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 생산업체 테슬라부터 국내 최대 게임 기업 중 하나인 넥슨까지. 최근 국내외 유수 기업들이 거액의 자금을 넣은 곳이 있다. 가상자산(암호화폐)이다. 암호화폐는 기업의 중요 투자처이자 미래 화폐 후보로 주목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의 원본성을 보장하는 용도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화폐로서의 가치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고, ‘채굴’이라는 디지털 검증 과정이 환경 문제를 유발하며 보안이나 프라이버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일각에서는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암호화폐 기술의 발전에 낙관적이다.
111원.
2010년 비트코인의 거래 가격이다. 비트코인은 2008년 나카모토 사토시라 불리는 사람이 개발한 디지털 화폐이자, 시중에서 상용화돼 쓰인 첫 가상자산(암호화폐)이다. 현재는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암호화폐 9000여 개의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했다.
물 한 병도 살 수 없는 가격이지만, 비트코인은 개발 뒤 약 1년 동안 ‘0원 굴욕’을 맛보고 있었기에 이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폐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극히 일부 사람들만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4년 뒤인 2013년 4월, 비트코인의 가격은 두 달 사이에 657% 급등하며 26만 원을 넘어섰다. 당시 키프로스 금융위기 사태로 은행 예금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비트코인이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가치가 뛰어올랐다. 비트코인의 소스 코드를 응용한 새로운 암호화폐도 우후죽순 등장했다. 라이트코인을 필두로 이더리움 등 다양한 알트코인이 개발됐다. 알트코인은 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암호화폐를 뜻한다.
암호화폐 거래소도 만들어졌다. 비트코인의 토대가 된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도 커졌다. 세금을 부여하는 등 각국 정부의 규제가 생겨났고 거래소 해킹 사건이 수차례 발생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암호화폐는 꾸준히 시장 규모를 확대하면서 성장했다.
익명성, 유일성, 보안성… 암호화폐를 택한 이유
암호화폐를 거래하는 지갑을 생성할 때는 시중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요구하는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 정보가 필요없다. 이 때문에 익명성이 보장될 수 있고, 별다른 신용도 없이 전 세계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이동한 기록인 거래기록만 공개된다.
특히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토대로 만든 암호화폐다. 블록체인은 거래기록이 담긴 여러 개의 블록을 체인처럼 연결한 기술로, 각 블록에는 거래기록이 포함된 장부가 암호화된 상태로 들어있다.
블록체인은 장부가 여러 블록에 흩어져 있고 이 장부가 거래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어 보안이 뛰어나다. 소유권을 바꾸려면 변경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장부의 정보를 수정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위조, 복제, 파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음료를 블록체인으로 판매할 경우, 생산 뒤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재료 생산공장, 식품 제조공장, 도매업체, 소매업체 등 다양한 주체를 거쳐야 한다. 각 과정에서 관련된 정보가 블록에 흩어져 기록된다. 음료를 많이 판매할수록, 관련 업체가 늘어날수록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기록해야 할 정보의 양은 늘어난다. 시스템도 복잡해진다. 이들을 모두 위, 변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위조와 변조가 거의 불가능하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특성 덕분에 블록체인 기술은 예술계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으로 미술품을 판매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3월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사인 크리스티에서 작가 비플이 NFT를 활용한 작품 ‘매일: 첫 5000일’이 약 785억 원에 낙찰돼 관심이 커졌다.
NFT 작품은 그림, 영상, 노래 등을 디지털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로 만든 토큰을 달아놓은 것이다. 한국 사람 모두가 고유의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있듯이, 고유한 물건 하나에 고유의 꼬리표를 달아놓는 일종의 원본 인증서인 셈이다.
올해 3월부터 20여 점의 NFT 작품을 판매한 김현진 작가는 “작가 입장에서 NFT 작품 제작의 장점은 ‘디지털 노마드’처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 어디서든 작업하고 판매할 수 있는 점”이라며 “특히 작가들이 캔버스를 넘어 디지털 영상으로 작업해 판매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에는 이세돌이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를 무너뜨린 대국의 복기 내용이 NFT로 경매에 붙었는데, 약 2억 5000만 원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달 세계적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는 처음으로 미술작품 경매에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결제수단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래피티아티스트 뱅크시의 ‘러브이즈인디에어(Love is in the Air)’를 경매에 붙여 146억 1054만 원에 판매했다.
비트코인 채굴, 환경에는?
최근 암호화폐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이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채굴’이라 부르는 연산에 에너지가 소비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비판과 보안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는 중앙은행과 같은 관리 기관이 없어 거래기록이 전 세계 네트워크에 분산돼 저장된다. 이를 위해서는 블록을 계속 생성해야 하므로, 블록을 만드는 사람에게 보상을 줘서 블록체인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비트코인의 경우 각 블록에 16진수로 암호화된 64자리 해시(함수를 이용해 고유값을 일정한 길이의 데이터로 변환한 것)를 풀어내는 사람들이 보상을 나눠갖는다. 이처럼 암호화폐의 거래기록이 담긴 블록을 생성하고, 그 대가로 암호화폐를 얻는 과정을 채굴이라 부른다. 채굴은 블록체인 검증에 참여해 대가를 얻는 행위인 셈이다.
비트코인 개발 초기에 보상으로 지급되는 비트코인은 50개였다. 그러나 2013년부터 4년 단위로 반감기를 적용해 4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든다. 컴퓨터 기술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속도를 맞춰나가기 위해 반감기를 쓴 것이다. 그 결과 2100만 개로 발행량이 정해져 있는 비트코인은 총 64번의 반감기를 이용해 채굴 속도를 늦추고 희소성을 갖는다. 현재 채굴을 하면 6.25개의 비트코인을 받을 수 있다. 흔히 암호화폐는 4년 주기로 등락 변동이 크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채굴에 쓰이는 비용은 컴퓨터의 가동 시간과 전기료다. 고성능의 컴퓨터를 가동하는 만큼 전기료가 들어 경쟁 상대가 많은 비트코인의 경우는 막상 채굴이 쉽지 않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안 금융센터(CCAF)가 2019년 9월부터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국가별 월평균 채굴량은 중국이 65.08%로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 러시아, 카자흐스탄이 각각 7.24%, 6.9%, 6.17%로 뒤를 따랐다.
채굴이 중국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 이유는 이제껏 중국 내 채굴에 관한 규제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료 덕분이었다. CCAF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데 소모하는 전력은 연간 110TWh(테라와트시)로 스웨덴 전체의 한 해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수치다.
비트코인이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비판도 여기에서 나온다. 중국 베이징 중국과학원(CAS), 베이징대 등 공동연구팀이 4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유지될 경우 2024년에는 비트코인으로 인한 중국 내 연간 에너지 소비량이 296.59TWh로 정점에 도달하게 되고, 탄소 배출량은 1억 3050만 t(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내 비트코인 산업을 다른 국가 전체와 비교하면,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1~2위, 탄소발생량은 36위에 오를 수준이다. doi: 10.1038/s41467-021-22256-3 5월 22일 중국 정부는 채굴에 대한 규제와 단속을 강화할 것으로 밝혔다.
하지만 기존 금융 결제 시스템의 에너지 소비가 더 크다는 반론도 있다. 독일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는 글로벌 금융사 비자(VISA) 결제시스템과 거래당 평균 전력소비량을 비교했는데, 비트코인(148.63kWh)은 비자(12000.85kWh)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해킹에 대응할 새로운 암호
지난 6월 8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미국 송유관 회사를 랜섬웨어 공격해 해킹한 범인의 암호화폐 지갑 비밀번호를 풀어 수십억 원어치 비트코인을 회수했다. 이에 따라 보안성과 익명성이 장점으로 꼽혔던 암호화폐 역시 보안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을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이는 암호화폐를 보관하던 지갑을 해킹한 것으로 암호화폐 시스템 자체의 보안성은 여전히 해킹이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많다. 지갑은 비밀키가 유출되거나 비밀번호만 알아내면 해킹할 수 있다. 반면 암호화폐 시스템은 여러 블록의 장부에 기록이 흩어져 보관돼 있어 조작이 어렵다. 암호화된 해시를 풀어야 채굴이 가능하기에 화폐 발행 수량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다.
미래에 양자컴퓨터가 개발될 경우 암호화폐 시스템의 보안성이 위협받을 우려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양자컴퓨터가 비트코인 블록의 해시를 해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컴퓨터는 이론상 1초에 10의 100승만큼 계산을 할 수 있는데, 이런 놀라운 연산 능력이 뒷받침될 경우 복잡한 인수분해를 푸는 문제를 이용해 정보를 암호화하는 기존의 공개키 암호 기술은 쉽게 뚫릴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암호화폐와 관련해서는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는 “(양자컴퓨터 상용화 등으로) 현재 시스템에 보안 문제가 생길 때쯤이면 암호화폐는 더 진보된 암호화 기술로 안전성을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광희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디지털보안산업본부장 역시 “양자컴퓨터에 대응하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이미 시작한 상태”라고 말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현재의 암호를 대체할 유력한 대안으로 양자내성암호를 꼽는다. ‘NP-하드’와 같은 어려운 수학 문제에 기반해 양자컴퓨터 공격에도 안전하다고 알려진 공개키 암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