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난이도
열대야는 밤(오후 6시 1분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을 일컫는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상 용어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무더운 밤이 얼마나 지속하는지 통계를 내기 위해 열대야를 기록하고 있다.
불볕더위로 악명높았던 2018년에는 열대야가 약 18일(전국 평균) 나타났다. 열섬 현상이 자주 나타나는 서울의 경우 열대야 발생이 29일로 집계됐는데, 이는 사실상 낮이고 밤이고 여름 내내 더위와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밤 최저기온은 건강과 직결된다. 김도우 국립재난안전연구원 빅데이터연구팀 책임연구원은 “낮 동안 몸에 쌓인 열적 스트레스를 밤에 해소해야 하는데, 열대야로 인해 열적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면 온열 질환 등의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다.
내장 데우고, 신경 놀래킨 더위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원인은 많다. 소음, 빛 같은 환경적 요인도 문제가 되고, 스트레스나 특정 약물 때문에 잠자리에서 뒤척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체온은 수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심장, 간, 장 등 체내 장기들의 온도를 뜻하는 심부 체온(CBT·core body temperature)이 수면에 직결된다. 심부 체온은 기본적으로 36~38도에서 오르고 내리는데, 이는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변한다.
가령 하루 중 심부 체온은 저녁 8시에 최고로 상승한다. 그리고 잠드는 시점인 밤 11시부터 급격히 떨어져 새벽 5시쯤 가장 낮은 온도를 찍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몸의 상태가 하루를 주기로 변하는 것을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에 따라 조절된다고 한다.
심부 체온의 변화 양상이 낮에 깨어있고 밤에 자는 수면 패턴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둘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됐다. 특히 1993년 호주 플린더스대 연구팀은 심부 체온과 수면이 서로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 8명을 대상으로 대장의 끝부분인 직장의 온도와 수면 상태의 상관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밤이 되면 직장 온도가 일주기 리듬에 맞게 자체적으로도 떨어지지만, 잠을 자기 위해 눕고 수면이 시작되면 온도가 더 빨리 떨어지며 이것이 다시 수면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doi: 10.1093/sleep/16.2.93
심부 체온이 일주기 리듬에 따라 항상 같은 패턴으로만 변한다면 우리도 일정하게 잠들고 깰 수 있으련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심부 체온은 일주기 리듬 이외에도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는데, 특히 피부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피부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밤이 돼도 심부 체온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피부 온도가 너무 높으면 체내 열이 밖으로 잘 방출되지 않고, 반대로 너무 낮으면 피부의 혈관이 수축하면서 외부로 열이 원활히 방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부 온도는 주변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결국 높은 기온은 높은 피부 온도, 높은 심부 체온 순으로 영향을 줘 수면 상태로의 진입을 늦춘다.
높은 기온은 자율신경계에도 따로 인식된다. 가령 피부의 온각 수용체와 냉각 수용체는 주변 기온을 감지한다. 이 정보는 뇌에서 체온 정보를 취합하는 시각교차앞-전시상하부(PoAH)라는 곳으로 보내진다. PoAH는 다시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여러 뇌 부위와 연결돼 결과적으로 수면에 영향을 주는데, 아직 그 기작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고 일부만 알려졌다.
올해 4월 임정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부 교수팀은 수면조절 관련 신경세포들이 기온이 높아질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냈다. doi: 10.1038/s42003-020-0902-8
연구팀은 유전자 변형으로 잠을 적게 자는 돌연변이 초파리를 이용했다. 이 초파리는 주변 기온이 21도일 때보다 29도일 때 잠을 더 많이 잤다. 연구팀은 주변 기온을 조절하면서 온도에 따른 초파리의 뇌 영상을 촬영했다. 그 결과, 기온이 올라가면 가바(GABA)라는 신경전달물질로 신호를 주고받는 수면조절 신경세포에 변화가 생겼다. 수면을 억제하는 가바와 신경세포의 결합력은 약해지고, 대신 또 다른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결합하면서 수면이 촉진된 것이다.
임 교수는 “여름철 열대야 현상이나 춘곤증 등으로 인한 수면 패턴의 변화를 이해하고, 이로 인한 수면장애를 해소할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잠을 자는 건 뇌 때문일까
열대야에 며칠 연달아 시달려보면 이런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잠이란 걸 안 잘 수는 없을까. 과거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왜 꼭 잠을 자야만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거꾸로 실험 대상을 재우지 않아봤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잔혹한 실험들도 많다.
유명한 사례로 1964년 미국에서 랜디 가드너라는 17세 고등학생이 11일 동안 자지 않은 실험이 있다. 그는 학교의 과학실습 프로젝트로 ‘잠을 자지 않아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전 과정을 미국 수면 의학의 대가인 윌리엄 디먼트 미국 스탠퍼드대 수면연구센터 연구원이 지켜봤다.
가드너는 5일째부터 일종의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자신을 잡으러 올 것이라고 말하며 환각, 편집증, 피해망상 등에 시달린 것이다. 실험 7일째부터는 운동 기능을 잃고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11일째 되는 날에는 100에서 계속 7을 빼는 계산을 하다가 65에서 멈췄다. 그다음 계산을 못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쥐도 수면 실험에 종종 사용됐다. 1980년대 앨런 렉트세이펀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교수가 쥐를 재우지 않자, 이 쥐들의 털은 점점 거칠어졌으며, 색도 흰색에서 짙은 노란색으로 변해갔다. 피부에는 병변이 생겼고, 체중 역시 줄었다. 평균적으로 15일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음식을 안 준 쥐보다도 단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doi: 10.1093/sleep/12.1.13
하지만 이 같은 실험 결과들은 잠을 못 잔 결과 나타나는 여러 증상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 증상들이 죽음을 초래하는 근본적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던 2005년 앨런 홉슨 미국 하버드대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뇌의, 뇌에 의한, 뇌를 위한 수면’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홉슨 교수는 이전의 여러 연구결과와 당시 최신의 뇌 영상 기술을 접목한 실험을 근거로 수면은 뇌에 의해 조절되고, 뇌는 잠을 자는 동안 재구성되며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관계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doi: 10.1038/nature04283
이후 학계에서는 뇌와 수면의 관계를 더욱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 판단력 감퇴 등 뇌의 본 기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순환계, 소화계, 면역계 등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도 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연달아 나왔다. 잠을 자는 근본적 이유는 정삭적인 뇌 활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잠을 자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연구 결과가 하나 발표됐다. 드라가나 로굴자 미국 하버드대 의대 신경생물학과 교수는 잠을 자지 못하면 뇌와 상관없이 장에 활성산소(ROS)가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셀’ 6월 11일자에 발표했다. doi: 10.1016/j.cell.2020.04.049
로굴자 교수는 초파리를 대상으로 잠을 자지 못하게 했을 때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초파리는 포유류와 수면 특성이 비슷하면서도 관리하기 쉽고 저렴해 수면 연구에 많이 활용된다.
연구팀은 수면 부족으로 죽은 초파리들의 특성을 분석했고, 그 결과 공통적으로 장에 활성산소가 축적돼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수면 부족을 겪는 초파리에 활성산소를 없애는 항산화제를 주입한 결과, 놀랍게도 정상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수명도 정상이었다. 반면 다른 이상 증상을 제거하는 약물을 주입했을 때는 수면 부족에 따른 증상들이 계속 나타났다.
로굴자 교수는 “항산화제라는 하나의 수단으로 죽음을 막았다는 것은 곧 수면 부족으로 인한 여러 이상 증상이 활성산소라는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됐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평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낸다고 한다. 왜 자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잠들게 만드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하지만 지친 하루 몸을 회복하고 내일 다시 활기찬 하루를 맞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이란 건 분명하다.
혹시 열대야에 잠 못 이루고 이 글을 읽는 중이라면, 미지근한 물에 몸 한 번 적셔 심부 체온을 낮춰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