가 중국 수학의 4인방 중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에 홍정하는 조금 어려운 문제를 내보였다.

“지금 여기에 공 모양의 커다란 옥 구슬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으로 도장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안에 내접한 정육면체(도장)를 가정할 때, 도장을 뺀 무게가 265근 5량 5전이외다. 단, 입방체(도장)와 옥돌 사이의 두께는 4촌 5푼이라면 옥석의 지름과 내접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는 각각 얼마겠소?”

하국주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내일 이 문제를 풀어 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다”면서 물러섰다.

- ‘구일집’ 중에서

조선의 수학자와 청나라 수학자의 대결에서 홍정하가 내놓은 문제는 천원술(天元術) 중에서도 고차방정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천원술은 미지수가 하나인 대수방정식(미지수에 관한 대수식만으로 이뤄진 방정식)의 일종이다. 천원술이라는 단어에서 원(元)은 오늘날 방정식에서 사용되는 미지수를 가리킨다. 다만 천원술은 오늘날의 대수방정식과 달리 산대라는 계산도구를 사용해서 문제를 풀었다. 그래서 천원술을 ‘기구적 대수학’이라고 불린다.

흔히 문(文)을 숭상하던 조선시대에는 수학이 잡학으로 분류돼 발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홍정하의 ‘구일집’에 수록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조선 말기에는 고차방정식인 천원술이 수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보편화돼 있을 정도였다. 당시 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에 이미 산판(算板)과 산대를 활용해 제곱근은 물론 10차 방정식 해까지 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상수항을 진수(眞數), 1차항을 근(根), 2차항 평방(平方), 3차항 입방(立方), 4차항 삼승방(三乘方)이라고 해서, ‘3x⁴+5x-2’라는 4차 방정식을 ‘삼삼승방 다오근 소이진수(三三乘方多五根少二眞數)’라고 표현했다. ‘다(多)’는 더하기, ‘소(少)’는 빼기를 뜻한다. 중국이 명나라 청나라로 들어와 실용수학 중심으로 흐름이 바뀐 것과 달리 조선은 송·원시대의 전통 수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조선 이전의 수학사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역사와 전통은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수학

삼국시대의 수학은 모두 율령정치와 관련돼 있 다. 당시의 수학지식은 중국식 행정체제의 도입과 함께 들어왔으리라고 추정된다. 율령정치를 위해서는 토지의 측량, 조세 징수에 수학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학은 조선 전기까지 정치를 위한 필요성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백제는 중국식 율령제도를 수용했고 산학제도(算學制度)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 수학 과목을 그대로 수용한 게 아니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약간의 변화를 줬다. 수학책의 수를 제한하고 ‘육장(六章)’, ‘삼개(三開)’ 같은 수학책을 재편집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수학적 지식이 천문학과 관련돼 있다. 고대부터 천문현상 중에서 일식은 통치자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29회, 고구려 11회, 백제 26회의 일식현상이 기록돼 있다. 역법과 관련된 복잡한 수학계산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통일신라에 와서는 수학을 응용한 건축의 발전이 독보적이었다. 당시의 건축술은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해 전체적인 구성미를 창조했다.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등이 그 예이다.

고려시대 수학은 신라 산학제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수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즉 초기에는 국자감에 소속시켜 학문적 의의를 인정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잡과 중의 하나로 격하시켰다. 또한 극히 제한된 특수신분층에서 세습적으로 수학을 다뤘기 때문에 이것은 수학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됐다. 그러나 말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상명산법(詳明算法)’, ‘산학계몽(算學啓蒙)’ 등 많은 산서(算書)를 도입해 조선 수학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조선 전기의 수학은 국가 기관을 중심으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됐다. 또한 유교적 사상의 지배를 받은 까닭에 형이상학적 수리사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수학이 관청에 소속된 중인(中人) 계급 산학자들에 의해 독점되면서 발전 계기가 많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산학은 공백 기간을 갖게 되고, 침략군의 약탈 때문에 왕실 서고에서조차 산서가 사라지게 된다.

중국 수학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송·원대의 수학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하던 전통수학이 이 시기에 큰 손실을 입은 것이다. 다행히 전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산원의 채용 인원은 꾸준히 늘었고, 조선 중기에 와서는 산학 기술 관리직을 독점하는 중인 산학자 집단이 형성될 정도로 수학의 학문적 기반이 회복됐다.

실학운동으로 활발해진 산서 편찬

16세기 전반에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시작된 실학운동은 우리의 전통 과학인 천문학과 수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 본격적인 실학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조선은 산학제도를 정비하고 산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에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은 종류의 수학책을 저술했다.

실학자 이규경은 60권으로 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9권의 ‘기하원본변증설’에서 기하학의 실용적인 용도를 설명했고, 경험주의를 주장한 최한기는 관리를 채용할 때 합리적 사고능력의 소유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수학시험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수학서 중에서 주로 산학계몽을 해설한 것으로는 산학자 경선징의 ‘묵사집’, 산학자 임준의 ‘신편산학계몽주해’가 있다. 앞서 소개한 홍정하의 ‘구일집’은 ‘구장산술’, ‘상명산법’, ‘산학계몽’을 참고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천원술 문제를 싣고 있다.

홍대용과 남병길, 이상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학자다. 진취적인 실학자인 홍대용은 수학지식의 일상화를 추구했다. 또한 전문적으로 수학을 연구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인정받은 남병길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옛 산서에 그림까지 덧붙여 측량술에 관해 설명한 ‘측량도해’, ‘구고술요도해’와 ‘구장산술’을 해설한 ‘구장술해’라는 책을 펴냈다. 또 그는 천원술과 서양의 대수방정식이 같은 해법을 가졌다는 점도 밝혔다.


개화기 수학의 변화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친 실학시대에는 수학 전문가가 아닌 지식층 양반들이 수학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이들은 전문적인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고 초보적인 수준에 있었다. 또한 중인 산학자들의 의욕적 연구와 저술 활동, 사대부 수학자와 중인 수학자의 합류, 유럽 수학과의 접촉이 이뤄져서 독자적 수학 발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때야말로 비로소 수학이 독립과학으로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1895년(고종 32)에 시작된 새로운 수학교육은 유럽식 수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산학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주로 산술의 계산과 응용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렇게 필산과 주산에 중점을 둔 교육이 시작되자 성균관 교육과정도 개편돼 산술을 이수하도록 했으며, 1895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범학교와 중학교(1899 설립)에서는 산술 이외에 대수, 기하를 가르쳤다. 유럽의 수학을 수용하면서 개화기 수학은 서구화, 대중화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자적이고 전통적인 수학 연구의 성과는 근대적 수학 교육에 흡수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한국 수학의 독자적 학문 체계

수학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이라는 특성때문에 흔히 서구 중심의 학문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수학은 토목 공사, 호구 조사, 조세와 같은 실용적 목적을 위해 연구되는 실용 수학 외에 기하학과 고차방정식인 천원술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한국의 전통 수학은 동양 수학의 바탕이 된 중국 수학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지만,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다른 것처럼 그 기본 정신도 다르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통 수학이 항상 발걸음을 같이 한 것은 아니다. 한국 수학이 중국 수학을 모방한 것처럼 보기 쉽지만, 한국 수학은 나름의 독자적 학문 체계를 이룩했다.

그러나 이슬람이 보존한 그리스 문화가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결과로 이어진 것과 달리 아쉽게도 한국과 중국의 수학적 전통은 동양의 근대 수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맥이 끊겼다. 이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근대를 형성할 시기에 서구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대 사이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수학의 전통을 되돌아보고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일은 수학의 균형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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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최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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