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인형을 만들겠답시고 머리, 다리, 몸통을 마구 연결한다면 결과물은 처참할 것이다. 올바른 위치에 각 부분을 연결해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곰 인형 모양이 나타난다. 분자를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형태의 분자를 합성하기 위해서는 그 재료인 원자를 잘 이어줄 도구가 필요하다. 올해 노벨 화학상은 분자를 만드는 정확하고 새로운 도구, 비대칭 유기촉매 분야를 개척한 베냐민 리스트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교수와 데이비드 맥밀런 미국 프린스턴대 화학과 교수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의 연구가 의약 연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친환경 화학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거울상 이성질체, 한 끗 차이가 비극을 불러온다
우리는 냄새만 맡고도 레몬과 오렌지를 구분할 수 있다. 레몬 향기와 오렌지 향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향기를 내는 분자는 사실 ‘리모넨(limonene)’이라는 같은 종류의 화합물이라 화학식이 서로 같다. 레몬 향기가 나는 (S)-리모넨과 오렌지 향기가 나는 (R)-리모넨 사이의 차이를 만든 건 단 하나. 3차원 공간에서 봤을 때 분자의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분자를 구성하는 원소의 종류와 개수가 같지만, 구조가 다른 물질을 이성질체라 부른다. (S)-리모넨과 (R)-리모넨은 거울상 이성질체에 해당한다. 두 이성질체가 마치 사이에 거울을 두고 비춘 것처럼 반대 모양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거울상 이성질체는 분자 구조가 비대칭형일 경우 생긴다. 화학에서 비대칭이란 3차원 공간에서 어느 축을 기준으로 접어도 온전히 겹치지 않는 구조를 뜻한다. 예를 들어, 칫솔은 대칭형이다. 솔을 위로 가게 책상에 둔 상태에서 긴 세로축을 기준으로 양쪽이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 여신상은 대칭형이 아니다.
양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손도 대칭축을 아무리 바꿔도 양쪽이 같은 모양이 되지 않는 비대칭형이다. 그러면서 왼손은 오른손을 거울에 비춘 모습과 똑같이 생겼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거울상 이성질체 관계다.
왼손이 오른손과 다르듯, 거울상 이성질체도 서로 다른 물질처럼 작용한다. 리모넨의 경우 두 거울상 이성질체가 단순히 향기를 다르게 만드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의약품에서 거울상 이성질체는 생체 내에서 다른 활성을 유도해 특히 주의해야 할 대상이다.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 후반 임산부의 입덧 완화제로 판매된 약의 성분이다. 두 가지 거울상 이성질체를 갖는데, (R)-탈리도마이드는 입덧 완화 효과가 있다. 하지만 (S)-탈리도마이드는 세포 분화를 억제해 초기 임산부가 섭취할 경우 태아의 팔·다리가 생성되지 않는 부작용을 낸다.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판매 당시엔 두 개의 거울상 이성질체를 분리하지 않고 섞인 채로 약을 만들었다. 그 결과, 전 세계 46개국에서 탈리도마이드에 의한 기형아 출산이 1만 명이 넘었다.
이처럼 원하는 거울상 이성질체를 분리해 섭취해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의약품 합성에서는 거울상 이성질체 중 한 가지만 선택적으로 합성하는 비대칭 합성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이성질체와 달리 거울상 이성질체는 3차원 공간에서 본 구조를 제외하고는 물리·화학적 특성이 서로 같다. 거울상 이성질체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편광된 빛이 통과할 때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점뿐이다. 그래서 화학반응이 끝난 후 거울상 이성질체를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거울상 이성질체가 존재하는 비대칭 화학물질을 대량생산할 때는 애초에 원하는 형태만 선택적으로 합성하는 전략이 필수다.
비대칭 촉매, 20년 만에 노벨상
화학물질을 합성할 때는 촉매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촉매는 화학반응 과정에서 소모되거나 변형되지 않으면서 반응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화학물질이다. 그중 비대칭 화학물질을 합성할 때 한 종류의 거울상 이성질체만 선택적으로 만드는 촉매를 비대칭 촉매라고 부른다. 그간 활발히 연구돼 온 비대칭 촉매는 금속촉매와 효소였다. 2001년엔 비대칭 금속촉매 연구에 대한 공로로 윌리엄 노울즈, 료지 노요리, 배리 샤플리스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20년 만인 올해, 또 다른 비대칭 촉매인 유기촉매 분야가 노벨상을 받았다. 비대칭 유기촉매는 기존 비대칭 금속촉매와 효소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대칭 금속촉매는 비대칭 구조의 유기물과 금속이온으로 구성돼 있다. 유기물 구조 설계 외에 유기물과 금속이온 간의 상호작용도 촉매의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려할 요소가 많다. 한편 효소는 크기가 큰 데다 구조가 복잡해서 원하는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구조를 새로 설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비대칭 유기촉매는 금속이온 없이 비대칭 유기물만으로 반응을 유도하기 때문에 고려할 요소가 적다. 비대칭 유기물은 구조도 효소보다 훨씬 단순하다.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아미노산, 당류와 같은 비대칭성을 갖는 유기물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연의 화학물질을 활용할 수 있어 친환경적인 촉매로 꼽히기도 한다.
비대칭 유기촉매 연구는 2000년 발표된 두 논문을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맥밀런 교수와 리스트 교수가 두 달 차이로 각각 발표한 논문이다. ‘유기촉매(organocatalysis)’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맥밀런 교수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에 근무하며 금속을 이용한 비대칭 촉매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가격이 높고 수분과 공기에 민감한 금속촉매의 한계 탓에 비대칭 금속촉매가 화학산업에 적용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느끼던 중이었다.
맥밀런 교수는 금속이온 없이 유기물만으로 촉매를 만든다면, 더 저렴하고 다루기 편한 촉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탄소를 기본 뼈대로 하고 중간에 질소를 결합하면 질소가 전자친화력이 높은 이미늄 이온이 돼 금속 이온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렇게 만든 촉매를 비대칭 딜스-알더(Diels-Alder) 반응에 적용해 사이클로헥센을 합성할 수 있었다. 맥밀런 교수는 이 비대칭 유기촉매 반응결과를 2000년 4월 국제학술지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했다. doi: 10.1021/ja000092s
리스트 교수는 항체를 이용해 만든 효소를 연구하던 중 금속이온 없이 아미노산만으로도 효소가 화학반응을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후속 연구를 통해 그는 아미노산의 한 종류인 프롤린을 촉매로 활용해 비대칭 알돌 반응을 유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2000년 2월 연구결과를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하면서 유기물만으로도 비대칭 촉매 반응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doi: 10.1021/ja994280y
두 과학자의 선구적인 연구를 기점으로 비대칭 유기촉매 분야가 활발하게 발전했다. 2000년 이후로 새로운 구조의 유기촉매가 개발되고 다양한 화학반응이 연구됐다. 유기촉매 반응을 이용해 복잡한 구조의 화학물질을 손쉽게 합성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스트리크닌이라는 물질은 1952년엔 29단계의 반응을 거쳐 합성해야 했다. 2011년 비대칭 유기촉매와 연속반응 전략을 통해 스트리크닌을 단 12단계의 반응으로 합성하며 수율을 7000배 이상 높였다. 유기촉매는 제약 산업에도 큰 영향을 줬다. 우울증 치료제 속 파록세틴, 타미플루의 성분으로 바이러스성 감기 치료에 사용되는 오셀타미비르 등이 유기촉매를 이용해 생산되고 있다.
필자는 데이비드 맥밀런 교수가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Caltech)에 근무하던 2005~2006년 박사후연구원으로 함께 일했던 인연이 있다. 맥밀란 교수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과학자다 보니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필자가 아주대에 부임한 뒤인 2008년도에는 아주대에서 세미나도 개최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7년 한국에서 진행된 유기화학 분야 국제학회 OMCOS19에 참석해 최근 연구 결과를 같이 공유했다.
맥밀런 교수는 아주 겸손하게 “운이 좋아 우연히 발견했다”고 노벨상 수상 소감을 말했다. 노벨상 수상 연락을 받은 당일에도 늘 그렇듯이 아침 9시 미팅을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축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15년 전과 같은 미팅 풍경을 상상하니, 화학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꾸준하고 성실한 연구가 결국 노벨상을 안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소개.
장혜영.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칼텍의 데이비드 맥밀런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냈다. 2006년부터 아주대 화학과에서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린 촉매 연구실에서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탄소로 유용한 물질을 만드는 촉매와 촉매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hyjang2@ajo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