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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동키즈] 오랜 응시 끝에 종이에 피워낸 보편적인 꽃 한송이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집 뒤엔 관악산이 있었다. 아버지는 유치원에 다니는 나를 데리고 주말마다 산에 올랐다. 무작정 따라나섰지만, 산의 냄새와 다양한 나무를 만나는 건 내게 굉장히 신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식물을 자주 보며 자란 내가 고등학생이 돼 원예학과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학교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은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원예학이냐”라며 말렸다. “농사지으려고?” 이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농사를 우습게 보는 시선도, 원예학이라는 학문에서 농사만을 떠올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유일하게 나를 응원했다. “평생 식물만 보고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라면서. 지나가면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식물을 공부하고 싶어서 원예학과에 진학한다고 말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겐 믿음이 있었다. 과학 기술이 매우 발달해 이제 더 발전할 수 없을 만큼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내가 60대의 중년이 되고 각종 개발로 공기 오염, 식량 부족 같은 문제가 제기될 즈음엔 사람들이 식물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화려함의 시대 이후 미니멀리즘이 도래했듯 미래에는 다들 자연으로 회귀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 말이다.


그 시기는 훨씬 빨리 찾아왔다. 나는 아직 30대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벌써 식물을 들여다 본다.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내에 공기 정화 식물을 두고, 안전한 먹거리를 얻기 위해 텃밭을 일군다.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식물 관련 전공자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운명처럼 만난 식물세밀화가의 길


원예학은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예학 수업에서는 숲에 사는 식물이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내용을 배웠다. 식물의 형태와 생리, 생태, 분류, 육종, 번식부터 화훼, 과수, 채소, 허브학 그리고 토양, 시설, 비료까지 배우는 내용의 범위는 굉장히 방대했다.


그중 3학년 수목학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한 학기 동안 교정의 나무를 관찰해 그림으로 그려 도감을 만들라는 과제를 냈다. 개나리, 진달래, 느티나무, 계수나무와 학교 뒷산의 서어나무까지 나는 약 50여 종의 나무를 관찰해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도감을 만들었다. 교수님은 내 그림을 보고는 그림을 잘 그린다며 식물세밀화를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길로 나는 식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선생님을 찾아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막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수업이 재밌었고, 식물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았다. 그림 선생님과 학교 교수님이 내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칭찬해 주는 것도 좋았다. 그림을 배운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때는 포트폴리오가 제법 늘어났다. 훌쩍 늘어난 포트폴리오를 보니,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국내에 식물세밀화가로 일할 수 있는 곳은 손에 꼽혔다. 오직 국립수목원만이 식물세밀화가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국립수목원은 국내 대표적인 식물연구기관이자 처음으로 식물세밀화 연구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식물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식물세밀화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쳐 20여 년 전부터 식물세밀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했고 식물세밀화가를 양성했다. 국내 식물세밀화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실무를 배우고, 국내 식물세밀화의 현황을 알고 싶었다. 2009년 겨울, 나는 국립수목원에서 낸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이곳에서 식물세밀화가로 일하게 됐다.

 

첫 임무는 뜻밖에도 등산


“산 잘 타요?” 수목원에 들어가서 처음 받은 질문이다. 식물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산 잘 타냐는 질문부터 하다니. 게다가 수목원에 입사해 내가 처음 받은 물건은 펜과 종이가 아닌 등산화와 등산복이었다. 의아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수목원에서 식물을 그리면서 비로소 모든 것이 이해됐다.


식물을 그리려면 식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산으로, 들로, 식물원으로. 한국에 없는 종이라면 외국으로도 간다. 식물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식물 생체가 필요하고, 이 생체를 구하는 건 식물세밀화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식물세밀화는 식물 종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식물을 식별토록 하는 기록물이다. 식물도감속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개체가 아닌 종의 보편적인 특성을 그려내야 하기에 최대한 많은 자생지에서 다양한 개체를 관찰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작업 시간의 대부분은 식물 생체를 준비하는 데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꼬박 1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작 수집된 식물을 책상에 두고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나 이틀만에 완성할 수 있다. 


나는 국립수목원에서 신종이나 미기록종을 그리는 일을 했다. 한국은 식물 연구 역사가 길지 않아 자생식물의 그림 기록 또한 적다. 마침 수목원에서는 국내 산림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구과식물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었고,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매일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등 거대한 나무를 찾아가 채집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해 4년간 40여 종의 그림 기록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국가 생물종 데이터베이스에 소장됐으며 사람들에게 국내 구과식물을 알리는 식물도감 연구 간행물의 삽화로 활용됐다.

 

 

식물세밀화 연구, 보존은 또 다른 과제


국립수목원에서 4년간 일하고 난 뒤 나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수목원에서 식물세밀화가로 일하며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것 외에도 식물세밀화가로서 할 일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생식물 기록을 수집하는 단계지만, 식물 연구가 많이 된 일본과 영국,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수집한 식물세밀화를 어떻게 하면 좋은 상태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지가 화두다. 기관마다 자체적인 스캔, 인쇄 기술을 연구하기도 한다. 


나는 국내 식물세밀화 용어를 정립하는 일부터 식물세밀화가가 일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 일까지 여러 활동을 시작했다. ‘식물세밀화’가 아닌 ‘식물학 일러스트’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대중 앞에서 식물세밀화가로서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식물세밀화는 식물에 대한 개인적인 사유를 담거나 아름다움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과학 일러스트로서 식물의 형태를 ‘기록’하는 일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식물종을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런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과 신문 칼럼 연재를 통해서도 전하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앞으로 나의 일은 ‘기록’의 의의에서 벗어나지 말 것, 식물 연구 과정에 필요한 기록일 것, 디자인으로 활용되더라도 옛 식물세밀화처럼 식물 산업 전반에 도움이 될만한 그림을 그릴 것, 궁극적으로는 식물 종 보존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며 작업할 것 등이다.


그렇게 프리랜서로 혼자 일한 지 8년이 지났다. 그동안 청와대, 산림청, 농촌진흥청, 국립수목원, 낙동강국립생물자원관 등 식물세밀화를 필요로 하는 국내 기관과 연구 사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내에서 육성된 신품종 식물, 약용 자생식물, 자원화 연구된 식물 등 기관에서 제안하는 식물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노르웨이와 일본, 중국 등 외국 기관과 협업해 식물을 그리기도 했다. 모두 식물세밀화의 필요성을 호소해 관련 사업을 추진하도록 설득한 결과다. 


최근에는 식물을 원료로 하는 화장품, 제약, 섬유, 제과, 대중음악과 영화 관련 기업에서도 식물세밀화를 요청하고 있다. 식물세밀화가 필요한 분야를 넓히면 후배들도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식물세밀화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곳을 넘나들며 분야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다.

 

 

식물의 진짜 모습은 관찰과 기록에서


식물세밀화 한 장에는 식물의 뿌리부터 줄기, 잎, 꽃, 열매, 종자 등 모든 기관이 기록된다. 그러나 식물은 이 기관을 한꺼번에 피워내지 않기에 꽃이 피는 시기, 열매 맺는 시기 등 수시로 식물을 찾아가 관찰해야 한다. 게다가 꽃이 피는 시기나 열매 맺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시기를 놓치게 되면 이듬해 혹은 그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한다.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을 관찰했는데도 다 그려내지 못한 식물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식물세밀화는 호흡이 긴 작업이기에 올해 안에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계획은 세울 수 없고, 내 생에 어떤 식물군을 그려야겠다는 다짐 정도만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식물세밀화가의 중요한 역량은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이나 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다. 식물을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볼 줄 아는 끈기와 인내심이다. 이 인내심은 결국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내게는 식물세밀화를 처음 그릴 때부터 썼던 관찰 노트가 있다. 특별한 식물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집 앞 화단이나 작업실 주차장 옆 공터와 같은 곳에서 만난 식물을 사진으로 찍거나 채취해 그림으로 기록한 노트다. 나는 식물세밀화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도 멸종 위기 식물이나 희귀식물과 같은 특정 식물이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지나다니는 땅에 사는 식물을 매일 꾸준히 기록하기를 권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아파트 화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던 갈색 땅은 어느새 민들레와 냉이, 꽃마리가 가득한 봄 꽃밭이 돼 있다. 이들은 다시 꽃집에서 판매하는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 꽃의 원종이 돼 있다. 그렇게 꾸준히 관찰하다 보면 자연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것은 내 주변 아주 작은 존재를 재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Q1 과학동아를 처음 본 시기는? 초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읽었다. 이후에도 생물 관련 기사가 보고 싶을 때마다 구매해 읽었다.

 

Q2 기억에 남는 과학동아 기사가 있다면? 2004년 5월호에서 식물세밀화 소개 기사를 보았다. 지도 교수님은 식물세밀화 관련 자료를 보실 때마다 내게 알려주셨는데, 과학동아의 기사를 꼭 보라며 내게 공유했다. 당시 식물세밀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는데, 식물세밀화와 식물세밀화가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돼 있어 반복해 읽었던 기억이 있다.

 

Q3 과학동아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식물을 그리다 보면 식물과 관련된 학문에만 갇혀 살기 쉬운데, 과학동아를 읽는 것만으로 과학계 이슈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점이 좋다.

 

Q4 식물세물화가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한 마디. 주변의 생물을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하기를 권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로도 써보길 바란다. 식물세밀화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주변 자연 현상을 기록하는 것만큼 좋은 훈련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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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 에디터

    조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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