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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일기] 오타쿠의 성지로 유학 간 성공한 덕후

술술 읽혀요│

“교무실로 따라와라.”


졸업을 앞둔 2학년 여름이었다. 나는 경남 창원과학고를 다녔는데, 여느 과학고 학생들처럼 창원과학고 학생들은 대부분 2학년 때 조기 졸업을 한다. 그래서 대개 2학년 여름인 6~7월이 되면 슬슬 입시 준비를 시작한다. 내가 선생님께 교무실로 ‘소환’된 건 이때였다. 


학교 자율학습실에서 친구들은 모두 고교 ‘필수템’인 ‘수학의 정석’에 얼굴을 파묻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일본 소설을 몰래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당시 담임 선생님이자 입시 담당 선생님이었던 김문섭 선생님이 갑자기 내 뒤에 나타났다. 자습 중 딴짓과 개인적인 취미가 현장에서 딱 걸린 것이다. 


솔직히 나는 고등학교 입학 이후 자습실에 게임기를 가져와 게임을 하거나 일본 만화책과 소설책을 읽으며 딴짓을 꽤 많이 했고, 이런 물건들을 수없이 뺏겨봤다. 그래서 이번에도 평소처럼 책을 압수당하고 훈계를 듣겠거니 짐작하며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긴장한 채 선생님 앞에 서 있는 내게 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일본 유학에 관심 있어?”


그러면서 선생님은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생 선발 프로그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1998년 한일정상회담의 결과로 생겼고, 미래의 첨단 과학기술을 선도할 인재 양성과 한일 양국간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도입됐다. 따라서 여기서 선발된 유학생에게는 한일 정부가 학비 전액과 생활비를 지원했다. 


유학생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영어, 수학, 화학, 물리학 시험을 치러야 했고, 시험문제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돼 출제됐다. 나는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와 수학 성적이 좋았다. 


게다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소위 ‘오타쿠’였다. 그래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유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언어 문제도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과학과 영어 수준만 만족하면 됐다. 무엇보다 나라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유학을 보내준다니.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끌린 점은 따로 있었다. 선발 시험 성적이 5등 안에 들면 도쿄대에 다닐 수 있었다. 도쿄대는 일본 최고의 대학이다. 그리고 ‘오타쿠의 성지’로 불리는 도쿄 아키하바라와 5분 거리로 매우 가깝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나는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설렌 마음도 잠시. 필기시험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아무리 한국어로 번역됐다지만, 문제가 일본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맞춰서 출제됐다. 예를 들어 화학 시험에 유기화학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수학 시험에는 정수론 문제가 포함돼 있었다. 한국의 수능과 시험 방식도 전혀 달랐다. 고득점을 노리려면 별도의 공부가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살던 창원에는 이런 시험 대비에 특화된 학원이 별로 없었다.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약 1년간 자취하며 학원에 다녔다. 이 시기만큼은 그렇게 좋아하던 ‘덕질’도 완전히 접었다. 일본 교육과정에 맞춰 고등학교 이과 과목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했다.


과학고에서 하던 공부와 유학생 선발 시험용 공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과학고에서 지낸 2년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반면 유학생 선발 시험 준비 때는 ‘어떻게 하면 실수 없이 하나도 안 틀리고 문제를 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공부했다. 


시험을 치르고 다시 경남에 있는 본가로 내려왔다. 그간 못 본 만화를 보며 지내던 어느 날, e메일로 도쿄대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상위 5명 안에 든 것이다. 정확히는 딱 5등이었다. 합격 당시에는 마냥 기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한 끗 차이로 도쿄대에 못 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쫄깃해진다. 


등수가 높은 학생들에게 학과를 선택할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 물리학과와 기계공학과가 선택됐고, 이 두 전공을 제외하고 이공계 전공 내에서는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한 애니메이션이 ‘소드 아트 온라인’인데,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연구실이 있는 전자정보공학부로 전공을 정했다. 그렇게 벌써 도쿄대 전자정보공학부에서 3년째 공부하고 있다.


아쉽게도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생 선발 프로그램은 2018년 20기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일본 문부과학성 국비유학생 프로그램 등 국가에서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열려있다. 오타쿠라고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이런 나의 적성을 살릴 수 있게 이끌어준 김문섭 선생님께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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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안재솔 일본 도쿄대 전자정보공학부 3학년
  • 조혜인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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