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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자연의 합리성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흐르는 듯한 곡선과 총천연색 타일. 20세기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활동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넷(1852~1926)의 작품은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꽤나 친숙하다(그의 작품 가운데 무려 7개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이다!). 하지만 보통은 돌과 타일, 철물로 만들어낸 기괴한 형태에만 관심을 둘 뿐, 그의 건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연과 닮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감성이 주도하던 바로크 시대를 지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성을 중시하는 고전의 문화가 융성한 시대’. 최초의 가우디 전기를 쓴 건축가 주셉 프란세스크 라폴스는 가우디가 활동했던 100여 년 전을 이렇게 기술했다. 오늘날의 바르셀로나는 유럽 건축의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된 도시지만, 가우디가 활동했던 100여 년 전만 해도 그리스, 로마 건축의 규범을 기반으로 하는 신고전주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런 풍조는 학창시절 가우디의 작품에도 반영돼 있다.


1900년 경 가우디와 동료 건축가들이 건설한 에이샴플라.
도시 전체를 주거 블록으로 채우는 획기적인 도시 계획이었다.

역병이 바꿔놓은 도시 건축

정체돼 있던 유럽 건축에 큰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뜻밖에도 질병과 위생 문제였다. 19~20세기 유럽은 전염병이 대유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와 스페인독감이다. 콜레라는 1817년 인도에서 발병해 100년 동안 4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스페인에서는 이런 콜레라가 4차례나 창궐해 80만 명이 사망했다. 뒤이어 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 발생해 전 세계 5000만 명이 숨졌다(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스페인이 병원체의 발원지는 아니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사람이 1500만 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질병의 위협이 전쟁을 뛰어넘은 것이다.

스페인의 콜레라는 항구에 접한 바르셀로나의 구도심에서 처음 시작됐다. 과학자들은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위생적이지 못한 도시환경에서 쉽게 퍼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거주 환경 개선을 위한 도시 개조운동을 시작했다. 1853년 살인적인 인구밀도를 기록하던 바르셀로나에서는 기존 성벽을 헐어버리는 ‘에이샴플라(L'Eixample, 카탈루냐어로 ‘확장’을 뜻한다)’라는 이름의 도시 계획 공모전이 열렸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건 일데폰소 세르다(1815~1876년)라는 토목기사의 계획안이었는데 그의 계획은 바르셀로나 도시 전체를 20m 폭의 도로로 둘러싼 정사각형(113.3m × 113.3m) 모양의 주거 블록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에이샴플라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현대적인 도시 계획이었다. 기존의 바로셀로나 구도심은 도로 폭이 평균 4m에 불과했다. 채광과 환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도로에 습기와 악취가 가득했다. 에이샴플라 지구는 블록 주변 도로의 폭을 20m로 넓혔다. 또 블록 안쪽에 폭이 70m에 이르는 넓은 파티오(el patio, 안뜰)를 설계해 채광과 환기가 가능하도록 했다. 블록의 높이는 모든 건물에 빛이 45°로 내리쬘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로써 도심의 모든 주택에 어느 정도의 채광, 환기를 담보할 수 있게 됐고, 도시 구조와 도시 주거의 큰 틀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가우디는 이 에이샴플라를 빈 캔버스처럼 생각했다. 에이샴플라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것은 가우디가 한창 활동하던 1900년경. 당시 가우디는 이미 널리 알려진 건축가였고 자신만의 건축 스타일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는 에이샴플라에 세 채의 주택을 지었는데 바로 가우디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칼벳 주택, 바트요 주택, 그리고 밀라 주택이다. 그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밀라 주택은 그가 민간에서 의뢰받아 수행한 마지막 작품이다. 이 주택 건설을 마친 뒤 사망하기까지 14년간 그는 오로지 성가족 성당의 건설에만 집중했다. 성당이 종교시설로서 관습과 상징성에 상당히 얽매여 있는 주제임을 감안한다면, 밀라 주택은 사실상 가우디의 건축·도시관(觀)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최후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름답되 합리적이게

스페인과 같이 더운 지역, 특히 지중해에 접해 습도가 높은 바르셀로나 같은 곳에서는 집 안을 통과해 부는 바람이 중요했다. 그런데 에이샴플라 지구에서도 블록 모퉁이에 지어진 집은 이 점에서 불리했다. 삼각형 땅의 3면 중 2면이 다른 집에 가로막혀 있는 ‘눈먼 벽’이기 때문에 다른 집에 비해 덥고 채광이나 환기도 잘 되지 않았다. 특히 해질녘에 낮은 서향 빛을 받아 더워지는 서쪽 모퉁이는 건축가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밀라 주택은 바로 그런 곳에 세워졌다. 건축가 가우디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이끌어낸, 쾌적하고 건강한 주거 환경에 대한 근원적인 열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직교 체계에 근거한, 고전적인 건축의 엄격함을 벗어던졌다. 당시는 돌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다. 돌은 누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당기는 힘에는 매우 취약하다. 당기는 힘은 보통 대들보처럼 가로로 긴 부재에서 생겨난다. 부재의 길이가 길면 가운데 부분이 중력에 의해 처지면서 부재의 하단이 밑으로 당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돌은 이런 힘에 취약해 돌로 만드는 건축물은 기둥과 기둥 사이(혹은 벽과 벽 사이)의 간격을 넓게 띄울 수가 없다. 공간이 좁게 구획될 수밖에 없다.

밀라 주택은 돌로 만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자유롭다.
가우디는 건물을 유기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철골을 구조체에 활용했다.

 
그런데 가우디는 밀라 주택의 평면을 돌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형태로 만들었다. 가장 큰 차이는 주택의 가운데 놓인 파티오의 모양과 크기다. 밀라 주택 뒤쪽의 파티오는 원형이며 크기가 상당히 크다. 건물로 둘러싸인 파티오는 마치 오목한 거울이 빛을 모으는 것과 같이 빛을 모아 블록 전체에 빛을 제공한다. 밀라 주택의 원형 파티오는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태양의 빛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을 수 있다. 또 작은 파티오 두 개보다는 하나의 큰 파티오가 빛을 모으는 데 유리했다. 가우디 건물 맨 꼭대기 다락의 지붕을 햇빛 방향에 따라 비스듬하게 설계하고, 옥상의 난간을 불투명한 돌이 아닌 반투명한 철망으로 설계함으로써 빛이 건물 안으로 최대한 들어올 수 있게끔 심혈을 기울였다.
 

가우디는 지붕을 비스듬하게 설계하고 건물 뒤쪽의 안뜰을
원형으로 크게 만들어 주택 안으로 빛이 최대한 들어올 수 있게 배려했다.

 
가우디는 또 주택 내부 공간을 수평, 수직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모양대로 구획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밀라 주택은 각각의 층이 모두 다른 모양의 평면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자유로운 형태는 그의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가우디가 돌이라는 재료로 이처럼 유기적인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철골을 구조체에 적절히 잘 이용한 덕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에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단 한 채도 없었다. 1854년 프랑스에서 철근콘크리트의 특허가 출원된 상태였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여전히 돌과 벽돌이 주된 재료였다. 가우디는 밀라 주택을 만들면서, 돌기둥 위에 기차 철로에 사용되는 철골을 올린 새로운 건축 체계를 창안했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주거 환경에 대한 기술적인 필요성에서 출발한 설계는 역동감과 활기가 느껴지는 감성적인 작품으로 마무리됐다. 실제로 가우디는 건축가를 ‘종합적인 사람’ 즉 무엇이 완성되기 전에 그것을 조합하여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를 ‘조형성(la plasticidad)’이라 표현했다. 밀라 주택은 주거 환경의 다양한 조건들을 조형적으로 종합해낸 작품이다.
 
구엘 백작의 공장단지 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콜로니아 성당.
가우디는 모든 기둥을 중력의 요구에 따라 적당히 기울어지게 설계했다.

가우디가 10년간 연구한 다중 현수선 모형.
가우디는 이 모형을 ‘컴퍼스가 아닌 중력으로 그려낸 아치’라고 자평했다.

 
중력으로 그린 아치

밀라 주택을 지을 무렵, 가우디는 돌을 이용한 구조 체계를 혁신하는 데 골몰해 있었다. 그는 자연의 본성을 모방해 해법을 찾았다. 대표적인 것이 1913년 완공한 구엘 공원의 포티코(Portico, 지붕이 있는 현관)였다. 구엘 공원은 바르셀로나의 부호였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지어진 공원이다. 가우디는 이곳에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 긴 복도를 만들면서 기울어진 돌기둥을 사용했다. 그는 평소에 나무를 관찰하면서 나뭇가지가 달고 있는 나뭇잎의 양, 즉 나뭇잎의 무게에 따라 기울어짐을 깨달았다. 또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사람이 그것에 비스듬히 기대 쉬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관찰을 통해 포티코의 지붕 역시 기울어진 구조체로 지탱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가우디는 구엘 백작의 공장단지 내에 있는 노동자들의 성당인 콜로니아 구엘 성당에도 기울어진 구조체를 적용했다. 그는 성당을 10분의 1로 축소한 정교한 구조 모형을 만들었고, 사진을 찍은 뒤 인화한 사진 위에 직접 스케치를 해 그 모습을 확인하며 작업했다. 덕분에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모든 기둥은 중력의 요구에 따라 적당히 기울어져 있다. 성당의 구조체가 다른 성당에 비해 훨씬 가볍고, 보통 고딕 성당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부벽도 일절 없다(가우디는 평소 이런 부벽들을 가진 고딕 성당을 ‘장애를 가진 몸’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체계는 2026년 완공 예정인 성가족 성당의 설계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재밌는 점은 가우디가 구엘로부터 콜로니아 성당 건축을 부탁받은 뒤 초반 10년은 단 하나의 돌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우디는 오로지 구조체 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다중 현수선 모형이다. ‘매달린 사슬’이 그려낸 이 아치는 서로의 하중을 효과적으로 버티게 하기 위해 고안됐다. 가우디는 쇠사슬을 묶는 고정점과 길이, 추의 무게 3가지 요소만을 이용해 이 모형을 만들면서 이것을 ‘컴퍼스가 아닌 중력으로 그려낸’ 아치라고 높게 평가했다.

가우디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족 성당의 기둥에는 플라타너스 나무의 모습을 덧입혔다. 덕분에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숲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 여러 갈래의 가지들이 이루어낸 경쾌함은 돌이라는 재료의 본성을 쫓아 가우디가 10여 년간 연구해온 기술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가우디를 자연의 어떤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장식적인 건축가로 단정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편견과 달리 가우디의 건축은 자연의 본성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시작됐다. 그는 돌이라는 건축 재료를 가장 이성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시대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살아있는 것의 역동감과 생기를 담아냈다. 건축 예술이란 이처럼 ‘물질에 의미를 담는 작업’이다. 100년 전 가우디의 건축 작품은 ‘오늘날 우리는 어떤 건축물을 짓고 있으며, 어떤 이성과 감성을 담아내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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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이영혜 | 글 이병기 건축가 ․ 번역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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