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쓰러진 후 일상의 평온도 쓰러졌다. 점심에는 아버지가 로봇 배식원을 향해 식판을 던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이러스형 뇌졸중. 일반 뇌졸중과 달리 여전히 불치병으로 남은 병이었다. 상태는 점차 악화된다고 들었다.
뇌가 아프면 성격도 달라지는 걸까. 평소 무뚝뚝하지만 예의 바른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마치 모든 게 가면이었다는 듯이 달라졌다. 로봇 의사에겐 욕설을 퍼붓고, 로봇 요양사에겐 왼발 발차기를 했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은 겉은 종합병원이었으나 사실 지방의 작은 병원이라 인간 의사가 전체 세 명밖에 없었다. 의사, 간호사, 요양사, 간병사, 배식원 등 의료로봇들이 훨씬 더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들 모두에게 아버지는 혐오를 담은 말과 폭력을 썼다. 이제 그를 간병할 존재는 없었다. 하나뿐인 딸밖에. 전파망원경 오퍼레이터 일을 관두고 아버지 간병을 하기로 했다.
끼리릭끼리릭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나의 수수. 수수는 거대 접시처럼 생긴 전파망원경이다. 지름이 700m나 된다. 휴식 시간에 나는 수수의 움직임을 자동으로 설정해 놓고 일반인용 전망대에 서서 수수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한다. 큰 몸집을 가진 수수가 360도 모든 각도마다 일일이 하나하나 안부인사를 하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본다. 수수 덕분에 온 우주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수수는 내가 이십 대 중반에 전파망원경 오퍼레이터로 첫 근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작동해 온 망원경이다.
나의 수수는 수백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소식까지 듣고 있다. 하늘에는 다 아는 척했던 인간이 모르는 길이 있고, 소리가 있고, 움직임이 있으니 다만 전파망원경의 너른 눈으로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이해력이 우주에서 가장 풍부할 아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30년 전 선택도 수수는 이해할 것이다.
후임자에게 업무인수인계를 하는 동안 두 가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받은 알 수 없는 신호와 1년 전 어머니에게 전파로 보낸 메시지. 모두 다 업무인수인계에서 이야기할 거리는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보낸 메시지는 너무 사적이기 때문이고, 알 수 없는 신호는 만약 외계 생명체가 보낸 게 맞다면 업무인수인계에서 다루기엔 너무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아버지가 간병 로봇의 팔을 부러뜨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연락을 해 온 병원 행정직원은 수리비가 족히 천만 원은 들 거라 말했다.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날은 전 세계 52개 전파천문대와 함께 수백억 광년 떨어진 은하 관측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관측 사상 가장 먼 우주까지 관측이 가능한 날이었다.
전파망원경 수수가 회전하는 소리를 마치 아기 걸음마 소리처럼 무심코 듣다가 문득 수수를 내려다봤다. 끼리릭끼리릭 움직여야 할 아이가 끼릭끼릭끼릭 움직이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동시에 교토 천문대 직원이 내가 대상 초점을 제대로 안 맞춘 것 같다며 우리 천문대에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때 나는 모니터에 업데이트된 신호를 봤다.
그 신호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모니터엔 수수가 실시간으로 받는 신호가 파장 길이별로 그려졌다. 1mm, 3mm, 7mm 등 각기 다른 파장 대역에 비슷한 리듬으로 일정한 위치마다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반복적으로. 다른 곳 천문대 직원들에게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내가 있는 수수 천문대쪽으로만 오는 신호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의사는 아침 7시 회진을 돈다. 그는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여러 곳을 다녔다. 즉 모두 건성으로 봤다. 원래 자세한 건 로봇 의사가 살필 터였다. 애초에 이 병원 인간 의사는 뇌 분야 전문의가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묻는 건 “원격진료 하실 거예요? 하셔야죠?”가 다였다. 원격진료에 동의를 해야 병원도 수수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진 매번 고개를 저었다. 원격진료도 로봇에 의존한 치료일 거라며 그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아지기는 고사하고 나빠지기만 했다. 그런 그가 병원에 머무는 이유는 병원비가 국가보험 처리돼 전액 무료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쓰러지면 도와줄 사람도, 로봇도 없으니.
이제 나는 간병 로봇과 로봇 배식원이 하던 일을 이어 받아야 했다. 로봇에게도 업무인수인계 거리가 많았다. 아버진 원래 매주 등산을 다닐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었으나 쓰러진 후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해졌고, 왼쪽도 전보다 힘이 없었다. 그래서 로봇들은 아침과 저녁 두 번 아버지가 옷 갈아입는 것, 씻는 것을 도와주고, 하루 세 번 식사를 배달하고, 식사 후 다시 식판을 옮기고, 하루 일곱 번 화장실에 갈 때 부축하고, 하루 스무 번 병실 온도를 체크하고, 하루 두 번 병원 앞 산책을 도와주고, 물과 주전부리를 원할 때마다 챙겨줬다. 그리고 맞았다. 그렇게 도와주는 로봇에게 그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히려 때렸다.
내게는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됐는데 병실에 다른 환자 간병을 위해 돌아다니는 로봇에게 쌍욕을 하는 아버지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병실에서 악장쳤다. 이 남자가 품위 있던 내 아버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평생 사료 연구나 하던 역사학자가 이렇게 무뢰한처럼 돌변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 동료 학자들은 한 번 병문안을 오고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가 변했기 때문이다.
딸이 가장 아끼던 존재-수수-를 뒤로 하고 자신을 간병하게 됐는데도 아버지는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30년 가까이 내가 너를 돌봤으니 이제 네가 나를 돌보는 게 당연하지’ 그런 표정이다. 이마엔 붉게 찢어진 상처가 있다. 얼마 전 로봇 의사를 이마로 내리찧은 상처다. 로봇에겐 아무 흉터가 남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진한 상처가 남았다. 매번 더 적극적인 존재에게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아침을 먹다 아버지가 소고깃국을 옷에 흘렸다. 갈아입혀야 했다. 처음엔 상의만 젖은 줄 알았는데 잘 보니 상하의 둘 다 젖었다. 새 환자복을 들고 와 옷을 벗기려고 멀쩡한 왼팔을 들라고 말하니 그는 나를 빤히 보기만 한다. ‘네가 내 팔을 들어라’, 그런 표정이다. 하의를 갈아입히는 건 아예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보다 못한 옆 환자 아리선 씨의 간병 로봇 로이가 다가왔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 새끼” 하고 소리치며 팔을 휘두른다. 병실 내 다른 환자들은 무뢰한에게 당하는 간병사 인간과 로봇을 보며 딱한 표정을 짓는다.
결국 바지 갈아입히는 건 포기했다. 괜스레 로이만 봉변을 당했다. 로이를 쳐다 보니 내게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로이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늘 점직한 마음이었으나 막상 로봇 앞에선 왜 미안하단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로이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까. 그때 아리선 씨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로이는 서둘러 물을 따라서 아리선 씨에게 건넸다.
“아버지, 산책이나 가자.”
내 말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까? 아까 옷 갈아입을 땐 꼼짝도 하지 않던 사람이 산책이란 말에 반색한다. 왼팔을 지지대 삼고 엉덩이를 격하게 좌우로 흔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겨울이라 병원 화단은 꽃 하나 없이 마르고 황량했다. 나는 애써 무심하게 물어봤다.
“아버지, 로봇을 왜 그렇게 때리는 거야?”
“로봇 새끼들이 인간에게 하는 짓이 나쁜 짓뿐이잖아!”
아버지는 물색없는 말을 하며 역정을 냈다. 화를 내는 그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서 그를 붙잡아야 했다. 로봇이 하는 짓이 나쁜 짓뿐이라니. 그 로봇에게 당신이 도움받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도 로봇공학자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렇게 로봇이 싫은데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꽃 하나 없는 화단을 계속 맴돌았다.
“어머니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재차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우리는 병원 호수까지 걷다 돌아왔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후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평소보다 길게 산책을 하고 나니 아버지 정신이 아슴아슴해 보였다. 술 취한 사람처럼 로봇이 왜 나쁜지를 횡설수설 설명하더니 이내 곯아떨어졌다.
아버지가 잠든 동안 병원 구경이나 할까 싶었다. 자주 왔지만 그동안 아버지 병실만 들락날락거렸다. 이 건물 지하 1층에는 매점과 구내식당이 있었다. 매점 전광판에는 시즌메뉴가 안내됐다. 팥빙수에 눈이 갔다. 5월부터 9월까진 팥빙수를 취급했다. 여름에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팥빙수를 먹으러 와야지, 다짐했다. 만약 그때도 이 병원을 내가 탈출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지금은 겨울인데.
팥빙수는 원래 좋아하던 음식이 아니었다. 옛 남자친구가 여름이면 거의 매일 먹던 음식이다. 함께 먹다 보니 나도 즐기게 됐다. 이젠 그를 완전히 잊었는데도 여름이면 팥빙수를 먹고 잠시 그를 떠올리곤 한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 층 아래인 지하 2층에 내렸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례식장이 있는 층이다. 그 층은 어두컴컴했다. 처음엔 걷다 보면 불 켜진 곳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걸었지만 시골 병원이라 전기세 절약을 위해 불을 꺼둔 것 같았다. 어두운 복도를 아무리 걸어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이 길이 언제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동반자도 없이 홀로 어두운 길을 걸으려니 두렵고 무서웠다.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저 멀리 크리스마스 전구 같은 작은 불빛이 보였다. 착시인지 실제 불빛인지 긴가민가하며 길을 꺾었다.
불빛은 바깥 출구 안내판이었다. 그제야 안도했다. 생각해보면 둥근 행성 지구에서 길이 끝날 리는 없었다. 어두운 길을 끝내고 싶을 때는 스스로 멈추거나, 계속 걷거나, 혹은 방향을 꺾어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병실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 다리에 말린 침대 시트를 꺼내 올렸다. 그는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내게 말했다.
“유리야.”
유리는 내 어머니, 아버지 부인의 이름이다. 우리를 떠난 사람. 내 얼굴이 그를 꼭 닮았다고 들었다. 나는 말없이 침대 시트를 아버지 가슴께에 덮어 줬다.
그 신호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보였지만 어떤 의미가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상 프로그램에 넣어보곤 한 번 더 놀랐다.
영상 프로그램은 각기 다른 파장을 합쳐서 보여줬다. 같은 시간대 파장을 합쳐 보니 4박자 악보가 그려졌다. 다~다다 다~라리 라~다디 다~다다 다~다다 다~라리 다~디~ 다~~~~.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각기 다른 파장대마다 신호를 보내온 것 같았다. 처음엔 변화가 많은 리듬이나 멜로디가 아니어서 어쩌면 내가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파를 따라 그릴수록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리듬과 멜로디를 가진 음악을 보낸 거란 확신이 들었다.
수십 년 전 전파천문대 직원들은 전자레인지에서 흐르는 전자파를 외계에서 온 신호로 오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처럼 이 신호가 주변에서 발생된 전파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선이 선명하고 파동이 크게 보여야 하는데 이번 건 그렇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잡힌 파동은 아니었다.
파동을 분석할수록 먼 곳에서 온 전파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하게 보였다. 다만 어디에서 온 건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내가 초점을 잘못 맞춰 관측한 곳에서 온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하진 않았다. 내가 잘못 보낸 곳에서 반대로 쏜 신호라면 어차피 수십억 혹은 수백억 광년 먼 곳이라 SF영화처럼 외계인 침공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만약 그렇게 먼 곳에서 온 신호가 맞다면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이를테면 먼 후손에게 보내는 선물, 서로 만날 수 없는 외계 생명체끼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
어떤 의미든 간에 나도 그들에게 뭔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외계 생명체에게는 어떤 선물이 어울릴지 알 수 없었다. 보이저호에 담았던 실물 레코드판 같은 걸 보내봤자 천년 내에 도착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우리가 주고받을 선물은 전파뿐이었다. 어떤 전파가 좋을지 고민했다. 영상화하면 글씨가 되는 전파를 쏠까. 아니면 나도 음악을 보낼까. 아니면 감정을 보낼까. 아버지 심전도 모양처럼 행복할 때 내 심장 파동을 전파로 찍어보내면 어떨까.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내가 그들의 신호를 그저 막연히 악보라고 유추하는 것처럼 그들도 내 신호를 정확히는 못 알아들을 거라는 결론. 그래서 오히려 무엇을 보내든 괜찮을 것 같았다. 정서를 담는 게 더 중요했다. 슈만의 ‘어린이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를 떠올렸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주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서. 우리는 아직도 우주 초창기를 완전히 알지 못하니까.
클래식을 좋아했던 아버지 영향으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 버전을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다. 한 번도 아버지에게 왜 그 곡을 자주 듣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신한다. 그 곡을 들을 때면 아버지와 나는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호로비츠가 고국 러시아를 그리워했듯 우리는 우리를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다른 직원들이 별로 없는 새벽에 전파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전파망원경 수수는 전 세계에서 두 대밖에 없는 수·발신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발신은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돼 있었다. 퇴사를 결심한 상황이라 두려운 건 없었다.
1년 전 이미 발신 기능을 몰래 사용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직후였다. 어머니가 머무를 수 있는 목성 부근 우주선을 향해 전파를 보냈다. 어머니 친구로부터 어머니가 그곳에서 근무할 거라는 귀띔을 받았다. 전쟁 후 패전국 국민이 된 어머니는 지구를 떠났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승전국인 남편 나라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자국 우주선의 로봇공학자로 사는 길을 택했다.
천문대에 있으면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시세계를 향해 쪼그라드는 것도 같다. 관측 때는 천만 분의 1초까지 정확하게 재는 수소 원자시계를 쓴다. 그런가 하면 수수는 수백억 광년 떨어진 곳 우주까지 관측한다.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주의 시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 200년 전쯤 만났다면 두 사람은 전쟁을 모르고 평생 백년해로를 하다 죽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두 존재가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 사랑의 신호를 동시에 주고 받고, 서로 때맞춤을 하여 결혼이나 동거까지 한다는 일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악보에 하나하나 음을 그리듯이 전파를 보냈다. 1mm, 2mm, 3mm, 7mm, 1.3cm. 다른 파장은 모두 멜로디가 됐다. 파장의 세기는 박자가 된다. 2분짜리 트로이메라이를 보내는 데 네 시간이나 걸렸다. 보내는 동안 왜 그렇게 가슴이 떨리던지. 모든 전파를 보낸 후엔 외계 생명체에게 트로이메라이가 어떻게 들릴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그들은 내가 보낸 음악을 무엇으로 해석할까. 다른 시공간을 사는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이 보낸 신호의 다른 부분을 계속 살펴보다가 나는 이것이 언어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했다. 음악이라고 하기엔 너무 멜로디가 단조로우니까 음악 같은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규칙적으로 보였다. 다~다다 다~라리 라~다디 다~다다 다~다다 다~라리 다~디~ 다~~~~. 영어에서 주어는 대개 I를 쓰고, 종결어미는 am을 쓰는 것처럼 반복되는 ‘다~’ 부분은 그들 언어만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선 트로이메라이를 반복적으로 듣겠지. 내가 그들의 신호를 반복해서 듣고 있듯이. 나는 밤이면 그들이 보낸 신호 중에 영상화 프로그램에 돌리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분석하고, 아침과 낮에는 그것을 따라 불렀다. 그 음악 같은 신호를 여러 차례 따라 부르다 보니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할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마지막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소멸하며 보낸 서글프지만 찬란한 신호일지도.’
저녁 식사 전 아버지 시트를 갈아주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신호를 흥얼거렸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그거 죽음과 소녀지? 2악장.”
“뭐가?”
“몰라? 네가 요즘 자주 흥얼거리는 곡. 그거 슈베르트 곡이잖아.”
나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내게 신호를 보낸 존재는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인간이 보낸 전파 메시지였다. 나는 손에 잡은 시트를 털썩 놓았다.
병원 설립기념일이라 저물녘에 특식이 나왔다. 소고기 불고기.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가져다준 식판에 올려진 불고기를 보며 몸을 떨었다.
“이거 로봇이 가져다 줬지? 분명 사람고기일 거다.”
처음엔 아버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식판 옆에 있는 원산지 안내판을 보여주며 호주산 소고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로봇이 인간을 죽이고 고기로 만든 거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무슨 말이야?”
“유리가 여기 못 오는 이유가 뭔지 알아? 로봇이 죽여서야.”
아버지 간병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 증세가 일시적 이상증세라고 여겼다. 간병을 하면서 아버지 정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논리를 잃고 뒤죽박죽돼 있었다.
저녁을 물린 후엔 병실이 꽤 서늘해진 것을 느꼈다. 아버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 이불이 얇았다. 혼잣말을 했다. “이불을 하나 더 덮어드려야 하나.” 눈치 빠른 로이가 어느새 새 이불을 들고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아버지가 소리쳤다.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새 눈을 뜬 것이다.
“저리 가, 이 고철 새끼야.”
근육이 다 빠져 고무처럼 된 팔과 다리로 그는 로이를 향해 휘휘 휘둘러댔다. 그의 태도에 로이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누가 고철 새낀데? 고철은 다 죽어가는 아버지지.”
한 시간 뒤에도 우리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그가 화장실 가는 걸 도와준 후 나는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어딘가에서 화를 식히고 싶었다. 종일 아버지 곁에 있느라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어떤 인간에게 받은 슈베르트 신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금방 와라. 내가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른다.”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차갑게 말했다.
“좋지. 그렇게 되면 로봇도 못 때리겠네.”
말을 하고 난 후 심한 것 같아 아버지를 보니 그의 눈에 서운함이 가득하다. 어쩔 수 없었다.
어두운 병원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하늘정원’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옥상에는 방문객을 위한 의자와 테이블이 두 개씩 있었다. ‘하늘정원’이라는 예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옥상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그곳 한 자리에 앉아 밤하늘을 봤다.
새까맣기만 했다. 밤하늘엔 시리우스 하나가 덩그러니 보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오리온 별자리에 수십 개 별이 죽어가고 있을 텐데. 사람들은 거대 별의 부고도 개미의 죽음도 모르고 살아가지만 나의 수수는 매 순간 우주의 모든 크고 작은 부고에 귀 기울이고 있다.
슈베르트라면, 전 남자친구가 내게 보낸 신호일 것이다. 달 기지로 옮긴 후 헤어진 친구.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는 내가 좋아한 곡이 아니라 그가 좋아한 곡이었다. 베토벤 운명처럼 흔한 곡도, 뚜렷한 멜로디도 아니니 눈치챌 수 없었다.
신호를 보낸 존재가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안 순간 그 음악은 외계의 선물이 아니라 강요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헤어진 지 7년이 다 돼 갔다. 그는 임기를 끝내고 곧 지구로 귀환할 터였다. 달 기지에 새로 지은 천문대. 그곳 망원경 오퍼레이터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그는 7년 전, 20대 중반에 주저 없이 지원했다. 지원 전 내게는 상의조차 하지 않았고 선발된 후에야 통보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온 연락은 반가움도 설렘도 주지 못한다. 간신히 깨끗해진 마음에 흙탕물이 튀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 남자 친구가 아니었을지라도 헤어진 연인은 어느새 내게 원망의 대상이 돼 있었고,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자신에게 복잡한 마음만 들 뿐이다. 그때 왜 헤어졌는지를 따져 물으면,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나였으나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병실에 돌아왔을 때 병실 내 인간과 로봇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들 중 몇몇은 막상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내 시선을 피했고 다른 몇몇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보였다. 옆 침대 환자인 아리선 씨가 도대체 어디를 갔던 거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버지 침대로 향했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10분 전에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켰어요.”
그 말을 하는 로이의 이마에 금이 가 있다. 산소호흡기 착용을 도와준 로봇에다 마지막 힘을 다 쏟아서 때린 모양이다. 역설적으로 그 폭력을 마지막으로 아버진 드디어 폭력을 멈춘 걸로 보였다. 전신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잠시 후 로봇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충전을 하느라 늦어졌단다. 그는 아버지 이름을 여러 차례 부르더니 의식 테스트를 하겠다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얼떨결에 서명했다. 그는 빠른 동작으로 아버지 머리에 칩을 꽂았다.
처음엔 치료를 위한 일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백 개도 넘는 칩이 꽂히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인지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로봇의 만행에도’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이제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의사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쳤다. 그의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있었다. 의식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가 더 크게 불러보라고 말했다. 나는 고함쳤다. 반응이 없었다. “혹시 아버지가 죽은 건가요?” 내 말에 의사는 아니라며 심전도를 보여주었다. 요동이 반복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 손을 잡아보라고 말했다. 손을 잡자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감전된 것 같았다. 말도 못하고, 눈도 풀린 아버지였지만 손으로 대신 의사를 전하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고. ‘네 아버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손이 아직 따뜻했다.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소리가 날만한 곳은 없었다. 그때 아버지 침대 앞으로 푸른 하늘과 바다가 펼쳐졌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 다행이네요. 아직 의식이 있어요.”
로봇 의사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홀로그램 이미지였다. 아버지 뇌에 꽂힌 무수한 칩이 아버지 의식에 있는 영상을 통합해 만드는 것 같았다. 그 영상은 발쪽 침대 가드에 설치된 초고해상도 화면을 투과해 홀로그램으로 보였다.
“아버지가 겉보기엔 의식을 잃었어도 속으론 정신이 있을 수 있거든요. 이걸 하루 한 번 테스트하면서 의식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어요. 아직 의식이 있는 걸로 보이네요.”
내가 보는 병실 풍경이 한순간 푸른 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가 그리는 바다 풍경을 보았다. 바다라니. 의사가 말했다.
“아버지가 바다를 좋아하셨나 봐요. 이미지가 자세하진 않지만 인지기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점점 화질이 선명해졌다. 그러더니 파도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나는 아버지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여전히 눈에 초점 하나 없이 입을 벌리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누워 있었다.
“이상해요. 아버지는 지금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여요. 그리고 산을 좋아하던 사람이에요. 주말이면 저를 떼어놓고 홀로 등산을 다녀올 정도였어요.”
“아버지 의식에선 산을 부르짖었지만, 무의식에선 바다가 더 좋았을지도 몰라요.”
“그럼 이것은 아버지 무의식인가요? 아버진 지금 꿈을 꾸고 있나요?”
“무의식은 또 다른 의식이죠. 뇌파로 봐서는, 아버지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거나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의식도 무의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바다를 상상하고 있다니. 의사 말이 농담 같았다. “아버지, 일어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의사가 그만하라며 나를 제지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다섯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내가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는 그대로였다. 잠이 든 건지 의식이 없어진 건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깨우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가 이대로 죽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새벽녘, 아버지가 눈을 떴다. 내 인기척 때문일까, 시선 때문일까, 기도 때문일까. 그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신이 들어?” 내 물음에 그는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나는 그 순간 아버지가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려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했다. 아버지 손을 꼭 잡았다. 그는 그런 내 손등을 두드렸다. 손가락 하나 하나가 움직였다. 엄지 두 번 검지 한 번 중지 두 번. 이렇게 내 손등을 두드렸다. 마치 신호를 보내듯. 나는 우리끼리 사전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수신호를 설정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그가 내 손등에 보낸 움직임은 나를 아낀다는 말을 담은 신호라고. 그 신호 후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병실 온도가 내겐 더워서 병원 복도 벤치에 있다 고개를 돌렸다. 씩씩한 구두굽 소리 때문이었다. 멀리서 한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성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놀랐다. 아버지가 찾던 유리, 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놀랐다. 그가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보다 겨우 서너 살 많은 나이로 보였고, 나와 비슷하게, 아니 거의 똑같이 생겼다. 마치 도플갱어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그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나를 보고는 놀란 표정이다.
“너구나.”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오랜만에 만난 모녀가 할 것 같은 어떤 허그도, 악수도, 미소도 없었다. 얼떨떨했다.
“엄마가 좀 젊지? 성형수술 해서 젊어진 게 아니야. 우주를 떠돌아다녀서 늙지를 못 했어.”
그는 마치 자신의 동안이 죄인 것처럼 조금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젊은 그의 얼굴이 부럽거나 이상하다기보다는 연민이 들었다. 어머니는 근 30년 동안 한 번도 땅에 정착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어머니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어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 늙지 않은 한 여성을 보고는 이해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이 땅에, 이 삶에 한 번도 정착하지 못했다. 전쟁 후 그의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떠돌이 삶을 살아온 나의 모성, 어머니별의 생을 관측한 것만 같았다. 나는 그를 병실로 안내했다.
어머니와 내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일제히 우리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는 차도가 없는 상태였다. 몇 시간 전에는 잠시 눈을 떴지만 지금은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늦었다.
“아버지, 어머니 왔어요. 유리요, 유리!”
아버지 손을 잡고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풀어진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눈꺼풀을 올리니 여전히 초점 하나 없는 눈이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네가 신호를 보낸 거 아니야? 우주선 동료가 신호를 받고 내게 연락을 줬어. 아무래도 내 이름 같다고. 나를 찾는 것 같다고.”
나는 그 신호가 갔을 줄은, 누군가 수신을 하고 해석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전파 받고 바로 온 거야. 여기 시간으론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어.”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내가 한 번 더 소리쳤지만 아버지 눈꺼풀은 굳게 닫혔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손이 닿자 아버지 손가락이 부르르 요동쳤다.
그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오디오를 켜둔 걸까 싶어서 주변을 살폈다. 뒤돌아봤을 때 우리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백자처럼 투명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눈부신 백사장이 보였다. 이게 뭐지? 내가 외쳤다. 어머니가 말했다.
“30년 전 우리야. 너희 아빠와 나.”
아버지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촛불을 태우는 것 같았다. 홀로그램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저 멀리 방파제를 걷는 젊은 남녀가 보였다. 하늘에서 원근으로 보여지던 이미지가 마치 줌을 당기듯 인물의 얼굴까지 확대해서 잡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나타났다. 우리의 병실은 30년 전 그들이 데이트를 하던 바닷가로 변했다.
“우리 만약 전쟁이 발발해 헤어지게 되면 어디서 만날까?”
어머니 목소리였다.
“전쟁이 왜 나? 그리고 왜 우리가 헤어져?”
“당신 나라와 내 나라는 사이가 안 좋으니까.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면 건물은 무너져도 해안선이나 자연환경은 그대로지 않을까? 여기 방파제 자리에서 만나면 돼.”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안 나타나면 24시간 계속 기다릴 거야?” 어머니가 물었다.
“응, 계속 기다릴 거야.”
“그러지 말고 만약 헤어지게 되면 토요일 정오에 여기 앞에서 보는 걸로 하자. 주말이면 이곳에 당신 만나러 올게.”
그리고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 홀로 남았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다시 남자가 홀로 서 있었다. 거의 같은 이미지로 보이는 장면이 반복된다. 남자 앞에 어린 딸을 둔 가족이 지나갔다. 남자는 홀로 서 있었다. 또 다시 남자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이번엔 남자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가 흩날렸다. 태풍이 다가오던 날에도 남자는 방파제만 바라보았다.
파도소리가 거칠다. 방파제 근처에선 해안 관광지 개발이 시작됐다. 남자는 공사에 개의치 않고 서 있었다. 방파제 주변에 건물이 들어설 때에도, 해안도로가 확장되던 날에도 서 있었다. 방파제가 무너지던 날 남자는 휘청이며 서 있었다. 16차선 해안도로가 개통된 날에도 그는 서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레이어가 덧입혀지듯 반복됐다. 남자가 늘 입던 등산복은 낡아갔다.
파도는 반복돼 다가온다. 남자의 머리는 어느새 희끗해졌다. 남자는 사라진 방파제 자리 터에 서 있다. 남자 뒤로 16차선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진다.
돌아보니 아버지가 눈을 뜨고 있다. 아버지, 소리치니 눈을 뻐끔거린다. 그러나 힘이 없는지 곧장 감긴다. 아버지, 한 번 더 크게 외쳤다. 이번엔 두 번 깜빡거린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는 순간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 아버지, 여보, 여보. 우리의 외침에도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그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아서 그의 상체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아버지 곁에 심전도만이 오르락내리락 요동쳤다. 아직 살아있다고. 거의 죽어가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고. 아버지의 홀로그램은 사라지고 파도치는 소리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