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 동안 인류는 그림을 그렸다. 제대로 된 도구가 없을 땐 동물의 뼈를 들고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고, 종이가 없으면 파피루스 식물로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썼다. 종교나 왕권의 막강한 힘에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춘 그림을 그린 시기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더 강한 반발감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새롭고 다양한 형식의 미술 사조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시대와 발맞춰 전개된 미술사의 흐름을 과학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서양 미술사에는 종교의 개입, 체제의 변화 등 시대 상황에 따라 주류를 이끄는 미술 스타일이 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제각기 독특한 미술 작품이 탄생했다. 이후 중세 서양에 기독교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으며 미술 작품은 대부분 종교와 관련된 주제로 채워졌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자유는 철저히 배제되고, 종교적 의미에 맞춘 상징 미술만이 있었다. 색 하나, 대상의 배치 하나에도 제한이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 서양 미술은 전성기를 맞았다. 절대왕정이 자리 잡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며 기존의 기독교 중심 미술에 대해 강력한 반발이 생겨났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치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고, 이로써 인간 중심의 예술을 추구하자는 움직임이 태동했다.
화가들은 실제 인간의 모습을 잘 담기 위해서 보다 과학적으로 비율과 비례를 따지기 시작했다. 2차원 캔버스에서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먼 거리에 있는 물체는 작게, 근거리에 있는 물체는 크게 표현하는 원근법도 탄생했다. 완벽한 비율을 뜻하는 ‘황금비’를 찾는 일도 이때 등장했다.
이후 다소 과장되지만 역동적인 스타일을 특징으로 하는 17세기 바로크 미술과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이 차례로 등장했다. 뛰어난 명암대비가 압권이라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이 이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귀족 중심의 로코코 미술을 대표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또 한번 격변이 일어난다. 왕족과 귀족에게 분개한 시민들이 프랑스 대혁명이 일으켰고, 그 결과 왕정과 귀족 체제는 붕괴했다.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유럽의 사회 구조와 산업 구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미술계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로의 회귀를 외치며 정확하고 균형 잡힌 미술을 주장하는 신고전주의 미술, 구체적 형태보다는 느낌과 색채를 중시하는, 현실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중시한 낭만주의 미술 사조가 차례로 전개됐다.
이후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사실주의 미술이 유행했고,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그림에 표현하는 인상주의 미술이 나타났다.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대표적이다. 이후 점묘화 기법으로 기존 인상주의 회화에 과학성까지 부여한 조르주-피에르 쇠라의 신인상주의,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후기 인상주의까지 다양한 사조가 등장했다. 이런 미술 사조는 현대에 영향을 주며 입체주의, 추상주의 회화 등 다채로운 현대 미술의 기반이 됐다.
빅데이터, 미술 사조에 근거를 부여
미술 사조라는 흐름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를 명확하게 밝힐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2010년대에 각국에서 연구를 위해 다량의 데이터를 공유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공개된 각종 분야의 데이터 가운데에는 미술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 구글 아트 프로젝트 ‘구글 아트 앤드 컬처’를 비롯해 디지털 갤러리가 활성화되면서 수만 점의 고해상도 예술 작품이 공개됐다. 작품을 데이터과학으로 분석할 가능성이 열렸다.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대규모 데이터 분석을 하려면 적어도 1만 개 이상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며 “다량의 미술 작품 데이터는 시대 흐름에 따른 특징을 찾는 등 경향성을 분석하는 연구를 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팀은 미술 작품 데이터를 분석해 미술 사조의 흐름을 정량적으로 나타내는 연구를 수차례 진행했다. 분석에는 ‘스타일로메트리’ 기법을 이용했다. 스타일로메트리는 주로 문학 작품의 단어 사용과 문체의 특징 등을 통계적, 확률적으로 분석해 작가를 구분하는 연구에서 많이 쓰인다.
폴란드 언어학자 윈센티 루토스와프스키가 이 방법으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저술한 글을 시대별로 분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비트코인 개발 관련 논문을 단서로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를 찾을 때 이 기술을 이용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이 기법을 미술에 적용했다. 화가는 선, 색, 모양 등 회화의 여러 구성요소를 바탕으로 작품을 그린다. 연구팀은 이런 그림의 구성요소를 수치로 나타낼 방법을 찾았다. 이를 통해 시대별 미술 작품의 특징을 찾아내면, 그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의 그림만으로 시대를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연구팀은 약 800년 전부터 현재까지 등장한 10개의 미술 사조에서 그려진 서양회화 작품 2만 9000여 점을 빅데이터로 분석했다. 그리고 시대별로 특정 색상이 회화에 나타내는 빈도를 계산하고 물리학의 상관 함수를 이용해 색상 다양성, 명암, 밝기 등을 분석했다. doi: 10.1038/srep07370
그 결과 시대 흐름에 따라 작품의 명암대비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회화에 그려진 물체의 윤곽선은 점차 모호해지다가 낭만주의 시대 회화에서 다시 뚜렷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종교화만을 그려야 했던 중세시대 회화는 다른 시대 작품보다 색상 다양성이 현저히 낮았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특정 염료와 한정된 기법만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다양한 시도를 한 작가를 찾는 숫자
평생을 한결같이 꾸준히 같은 스타일로 그리는 화가도 있고, 매번 새로운 시도하는 화가도 있다.
둘 중 어떤 화가가 뛰어난가는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떤 화가가 그림 스타일을 많이 바꿨는지, 혹은 일관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는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2018년 정 교수팀은 1300년부터 2014년까지의 작품 18만여 점을 분석해 시대가 변하면서 그림이 어떻게 다양해졌는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의 작품 스타일은 점점 다양해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19세기 중반에 스타일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 doi: 10.1371/journal.pone.0204430
19세기는 다양한 미술 사조의 흐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이 등장하며 화가 개개인의 개성이 중요해져 독창성이 극대화된 시기다. 새로운 회화 기법의 출현이 새로운 회화 장르의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예로 18세기 말 스페인 태생의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1972년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미술원에 보낸 보고서에서 “회화에 규칙은 없다”며 “각자 자기 정신에 따라 표현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예술의 전통성을 따르지 않고, 모방이라는 관습을 거부하며 각자의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후 독창적이고 다양한 미술 사조가 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연구팀은 그림의 색상대비가 얼마나 강한지를 나타내는 수리모델을 만들어 그림 스타일을 가장 많이 바꾼 화가를 찾았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와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을 비교했을 때 두 사람 작품의 초기 함수값은 별 차이가 없었으나, 마지막 작품을 내놓았을 때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나타냈다.
몬드리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수값의 변화가 컸지만, 르누아르는 함수값의 변화가 작았다. 몬드리안은 색상대비 효과가 커졌지만 르누아르는 작아졌음을 의미한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즈도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한 화가로 나타났으며, 가장 화풍의 격변이 심한 작가는 미국 추상 화가 하워드 메링으로 드러났다.
이병휘 KAIST 물리학과 연구원은 “어떤 화가가 화풍의 변화가 컸는지, 혹은 적었는지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화가들의 그림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객관적인 수치로 밝힌 연구는 없었다”며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풍경화 속에 숨겨진 수평선의 비밀
지난해 10월 정 교수팀은 시대마다 화가들이 선호하는 구도와 비율, 그리고 시대별 변천사를 수치화했다. doi: 10.1073/pnas.2011927117 연구팀은 1500년대부터 현대까지 약 500년 동안 61개국의 1476명의 화가가 그린 1만 4912점의 풍경화를 분석했다. 풍경화는 정물화나 추상화보다 명확한 수평, 수직 구성을 띠고, 영역별 색 구분이 뚜렷해 분석에 유용했다.
연구팀은 연구에 ‘구성 정보량’을 활용해 그림을 분할하는 방법으로 그림의 구도를 결정했다. 구성 정보란 그림 속의 색상들의 공간적 배치에 담긴 정보량을 의미한다. 만약 그림을 두 영역으로 분할할 때 각 영역 속에 있는 ‘색상의 불확실성’을 최소로 하는 위치에서 분할이 이뤄진다면 최대의 구성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색상의 불확실성이란 그림 속 해당 영역에 얼마나 다양한 색이 들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값이다. 색이 비슷하면 작고 다양하면 크다. 섀넌의 정보 엔트로피로 정의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그려진 풍경화를 하나의 선을 그어 둘로 분할한다고 생각해보자. 수직으로 자르는 것보다는 수평으로 자르는 것이, 또 수평으로 자르는 경우에는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자르는 것이 나누어진 두 영역의 색상 불확실성을 가장 낮출 수 있다.
이처럼 두 영역의 색상이 가장 잘 구분되는 분할의 위치가 바로 구성 정보량을 최대로 하는 지점인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바탕으로 미술사 속 풍경화 데이터에서 최적의 분할 점과 선을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찾은 지배적인 수평선의 위치를 토대로 시대와 작가별로 풍경 구도를 잡는 데 자주 사용한 구성 비율을 측정했다.
그 결과 16세기 중반에 작품 중에서는 캔버스 위에서부터 3분의 1지점에 수평선이 있는 그림이 지배적으로 많았음을 확인했다. 캔버스 중앙에 있던 수평선은 17세기 후반까지 점진적으로 낮아졌다가 다시 19세기 후반까지 3분의 1지점으로 움직였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하늘을 크게 그려서 낮은 위치에 수평선을 그렸고, 현대로 갈수록 수평선의 위치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 교수는 “시대별로 ‘대세’인 구도가 있고, 이런 대세에서 벗어난 그림은 많지 않았다”며 “이를 이용하면 역으로 어떤 그림의 수평선 위치만 알면 어떤 시대의 그림인지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연구를 토대로 가까운 미래에 어떤 구도의 그림이 유행할지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다양한 몬드리안 VS '일관된' 르누아르
피트 몬드리안은 작품활동 초기에 사실적인 작품을 그렸지만, 공간과 구성을 탐구하며 점차 입체주의(큐비즘) 성향을 드러냈다. 이후 색과 선으로만 이뤄진 기하학적인 추상화를 그리면서 몬드리안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 한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작품활동 내내 밝고 다양한 색채를 이용한 일관된 스타일을 고수하며 인상주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아래 그래프에서 S값이 클수록 색상대비가 높다는 뜻으로, 몬드리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비가 뚜렷한 그림을 그렸다. 또 몬드리안 작품의 S값을 연결한 그래프의 기울기가 가파른 것은 작품활동 시간이 흐를수록 명암대비가 또렷한 그림을 그렸고, 이는 곧 작품 다양성이 높았음을 뜻한다. 르누아르는 S값이 미미하게 작아지는 추세를 보였고, 작품의 S값을 연결한 그래프의 기울기가 완만하다. 이는 작품 활동 내내 비교적 일관된 스타일의 그림을 고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