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1162~1227). 몽골 내 여러 부족의 대통합을 이룬 후 북중국과 티벳지역, 러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나간 막강한 정복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칭기즈칸이 이끄는 세력이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몽골 하면 칭기즈칸이란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칭기즈칸이란 명칭은 역대 ‘왕(Khan)’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Chinggis)’는 뜻.
그런데 칭기즈칸에 얽힌 얘기는 정확히 역사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의 무덤도 마찬가지. 전쟁에서 사망한 후 장례식이 고향인 울란바토르 부근에서 비밀리에 치러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 7월 23일부터 1주일간 과학자 3명을 포함한 한국조사단이 몽골 울란바토르와 유적발굴 현장을 찾았다.
칭기즈칸 왕족으로 추정되는 무덤 첫 발견
“지난해 8월 몽골 고고학 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이 이뤄졌어요. 칭키즈칸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이 무덤의 정체가 더욱 확실히 밝혀지고 있어요.”
7월 24일 오전 11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몽골국립대 아시아연구센터. 도르즈팔람 나왕(75) 교수는 한국 과학자 3명이 포함된 ‘몽골 칭기즈칸시대 학술조사단’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갔다.
나왕 교수는 1951년 옛소련 모스크바대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몽골 고고학의 아버지’.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으로 2002년부터 몽골국립대 아시아연구센터가 ‘동몽골 유적발굴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중 1년 전 칭기즈칸 시대에 살았던 왕족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했다.
유적지는 울란바토르에서 서남쪽으로 1500km 떨어진 옹곤 지역. 높은 신분을 가진 조상이 묻힌 곳이라 ‘신성한 무덤지’로도 불리는 이곳은 한때 일본 고고학 연구팀이 ‘눈독’을 들이며 접근하려 했지만 현지 주민들이 반대해 무산된 적이 있던 곳이다.
나왕 교수팀은 여기서 두 개의 목관을 발견했는데 각각에서 남자와 여자 유골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남녀가 손가락에 송골매 문양이 새겨진 황금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점.
나왕 교수는 “몽골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따르면 송골매는 칭기즈칸 왕족의 상징이었다”며 “그동안 일반인의 무덤이 발견된 적은 많았지만 왕족으로 추정되는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나왕 교수팀은 발굴된 유골의 주인공들이 30~40대이며 황금반지 외에도 팔찌, 목걸이 등 귀한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봐 이들의 신분이 상당히 높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세계 학계에 발표하려면 좀더 과학적인 검증이 필요했다.
물론 몽골국립대 연구팀에도 과학자들이 있었다. 인류학 및 고고학과, 핵물리학과, 지리물리학과 등에서 수십명의 과학자들이 동원됐다. 하지만 현대 첨단과학으로 훈련된 인력과 실험 장비는 부족했다. 이들은 발굴지의 위치와 깊이, 모양 등을 조사하고 유적지에서 나온 50여점의 유물의 구성원소를 밝혔다. 하지만 정확한 연대측정은 어려웠다.
탄소연대측정, 전자현미경 동원
몽골국립대는 지난해 말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뼈와 나무(목관의 일부) 한 조각씩을 고려대에 보내 검증을 의뢰했다. 연구를 총괄한 고려대 의대 병리학교실 김한겸 교수는 이들 유물에 대한 기본적인 데이터를 얻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동원했다.
먼저 연대 측정. 서울대 가속기질량분석(AMS)연구실의 김종찬 교수(물리학부)는 “탄소연대측정을 실시한 결과 뼈와 나무 모두 800여년 전후 즉 칭기즈칸이 활동하던 12~13세기 무렵 땅 속에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탄소연대측정이란 유물에서 자연계에 흔하게 존재하는 탄소12와 이보다 조금 무거운 탄소14의 비율을 측정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 탄소12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지만 탄소14는 5600년이 지나면 양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반감기).
대기에서 탄소12와 탄소14의 구성비는 대략 1012:1이다. 나무나 뼈에 포함된 세포에서도 이 비율이 유지되므로 유물에서 탄소14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알아내면 유물이 처음 묻힌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수준으로 샘플 수 mg만 있으면 3주 후에 결과가 나온다.
사실 김 교수는 처음 목관 연대를 추정할 때 ‘실망스런’ 결과를 얻었다. 550년 전, 즉 칭기즈칸이 활동하던 때보다 300여년 후의 것으로 결과가 나왔던 것.
김 교수는 혹시 목관의 나무가 계속 성장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따금 말라죽은 고목에서도 조직이 성장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나무 조직에서 죽은 후 성장을 멈춘 성분(알파셀룰로오스)을 선택해 다시 측정했다. 결과는 뼈와 동일하게 12~13세기에 묻힌 것으로 나왔다.
고려대 의대 해부학교실 엄창섭 교수는 뼈에서 세포를 찾아냈다. 그는 “뼈를 다이아몬드 커터로 정밀하게 잘라내고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자 놀랍게도 핵이 포함된 세포 모습이 보존돼 있었다”고 말했다. 800여년이 지났지만 세포가 파괴되지 않고 보존돼 있는 사실에 연구팀은 모두 흥분했다.
한편 세포 샘플의 일부는 연세대 의대 법의학연구실로 보내졌다. 연구실의 이환영 박사는 “조사결과 뼈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설명했다.
이 데이터는 6월 말 몽골국립대에 보내졌고 연구결과에 고무된 몽골국립대가 적극 초청해 이번 만남이 이뤄졌다. 한국조사단 측도 ‘겨우’ 뼈와 목관 한 조각씩에서 얻은 분석자료에 만족하기 어려웠다. 몽골국립대의 초청 소식에 한국조사단 모두 바쁜 ‘생업’을 제쳐두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사단은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3박4일간 유적지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가는 데만 자동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송골매는 족장 문양’ 문제 제기도
이번에 한국조사단은 몽골국립대에 보관 중인 유물 전체를 확인하고 몽골국립대 측으로부터 과학적 정밀 조사를 위해 좀더 많은 유물을 한국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풀어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몽골국립대 연구팀은 유물의 주인공이 칭기즈칸의 일족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로 반지에 새겨진 송골매를 들었다. 하지만 송골매는 ‘왕족 수준’이 아니라 그 아래 ‘족장 수준’이었다는 고고학계의 지적도 있다고 한다. 전투에서 가장 앞에 서는 ‘돌격조’ 그룹이 공격성이 강한 송골매의 문양을 새기고 다녔다는 해석이다.
또 뼈의 연대가 칭기즈칸이 생존했던 시대로 밝혀졌다 해도 과연 칭기즈칸의 직계 가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에 대한 해법은 유전자 검사. 엄 교수는 “핵 속의 유전자(DNA)를 추출하고 이를 현재 칭기즈칸 직계 후손들의 DNA와 비교해보면 이번 무덤 유골의 정체를 좀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몽골에는 가계를 나타내는 족보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고 한다. 만일 족보를 통해 칭기즈칸 후예들을 찾는다면 유전자 분석을 통한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고등교육재단 김재열 사무총장과 고려대 국제교육원 염재호 원장(행정학과 교수)은 7월 26일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대통령과 만나 유적 발굴을 포함해 한국과 몽골 간 학술적 교류에 적극 협력할 것을 합의했다. 마침 내년은 칭기즈칸이 왕으로 추대된지 800년인 해이기 때문에 몽골에서도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학연구소는 ‘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0월 25일부터 이틀간 나왕 교수팀을 초청하고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해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칭기즈칸 왕족을 넘어 칭기즈칸 자신의 무덤이 한국 과학의 힘으로 발굴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