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과동키즈] 어린 날에 바라보던 저 달은 여전한데

 

▲ 한때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던 조준호 씨는 작사와 작곡을 하고 퍼커션과 우쿠렐레를 연주하는 음악가가 됐다.

 

수능 날은 다른 날보다 유독 춥다는 속설이 있다. 어디선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깜깜한 밤,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하나같이 설렘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빨간색 셀로판지로 감싼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장난을 친다. 곧이어 도착한 선생님은 어둠이 내려 앉은 밤과 달리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차근차근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1998년 11월 18일, 수능 전날 밤의 일이었다.


사자자리 근처에서 시간당 1000개 가까운 유성우가 떨어질 거라던 밤이었다. 나를 포함한 천체관측부원 모두 어쩌면 일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를 우주쇼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말그대로 ‘비오듯’ 쏟아지는 유성우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황홀했다.


수능을 보지 않는 학년이었던 우리는 부모님을 설득해 새벽 내내 유성우를 보기로 했다. 운명같이 느껴졌다. 유성우가 가장 많이 떨어진다는 자정을 기다리며 선생님으로부터 천체망원경 사용법도 배우고 별자리도 찾아봤다. 마치 무언가가 된 것만 같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날의 우주쇼는 며칠 전부터 상상한 우주쇼와 전혀 달랐다. 나는 유성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서너 개의 가느다란 빛줄기를 봤는데, 그게 유성우의 전부였다.


기다린 시간이 길었던 만큼 우리의 표정은 감출 수 없이 굳어갔다. 우리보다 더 기대하며 많은 것을 준비했을 선생님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도 그날 밤의 추위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수능 한파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나는 사자자리 유성우를 기다리던 밤이 생각나 잠깐 몸을 부르르 떤다.

 

 

졸업장에 전공 대신 동아리 이름을 넣고 싶다


과학고 진학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사춘기가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 적는 칸에 ‘물리학자’밖에 써 본 적이 없던 나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한껏 예민해졌다. 반발심에 문과를 선택했지만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막막했다. 오랫동안 정기구독하던 과학동아를 해지했던 것도 그쯤이었다.


인생의 선택지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고 있는 지금에야 귀엽게 느껴지지만, 그 당시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로지 한 방향만 바라보고 내달렸지만 끝내 실패를 맛봤다. 그 경험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해봤음을 다행스럽게 느낄 정도로, 당시의 나는 진지했다. 덕분에 세상을 대하는 나의 맷집이 커졌다.


방황은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졌다.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깊이 빠져들었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연히 미디(MIDI) 동아리 ‘M.u.S.E’에 가입했는데, 프로그램만으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선배들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선배들에게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동아리방에서 습작을 했다. 입학 후 한 번도 가지 않던 도서관도 찾았다. 곡을 쓰다 모르는 부분이 생겨 화성학 이론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궁금한 게 해결됐을 때 느끼는 희열을 그제야 처음 맛봤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궁금해한 것도, 이렇게 열심히 그것을 해결한 것도 처음이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열정을 키워준 곳이 동아리였기에, 가능하다면 대학 졸업장에 전공이 아닌 동아리 이름을 적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좋아서 하는 일들 사이로 찾아온 슬럼프


졸업하고서도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자작곡이 어느 정도 모였을 즈음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거리공연을 시작했다.


조금씩 팬이 모였고 앨범을 녹음해 보라며 미리 돈을 모아 주기도 했다. 그 돈으로 녹음한 첫 미니앨범(EP)은 8000장이 넘게 팔렸다. 좋은 시작이었다. 앨범을 판매한 돈으로 다음 앨범, 다음 앨범을 계속해서 발표해 나갔다. 낡은 승합차 한 대를 중고로 구매해 초대받지도 않은 지역 축제를 무작정 찾아다니며 거리공연을 이어 나갔다.


과정을 간직하고 싶어 아는 형에게 영상을 부탁했다. 형은 며칠 따라다니더니 우리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고 싶다고 했다. 완성된 다큐멘터리 ‘좋아서 만든 영화’는 2009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그 덕에 우리는 레드카펫도 밟아 보고 전국 방송에도 출연했다. 우리 밴드는 같은 해에 한국대중음악축제의 헬로루키로도 선정됐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거의 매일 새로운 일들이 벌어졌다. 눈을 뜨면 하고 싶은 일과 만들고 싶은 노래의 아이디어가 넘쳐나서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메모장을 사야 했다.


서서히 나에게 다가온 슬럼프를 새로운 일들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다. 슬럼프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노래를 못 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내 마음은 조급해졌다. 가사 한 줄 못 적고 잠드는 날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버리는 하루였다. 


마음먹은 대로 다 해낼 수 있는 내가 아니게 된 순간, 맥이 풀리던 그 기분을 설명할 글자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까지했다. 나와 함께 음악을 시작했던 많은 친구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음악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포스터로 만난 ‘비처럼 쏟아지는 별’


한동안은 주어진 하루를 살아 내는 데만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체사진 잘 찍는 방법’이라고 쓰인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별, 유성우였다. 오래전 추위에 떨며 바라보던 밤하늘의 풍경이 떠올랐다. 카메라도 없었지만 홀리듯 강좌를 신청했다. 천체사진으로 유명하다는 강좌의 선생님은 본인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수업을 시작했다. 찬란히 반짝이는 별들이 사진 속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별 사진을 찍기 위해 꼭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가장 어두운 장소를 찾아가세요. 어떤 별빛은 너무 약해서 우리 눈으로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렌즈를 열고 오랜 시간 기다리다 보면 그 작은 별빛이 필름 위에 조금씩 쌓여서 나중에 현상해 보면 작은 점 하나로 남는 거죠. 그 점들이 모여서 이렇게 화려한 천체사진이 된답니다.”


선생님은 사진 찍는 기술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별빛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내 하루하루가 마치 보이지 않는 별빛 같았다. 그런 하루들도 오랜 시간 쌓이다가 먼 훗날 되돌아보면 예쁜 사진 한 장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하나, 둘 문장으로 정리됐고 어느새 ‘천체사진’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되었다. 내 인생 가장 길고 지루했던 슬럼프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음악가라는 직업을 지켜 준 이 노래는 아직도 내게 특별하다.


어린 시절 우주는 내게 상상력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했던 그 당시의 나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우주만을 대상으로 하던 내 호기심은 이제 내 주변을 향하고 있다. 그 호기심이 문장이 되고 노래가 돼 당신에게 간다. 

 

2021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조준호(Zozno)
  • 에디터

    박영경 기자 기자

🎓️ 진로 추천

  • 천문학
  • 음악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