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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 정의로운 모빌리티를 위해

모빌리티는 무슨 뜻일까.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쓰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체로 ‘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기술이 가미된 새로운 이동수단’ 정도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동(성)’이라는 우리말로 옮길 수 있음에도 굳이 영어 그대로 음차해 쓴다.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이 말을 이동수단의 의미보다는 훨씬 더 넓게 확장해 사용한다. 모빌리티는 ‘이동’과 관련된 거의 모든 현상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동뿐만 아니라 물건, 정보, 이미지, 자본의 이동 등이 포함되고, 이에 따른 여러 사회적 변화, 즉 공간, 도시, 인구, 노동, 자본, 권력의 변화 등도 포함된다. 나아가 이런 이동과 변화를 뒷받침하는 테크놀로지와 인프라 등도 포함된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에서 모빌리티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는 화두가 된다.


인간과 공진화하는 모빌리티의 역사

 

이처럼 모빌리티는 광범위하게 연구되지만, 그중 핵심은 이동수단이라는 의미의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다. 역사적으로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는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동을 위해 두 발로 걷거나 말이나 낙타 같은 가축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기차라는 새로운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 근대 사회를 새로운 공간과 시간으로 다시 조직했다. 혜성같이 등장해 20세기를 제패한 자동차 모빌리티는 자유롭고 개인화된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항공 모빌리티는 20세기 후반 세계화의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이유로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사회와 분리해 바라봐서는 안 된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도 특정 사회의 특정 조건에서 등장하고, 거꾸로 그 사회에 사는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이를 두고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coevolution)라고 비유한다. 본래 공진화는 진화생물학에서 쓰는 용어로,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그와 관련 있는 다른 생물 집단도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가령 벌은 꽃에서 꿀을 잘 얻을 수 있도록 진화하고, 거꾸로 꽃은 벌에 기대어 잘 번식하도록 적응하면서 공진화했다. 
인간과 테크놀로지가 함께 진화한다는 말은 이들이 서로에게 적응해야 할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특정 조건과 상황이라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거꾸로 인간 역시 이런 기술적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내비게이션 같은 모바일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삶과 필요에 적응해 등장했지만, 이제 이런 기술적 환경에 적응해 인간의 생활방식, 습관, 능력 자체가 변했다. 스마트폰 주소록 덕에(또는 탓에)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됐으며,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됐다.


연결(connectivity), 자율주행(autonomous), 공유(sharing), 전동화(electrification)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실현되는 근미래에도 인간은 이에 적응해 공진화할 것이다. 이처럼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삶 및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해야 하며, 미래 모빌리티의 변화를 생각할 때도 이런 관점을 놓치면 안 된다.


팬데믹 시대의 모빌리티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라는 관점에서 모빌리티는 팬데믹과 같은 재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모빌리티는 팬데믹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고, 동시에 모빌리티는 팬데믹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기 이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자.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이후 인류는 더 빨리, 더 자주, 더 멀리 이동해 왔다. 업무나 여가를 위한 이동은 끊임없이 상찬됐다. 국토교통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에는 인천공항에서만 하루 평균 약 1000대의 비행기가 떴다. 인천공항에서만 매일 약 20만 명이 하늘 위를 날아 전 세계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은 것이고, 이는 다시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혁신을 일으켰다. 


 이동의 가속화는 세계적 팬데믹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병원체는 이동하는 사람과 물건에 묻어서 국경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거의 멸종 직전까지 몰고 갔던 천연두, 홍역, 티푸스 등의 병원체도 유럽 정복자들에 의해 신대륙에 유입돼 퍼졌다. 20세기 최악의 팬데믹이었던 스페인 독감은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의 군기지에서 첫 환자가 나온 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을 따라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모빌리티 가속화로 팬데믹은 어느 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시적 위험이 됐다. 2020년 3월 토마스 프리드먼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는 인류 역사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를 분기점으로 인류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설령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우리는 또 다른 팬데믹의 위협 하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모빌리티에 의해 팬데믹이 일어난다면, 모빌리티를 제한해 팬데믹을 진정시키려는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도 이동 규제가 기본적인 방역대책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은 더 엄격하게 제한된다. 도시, 지역이 통째로 봉쇄되는 나라도 있고 외출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나라도 있다. 특히 감염자와 감염의심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이동이 금지된다.
2020년 4월 미국 교통안전청(TSA)은 미국 내 보안 검사 인원을 토대로 미국 비행기 탑승객 수 통계를 냈는데, 1년 전인 2019년 대비 자그마치 96%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10만 명 이하로 떨어진 것인데, 이 수치는 1954년 수준이다.


미래 모빌리티, 뉴 노멀 혹은 올드 노멀

 

팬데믹이 모빌리티에 미치는 영향은 단기적 영향에 그칠까. 코로나19가 지나간 후 모빌리티에도 뉴 노멀(경제, 사회 등이 위기 이후 새롭게 형성된 기준에 정착한 상태)이 적용될까, 아니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올드 노멀로 돌아갈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늘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사회나 어떤 미래 전략도 세울 수 없다.
국가와 지역에 따라 정도 차이는 다소 있으나 20세기 이후 전 세계는 대부분 자동차 중심 모빌리티 패러다임으로 재편됐다. 저명한 모빌리티 연구자인 뱅상 카우프만 스위스 로잔공대 도시사회학 및 모빌리티 분석 교수는 모빌리티의 미래에 대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자동차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한 이동이 계속 활발하게 유지되고 더욱 늘어나는 것이다.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혁신을 통해 장거리 출퇴근은 지속해서 증가한다.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되는 셈이다. 자동차는 자율주행 기술을 장착해 통합적 모빌리티 서비스의 일부가 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사회적 관계의 기반은 여전히 대면 만남이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시나리오는 물리적 이동이 줄어들고 원격통신이 지배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사회적 관계의 토대는 더 이상 대면 만남이 아니다. 업무는 주로 화상회의와 재택근무로 이뤄지고, 소비도 온라인 구매와 배송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때 자동차 모빌리티 등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는 사람보다는 물건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나리오는 위의 두 가지 시나리오와는 달리 물리적 이동과 원격통신이 모두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느림에 가치를 부여하고 주로 자신이 사는 동네에 머물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소규모 대면 만남을 중시하게 된다. 여전히 매일 이동하겠지만, 이동 공간은 대폭 좁아지고 이동 시간과 비용도 크게 줄어들다.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와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도 줄어든다. 


놀랍게도 이는 모두 코로나19 발생 이전에 나온 시나리오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여기는 사후확신 편향에 따라 원격통신의 시대를 예견한 두 번째 시나리오야말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 사회의 모빌리티가 장기적으로 어느 시나리오를 따를지 예단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신뢰해 미래를 준비한다면 낭패를 볼 위험이 크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미래를 예견하는 최적의 방법, 혹은 유일한 방법은 바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시나리오가 실현될 것인가는 어떤 시나리오를 원하는가에 달려있고, 어떤 시나리오를 원하는가는 어떤 시나리오가 바람직한가에 토대를 둬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빌리티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이른바 ‘모빌리티 정의(正義)’를 잊어서는 안 된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삶에 타격을 받지만, 정도는 다르다. 비대면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전문직, 관리직, 기술인력 등은 이동 제한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줄어들지 않으며 감염병에 노출될 위험도 적다. 이에 비해 비대면 노동이 불가능한 이른바 필수노동자들, 즉 일용직 노동자, 플랫폼 배달노동자, 택배 배송 노동자, 보건과 간호 노동자 등은 감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팬데믹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이동이 제한되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정의로운가가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재난 이후에 형식적이고 법적인 이동 권리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실질적인 이동 능력을 보장하는 모빌리티 정의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시나리오이고,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고 간절히 추구하는 시나리오라면, 분명 미래에 실현될 것이다. 미래의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와 인프라를 준비하는 일은 이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

김태희.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본 대학 철학과에서 석사,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모빌리티인문학 연구원 HK교수로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모빌리티 시대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 ‘모빌리티 사유의 전개’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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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태희 건국대 모빌리티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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