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컴퓨팅 효율 러닝 연구실. 바닥에 놓여있던 손바닥만 한 로봇이 연구원의 손을 쫓아 스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율주행 로봇이었다. 작은 크기의 로봇에서 복잡한 자율주행을 구현한 비결을 묻자 김예성 정보통신융합전공 교수는 “뇌인지과학과 수학을 인공지능(AI)에 접목했다”며 “덕분에 기존보다 연산 과정이 단순해져 큰 장치 없이도 수준 높은 AI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데이터를 수학으로, 초차원 컴퓨팅
인간의 뇌는 신경세포 사이로 촘촘하게 구성된 약 100조 개의 시냅스를 기반으로 대규모 병렬 연산을 한다. 덕분에 뇌는 현재까지 개발된 그 어떤 AI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1980년대 뇌인지과학자들은 이러한 인간 뇌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내놨다. 그중 하나가 뇌의 기억 방법을 수학적 모델로 해석하는 축약 분산 기억(sparse distributed memory) 이론이다. 축약 분산 기억은 인간의 장기 기억 신호가 고차원형태의 2진법 신호로 축약돼 동시에 여러 시냅스에 분산돼 처리된다는 내용이다.
2010년대 들어 AI 과학자들은 이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수학 모델을 활용한 새로운 기계학습 모델을 개발했다. ‘초차원 컴퓨팅(hyperdimensional computing)’이라는 모델이다.
초차원 컴퓨팅은 인간의 뇌를 모사한 또다른 모델인 딥러닝 방식인 인공신경망(ANN)과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방식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고양이 이미지 데이터를 초차원 컴퓨팅 방식으로 학습한다고 해보자.
ANN은 이 이미지 데이터를 그대로 이용해 학습하지만, 초차원 컴퓨팅에서는 이미지에 담긴 고양이의 색상, 모습 등 정보를 1과 –1로 표현되는 1만 차원 이상의 고차원 이진 벡터로 전환한 뒤 학습한다.
언뜻 보면 이미지를 벡터로 만드는 과정이 한 단계 추가돼 느릴 것 같지만, 오히려 속도와 효율성이 높아진다. 고차원 벡터값은 더하거나 곱하는 등 간단한 연산으로 손쉽게 학습할 수 있어 ANN보다 연산량이 작기 때문이다.
더구나 벡터는 병렬 연산에 유리한 특성이 있다. 동시에 다양한 데이터를 다룰 수 있어 학습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김 교수는 “AI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학습 데이터가 많아지는 만큼 병렬학습 방식의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물인터넷으로 편리한 사회 만들고파
기존에는 AI 기술을 응용한 사물인터넷을 구현하기 위해 거대한 장치를 활용하거나 연산을 위한 별도의 서버와 통신을 써야 했다.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많은 전력과 연산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물인터넷 환경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장치가 보다 작아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초차원 컴퓨팅 같은 빠르고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기술이 필수적이다.
초차원 컴퓨팅은 AI 장비를 소형화하는 데 유리하다. 예를 들어 사물인터넷에 AI를 결합시키거나, 생체신호를 분석해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AI 헬스케어 기기의 크기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소형 사물인터넷이 발달하면 첨단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져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AI 헬스케어 역시 개인별 맞춤 의료서비스를 언제, 어디에서나 받을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상용화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도 있다. 같은 데이터라도 적절한 형태의 벡터로 변환하지 못할 경우 정확성이 크게 떨어진다.
김 교수는 “현재까지 텍스트 데이터는 학습속도를 수십~수백 배 높이고, 정확도도 다른 방법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에 올랐다”며 “다만 이미지 데이터의 학습 정확도는 5% 정도 격차가 있고, 음성 데이터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김 교수팀은 이미지 데이터의 학습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메모리 기반 연산방식을 개발했다. 기존에는 많은 연산을 위해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활용해야 했다. 김 교수는 초차원 컴퓨팅에 기반해 메모리만으로 다량의 데이터를 학습하는 방식을 개발해 소프트웨어 분야 최우수 국제학술대회인 ‘마이크로(MICRO)’에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초차원 컴퓨팅은 현재 AI 분야의 주류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풍부한 게 장점”이라며 “누구나 기술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