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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자를 만나서 자연과학의 어떤 분야가 가장 공부하기 어려웠는가라고 한번 물어보자. 그러면 거의 틀림없이 생물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물리학을 가장 골치 아픈 분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두 분야는 사고하는 방식이나 연구의 대상 그리고 탐구의 과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물리학과 생물학을 동시에 좋아하거나 또는 양쪽의 전문지식을 겸비한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또다른 '두 문화'의 만남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거대한 문화적 단절은 이미 스노(C. P. Snow)의 ‘두 문화’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과학 내에서의 간극 또한 만만치 않은 문제다. 그 중에서도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학문적 간극은 특히 두드러진다. 양자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사람인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이 두 자연과학 사이의 만남을 시도했다.

흔히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20세기 과학고전으로 손꼽히는 이 책은 슈뢰딩거가 아일랜드(당시의 에이레) 더블린 고등학술연구소의 후원으로 1943년 2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행한 몇 차례의 강연 원고를 토대로 저술한 것이다.

책의 원제는 ‘What is Life? The Physical Aspect of the Living Cell’로서 1944년 처음으로 영어판이 출판됐으며, 이후 독일어·불어·러시아어·스페인어·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전세계의 독자들에게 읽혀졌다. 그리고 1967년 이후 그의 또다른 글 ‘정신과 물질’(Mind and Matter)이 여기에 첨가돼 통합본으로 출판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판의 내용과 이에 대한 과학사학자의 비평이 첨가돼 ‘생명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 생명현상’(서인석·황상익 옮김, 1992년)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된 바 있다.

2백쪽을 넘지 않는 작은 분량의 이 책자는 총 7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장은 생명에 대한 고전물리학적 접근, 유전메커니즘, 돌연변이, 양자역학적 증거, 델브뤽의 모델, 생명체에서의 엔트로피, 물리학 법칙과 생명현상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비전문가인 물리학자가 감히 생명의 문제에 대해 주장을 펴게 된다는 점에 대한 양해와 사과로부터 시작된다. 전공을 뛰어넘는 타 분야에 대한 간섭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한 조심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파동역학을 창안한 대 물리학자인 슈뢰딩거는 세포, 유전, 돌연변이, 유기체의 생존 등과 같은 생명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 양자역학적 해석을 내리고 있다.

통계역학을 생명현상에 적용

이 책은 아마도 생물학에 대해 물리학자가 쓴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책일 것이다.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졌지만 결코 읽기에 간단치 않은, 짧지만 결코 폭이 좁지 않은 그런 책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지적 지평은 그 어느 책보다 광대하다.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는 크게, (1)생명은 스스로의 구조를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저항하는가 (2)생명체의 유전물질은 어떻게 불변인 채로 유지되는가 (3)유전물질은 어떻게, 그리고 충실하게 그 자체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 (4)의식과 자유의지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생명체의 현상에 대해 당시의 물리법칙으로는 그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자성체, 브라운 운동과 확산, 정밀측정 문제 등의 비유를 통해서 슈뢰딩거가 예시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은 원자 수준에서는 불확실하지만 통계역학을 적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가 되면 안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설명은 생명 현상에 대한 적용의 타당성을 떠나서 매우 흥미 있다. 미시 수준으로 갈수록 개별 입자들은 주변의 열운동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지만, 대상물의 규모가 커지면 이런 열운동의 영향은 통계적으로 상쇄되고, 이 때문에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양자역학적 해석

하지만 그는 이런 통계적 접근은, 생명 단위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은 유전자 등에는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양자도약과 같은 양자역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설명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특히 그는 돌연변이와 유전자의 안정성 문제를 양자역학의 에너지 준위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생명체가 안정성, 즉 자체의 질서도를 유지하는 것은 환경으로부터 소위 음(陰) 엔트로피를 흡수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즉 죽음이라는 (최대의 엔트로피를 갖는) 열역학적 평형 상태로 이행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유기체는 자신의 높은 질서도 수준을 (즉 낮은 엔트로피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 속의 유기화합물 속에 들어 있는 질서를 이용하며, 이를 다시 상당히 대사된 형태(즉 좀더 높은 엔트로피의 형태)로 자연계에 방출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슈뢰딩거의 설명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부정확하고 잘못된 요소들이 상당히 포함돼 있다고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슈뢰딩거의 책은 당시나 지금이나 위대한 고전으로 남아 있으며, 이후의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활발한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통해 생명의 문제를 다시 바라봤으며, 홀데인(J. B. S. Haldane)과 크릭(Francis Crick) 등과 같은 위대한 생물학자들은 이 책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파동물리학 시대를 연 양자역학의 개척자


 파동물리학 시대를 연 양자역학의 개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성공한 린넨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 아래 그는 이탈리아의 회화나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식물 계통발생에 대한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김나지움에서 공부할 당시 그는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으며, 라틴어나 그리스어의 고전에도 흥미가 있어서 고전문법의 정밀한 이론을 즐겼다.

슈뢰딩거는 1906년 빈대학에 입학하고, 대학 시절 볼츠만의 통계역학에 심취했다. 1910년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다음해 같은 대학의 물리학과 실험조수가 됐으며, 1921년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의 교수가 돼 6년간 그곳에서 근무했다. 슈뢰딩거는 현의 진동방정식에서부터 출발해 드브로이(de Broglie)의 물질파 개념을 적용해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방정식을 발전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1933년 영국의 디랙(P. Dirac)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받은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슈뢰딩거는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됐다. 심한 향수병에 시달리다가 1936년 고국의 그라츠대학으로 옮겼으나,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또다시 망명길에 올라 미국의 프린스턴대학 그리고 나중에 더블린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더블린고등연구소를 거쳐 동 연구소장으로 1955년까지 종사했다. 더블린에서 지냈던 이 무렵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집필하였다.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1956년 자신의 모교 빈대학으로 돌아왔지만, 곧 병을 얻고 1961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책 이외에도, ‘자연과 그리스인’(Nature and the Greeks, 1954)과 ‘나의 세계관’(Mein Weltansicht, 1961)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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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송진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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