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네 같이 놀러 갈 메이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서울 성수동 긱블 메이커스페이스. 갈퀴 님이 갑자기 할머니 댁에 가자며 숨숨 님과 찬스 님을 납치(?)했습니다. 그 길로 달려간 경기도 파주 통일로 옆 마을에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윤인순 할머니의 고향은 북한 개성입니다. 할머니 가족은 개성의 한 사거리에서 식당을 하셨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할머니의 부모님은 식당으로 몰려오는 피란민들을 챙기려 할머니 남매를 먼저 밖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전쟁통에 할머니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영원히 이별하게 됐습니다. 할머니가 꽃다운 열일곱 소녀였을 적 일입니다.
“(개성에서) 서울까지 60km 밖에 안 돼요. 그걸 못 가고 있잖아요, 70년 동안. 너무 억울해요. 걸어서도 갈 수 있어요, 개성.” 할머니는 봄이 되면 고향 산에 영란꽃(은방울꽃)이 만발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며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신 ‘고향의 봄’이 긱블 메이커들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오르골에 고향을 담다
윤인순 할머니는 북녘을 떠나오시면서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잃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런 할머니께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드리고자 찬스, 숨숨, 키쿠 님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고향의 봄이 울려 퍼지는 오르골을 만들어 할머니께 선물해 드릴 겁니다.
긱블은 종이 악보 오르골 만들기에 도전합니다. 종이 악보 오르골 무브먼트에 악보를 끼우고 손잡이를 돌려 악보를 움직입니다. 그러면 오르골이 악보에 맞춰 다양한 곡을 연주하는 방식입니다. 세부 원리는 조금 복잡하니 심호흡을 하고 따라와 주세요. 종이 악보 오르골 무브먼트 안에는 둘레에 돌기가 나 있는 원통이 들어있습니다. 원통 단면을 기준으로 3시, 6시, 9시, 12시 방향에 돌기가 나 있는 식입니다. 오르골 안에는 길이가 제각기 다른 금속판(건반)이 들어있습니다. 건반을 튕기면 실로폰을 연주할 때처럼 건반이 짧을수록 높은음, 길수록 낮은음이 납니다. 원통의 9시 방향에 나 있는 돌기는 오르골의 건반 아래에 맞물려 있습니다.
구멍이 뚫린 종이 악보가 원통의 기둥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12시 방향에 있던 돌기가 종이 악보의 구멍에 걸리면서 원통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합니다. 9시 방향에 나 있던 돌기도 함께 회전하면서 오르골의 건반을 튕기죠.
오르골 만들기를 담당한 찬스 님은 건반이 30개인 30노트 종이 악보 오르골 무브먼트를 준비했습니다. 일반적인 오르골 무브먼트에 사용하는 플라스틱 기어는 내구성이 약해서, 특별히 황동 기어가 들어있는 무브먼트를 구했죠(튼튼1). ‘종이 악보’ 오르골이긴 하지만, 종이는 내구성이 약해 오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종이 대신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프로필렌(PP)으로 만든 판을 이용했습니다(튼튼2). 할머니께 영원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원래 종이 악보 오르골은 손잡이를 돌려 악보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잡이 대신 모터에 연결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사용하실 물건이니 최대한 간편히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긱블의 배려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오르골 변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고향의 봄 음원 파일을 오르골용 악보 도안으로 전환했습니다. 찬스 님이 이 도안에 따라 플라스틱판에 구멍을 하나하나 뚫었죠. 악보는 양 끝을 붙여 연속적으로 재생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영원히 음악을 끄지 못하는 오르골을 만들 순 없죠. 여기서 적외선 센서가 등장합니다. 적외선 센서는 적외선을 발생한 뒤 반사돼 돌아오는 빛의 변화를 감지하는 장치입니다. 키쿠 님은 악보의 시작 부분에 검은 테이프를 붙였습니다. 검은 테이프를 붙인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빛을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적외선 센서가 이 부분을 쉽게 인식할 수 있죠.
적외선 센서는 아두이노 나노와 연결돼 있습니다. 적외선 센서에서 보내는 신호를 아두이노 나노가 DC모터 드라이버로 전달해 모터를 제어하는 식입니다. 보통 DC모터 드라이버는 모터가 정방향, 혹은 역방향으로 회전하도록 제어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터의 속도를 조절하고 발광다이오드(LED)의 밝기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았죠. 펄스 폭 변조(PWM) 방식으로 전원을 빠른 주기로 반복해 켜고 끄면서 모터와 LED 각각의 속도와 밝기를 제어합니다.
악보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적외선 센서가 검은 테이프를 인식해 신호를 보냅니다. 아두이노 나노를 거쳐 신호를 받은 DC모터 드라이버는 모터와 LED의 작동을 중지합니다.
38선 철조망을 감싼 고향의 영란꽃
오르골 윗부분은 숨숨 님이 맡았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큰 슬픔을 얻은 할머니를 위로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외관을 제작할 겁니다. 숨숨 님은 고향에 영란꽃이 많이 피어나곤 했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영란꽃은 작은 흰색 꽃이 한 줄기에 여러 개씩 줄지어 피어나는 야생화입니다.
철사를 구부려 영란꽃의 꽃잎 여섯 장을 만든 뒤 연결하면 꽃 한 송이가 완성입니다. 숨숨 님은 이런 꽃송이를 다섯 개 만든 뒤 겉면에 흰 락카를 뿌려 색을 입혔습니다. 금속으로 만들어 차가운 느낌이 드는 꽃 속에는 노란빛의 LED를 설치해 따스한 느낌을 줬습니다. 꽃 속 암술과 수술을 표현한 겁니다. 작품 외관에는 국방부의 협조로 구한 특별한 재료도 사용됐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할 38선 철조망입니다. 숨숨 님은 영란꽃으로 철조망을 감싸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위로를 담았습니다.
완성된 오르골과 영란꽃 화병을 들고 윤인순 할머니께 다시 찾아갔습니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고향의 봄 가락에 맞춰 긱블과 할머니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모두가 눈물 바람인 합창이었죠. 할머니는 영란꽃을 바라보며 “이 꽃을 70년 만에 만났다”며 “이산가족을 만났네”라며 기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