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과학의 현장으로 출근한다. 달력을 가득 메운 인터뷰 일정을 따라 달리는 차 안은 이동하는 도서관처럼 참고 서적들이 즐비하다. 트렁크엔 내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렌즈가 가득하다.
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다. 구체적으로는 과학교육 영상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대중에게 과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 과정 중 하나, 혹은 신뢰할 수 있지만 어려운 무언가로 인식되기 일쑤다. 이런 과학을 영상으로 쉽게 풀어 전문가와 대중을 이어주는 것이 내가 몸담은 ‘과학쿠키 프로덕션’의 일이다.
‘과학 덕후’의 탄생
과학동아에 내 이야기가 처음 소개된 건 과학동아 2018년 10월호 ‘과학 크리에이터가 사는 법’ 기사를 통해서다. 당시 기사를 담당했던 이영혜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아, 성공한 덕후라는 게 이런 건가?’였다. 중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과학동아를 즐겨 읽었다. 과학을 좋아했던 내게 국내외의 최신 과학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잡지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과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되짚어보면 아주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 시골에서 자란 덕에 부모님이 바쁘실 땐 집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도 때도 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 어른들을 곤란하게 하던 내게 자연은 호기심의 원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에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을 만났다. 대중에게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 과학적 사고능력을 키워주려 했던 1세대 과학 커뮤니케이터, 조경철 박사가 참여한 ‘우주는 왜?’라는 책이다. 나중에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나는 이 책에 너무나 깊이 매료된 나머지, 부모님을 따라 서점에 가면 늘 ‘~는 왜’ 시리즈 앞에 눌러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아동도서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수준의 난이도 있는 과학 개념도 담았다는 것이다. 어려운 과학 내용을 만화로 즐겁게 배운 경험은 특별했다. 이 책 덕분에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나는 만화책을 보다가 생긴 궁금증을 백과사전으로 채워가며 만화를 ‘공부’했다. 덕분에 과학을 얕지만 폭넓게 알고, 깊게 사랑하게 됐다.
“선생님, 혹시 유튜버 해 볼 생각은 없어요?”
좋아하는 과학 ‘덕질’을 더 하기 위해 선택한 진로가 바로 교육자였다. 고등학교 물리 교사는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 소통하며 나를 성숙시키는 데에도, 알고 있는 지식을 재구성해 전달하는 연습을 하는 데에도 아주 효율적인 직업이었다. 교사로 지내면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꿈의 방향을 정하고 목표를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내심 아이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갈 보물과도 같은 시간을 맞이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낯 간지러운 감정들이 꿈틀거렸다.
꿈틀거리던 마음에 물꼬를 튼 건 한 학생이 던진 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가려는데, 한 학생이 복도 한가운데서 질문이 있다며 나를 붙잡았다. 왜 소리는 높낮이에 상관없이 전달 속도가 똑같냐는 질문이었다. 교과서 속 일반적인 설명 방식보다는 현상이 일어나는 본질을 짚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소리의 본질인 기체분자의 운동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약간의 역사적인 이야기와 함께. 설명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그 학생이 스쳐 지나가듯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혹시 유튜버 해 볼 생각은 없어요?”
당시 나는 유튜브 콘텐츠를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학생들에게 과학 공부의 동기를 부여하고 물리학이 계산만 하는 지루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교사로 활동했던 당시에는 국내에 과학 채널이 거의 없었다. 그때 수업자료로 애용했던 대표적인 과학 채널은 베리타지움(Veritasium)과 미닛피직스(Minutephysics)였다. 두 채널 다 물리학의 본질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 장면을 직접 보여주거나, 손 그림으로 원리를 설명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채널이다. 이 콘텐츠들 덕분에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물리를 더 좋아할 수 있었다.
유튜브라는 공간은 내게 동경의 무대였다. 한번 빠지면 아주 깊게 파고드는 성격 덕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소니 핸디캠으로 영상을 찍곤 했다. 중학생 때는 두꺼운 영상 편집 전문서적을 뒤져가며 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를 독학한 적도 있다. 영상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나도 영상 만드는 걸 참 좋아했는데, 저런 삶은 어떻게 그릴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넘게 했었다.
내적 동기는 충만했지만 결정적 계기가 없었던 내게 학생의 한마디가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영상을 만들고, 본격적인 영상 창작자가 되려 교직을 그만뒀다. 그러나 오리의 우아한 모습 아래에는 허우적대는 다리가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좌절이 찾아왔다.
도움닫기 없이는 도약할 수 없다
영상을 만들고 올리는 모든 과정이 처음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어설픔’ 그 자체였다. 카메라 앞에서 무언가를 떠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촬영을 위해 만든 대본조차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일, 지금이 아니면 이런 일을 언제 해 볼 수 있을까 싶어 무작정 일을 이어나갔다. 나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보면 정말 무모하고 과감한 행동이었다.
초반에는 교사로 일하며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잔고는 갈수록 마이너스로 향했다. 누군가 “과학쿠키 님처럼 크리에이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정성스러운 진로 상담 메일을 보내올 때면, 자신 있게 길을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시기 때문이다. 정보의 바다 위를 표류하는 초라한 배 위의 선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당시 나를 지배했다.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 길로 가면 빛을 볼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나만의 영상을 쭉 쌓아간다는 신념 아래, 계속해서 노를 저었다.
영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리가 배우는 과학은 시험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과학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의 영향을 받고 때로는 실수도 할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대중이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과학사와 엮어 이야기하고, 손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채널의 대원칙이었다.
자극적이고 흥미롭지 않아도, 조회수가 낮아도 괜찮았다. 대원칙을 잘 지켜가면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수입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현재진행형인 과학 역사를 전하는 커뮤니케이터
꾸준함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영상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사람들에게 ‘과학쿠키’라는 채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올렸던 ‘대체 빛의 속도를 어떻게 알아냈을까?’라는 이름의 영상이, 일주일 만에 무려 30만 조회수를 찍으며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300~500명밖에 되지 않았던 구독자 수가 이 영상 덕분에 1만 명까지 늘었다. 이 영상 이후로 채널이 입소문을 타면서 정부기관, KBS, YTN 등 방송사와 함께 일할 기회도 생겼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함께 2018년 KBS 다큐멘터리 ‘세상은 얼마나 뜨겁고 짜릿하고 무겁고 많은가’를 촬영한 건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물리학 전공자에게 꿈의 학회인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 방문한 날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CGPM은 과학의 근간을 만들어 준 ‘측정’의 기준과 기본단위를 정하는 회의다. 이 회의에서 ‘kg’이라는 단위의 기준이 실물 1kg이 아닌 플랑크 상수를 기반으로 정해졌다. 140년 만의 일이었다. 과학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었던 CGPM에 방문하고 이 안에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과학쿠키 채널의 영상을 시청해주신 많은 분들이 내가 영상 마지막에 항상 하는 말, ‘과학을 쿠키처럼’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가 학창시절 성적을 위해 공부했던 과학은 때로는 아주 치열하고, 또 때로는 감동적인 과학자들의 생생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달콤한 쿠키처럼 즐겁게 전하는 것이 내 소망이다.
앞으로도 과학쿠키를 사랑해주시는 분들과 교육적 가치와 재미를 동시에 담은 영상으로, 때로는 글로, 또 때로는 강연으로 소통하려 한다. 어렸을 적 초대 과학 커뮤니케이터들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과학 만화책으로부터 감사히 전달받았던 과학의 즐거움을 여러분께 돌려드릴 계획이다. 과학을 쿠키처럼 즐기고 싶다면 언제든, 과학쿠키 유튜브 채널에 놀러 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