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역에 있는 한 관청의 노비 출신인 장영실은 세종을 만나 벼슬에 올랐다. 장영실은 별과 행성의 움직임을 관측해 하늘의 이치를 밝혔고, 이를 통해 시간을 재고 전달하는 시계도 완성했다. 조선의 하늘을 연 것이다. 과학적 발명 업적에 힘입어 장영실은 노비에서 기술총책임자격인 품계상 종3품 대호군에 오르며 조선의 과학을 이끌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세종실록과 같은 조선의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12월 26일 개봉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계기로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을 정리했다. (기사에 나오는 연도와 명칭 등은 구만옥 경희대 사학과 교수의 저서 세종시대의과학기술을 참고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손이 노비가 됐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성휘라는 사람으로, 고려말 지금의 장관급 벼슬인 전서(典書)를 지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부산 지역 관청 소속의 기생이었기 때문에, 장영실도 노비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각종 농기구를 고치는데 두각을 나타냈던 장영실은 한양으로 가게 된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이 신분에 상관없이 나라에 도움이 될 인재를 추천하는 ‘도천법(道薦法)’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한양에 상경한 장영실은 궁궐의 물품을 담당하는 상의원에 들어가 금속을 제련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무기와 농기구를 고치는 재주가 탁월했던 장영실이 금속을 다루는 일을 한 것은 당연했다.
최고의 금속 기술자로 자리 잡은 장영실에게 세종 즉위(1418년) 후 기회가 찾아온다. 세종이 1403년 계미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보완하는 작업을 속히 진행할 것을 공조참판으로 있던 이천에게 명했고, 이때 기술자로 잘 알려진 노비 장영실이 개발 작업에 포함된 것이다.
계미자는 활자를 고정할 때 밀랍을 붙였는데, 밀랍이 녹아 글자가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새로 활자판을 만들어도 인쇄할 수 있는 양이 하루에 수장에 그쳤다. 장영실을 주축으로 한 학자들은 밀랍 대신 대나무를 끼워 넣어 활자를 고정하는 신기술을 활용해 1420년 하루에 수십~수백 장 인쇄 가능한 ‘경자자(庚子字)’를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421년 어느 날 세종이 장영실과 윤사웅, 최천구 등에게 중국에 가서 물시계와 혼천의 등 시간과 천문 관측기구를 관찰하고 이를 개발할 것을 명한 것이다. 조선에 맞는 천문계산법을 통해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싶다는 세종의 의지 때문이었다.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장영실은 여전히 노비 신분이었다. 당시 노비에게 조선 땅을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자격루부터 해시계까지, 시간을 다스리다
당시 명나라(지금의 중국)와 회회국(아라비아)에는 자동 물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학자들이 실제로 이 물시계를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문을 다루는 일은 황제의 신성함과 직결된다는 이유로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영실과 학자들은 중국의 책방 거리를 돌며 천문, 지리와 관련한 책들을 모두 찾아보기로 했다.
중국에서 돌아와 연구를 이어가던 장영실은 이때 얻은 물시계 그림을 통해 자체적으로 물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물에 뜨는 잣대(막대)를 물통에 넣어 두고, 그 물통에 일정하게 물을 흘려보내면서 잣대가 떠오르면 눈금을 읽어 시간을 재는 원리를 적용했다. 정확한 물시계를 만들려면 물통에 일정하게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기술이 중요했다.
1424년 장영실은 새로운 물시계를 만들어 선보였다. 그는 큰 항아리 한 개와 작은 항아리 2개, 원통 항아리 1개 등 총 4개의 항아리을 층계처럼 여러 단계로 설치하는 형태를 제안했다. 이렇게 설치하면 늘 물이 가득 고여 있는 항아리에서 물이 떨어지고, 이를 통해 일정한 수압과 양의 물이 흐르게 된다. 장영실의 물시계에 세종은 당시 시간 단위인 경과 점을 연결해 ‘경점지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탁월함에 상을 내리고 싶었던 세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1425년 무렵 장영실에게 종5품의 상의원 별좌 자리를 하사했고, 장영실은 노비에서 면천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물시계가 있어도 물시계를 보고 때 맞춰 종을 치는 관원이 잠을 자면 백성에게 시간을 알릴 수 없다. 장영실은 10여 년의 연구 끝에 1434년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개발했다.
자격루는 기존 물시계와 종, 북, 징을 치는 시보 장치로 이뤄졌다. 원통 항아리에 물이 채워지면서 잣대가 떠오르면 시보 장치와 연결된 선반에 작은 구슬이 떨어져 큰 구슬을 건드린다. 큰 구슬이 떨어지면서 지렛대를 건드리면 인형이 종과 북, 징을 치는 방식이다. 15세기 조선에서 이토록 첨단 과학기구가 개발됐다니. 이 공로로 장영실은 종4품 호군이 됐다. 장영실은 자격루 외에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 다양한 해시계도 개발했다.
정확한 시간을 찾다
장영실의 물시계와 해시계는 시간을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장영실의 관심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데 있었다. 결국 세종과 장영실의 관심은 별과 달의 움직임을 보는 ‘하늘의 문(천문)’으로 향했다.
영화에서 세종은 백성들이 더 많은 곡식을 얻기 위해 제대로 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실에게 “어디까지나 중국에 맞춰진 역법이어서 (조선에서는) 정확할 수 없다”며 “영실아, 니가 해줘야겠다. 간의(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봐라”라고 말한다.
세종시대 천문학자였던 김돈이 작성한 간의대기(簡儀臺記)에는 1432년 가을 세종이 경연 자리에서 간의와 같이 조선의 하늘을 관측할 천문 기구(의기)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히고 있다. 또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약 7년에 걸쳐 청동으로 제작한 10개의 기구를 포함해 십여 개의 천문의기가 완성됐다고 나온다.
정초와 정인지는 주로 천문 서적을 탐구해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고,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천문 관측의 원리를 살펴 실제 기구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처음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목성의 위성까지 관측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인물이 바로 조선에서는 장영실이었던 셈이다.
연구에 돌입한 장영실은 행성과 별의 위치, 시간, 고도 방위를 더 정밀하게 측정하는 간의를 개발했다. 간의가 개발되자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9m, 너비 약 9m, 길이 14m에 이르는 천문관측소인 ‘간의대’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1433년 8월 세자가 간의대에 가서 정초 등과 토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간의대는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영실은 천문 관측 내용을 바탕으로 1437년 새로운 시계를 선보였고, 세종은 이를 ‘일성정시의’라고 이름 붙였다. 태양이 항상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듯이 밤하늘의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돌아간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를 통해 정오를 확인했고,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통해 자정을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밤낮 구분없이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1년이 365일인 것도 정확히 구했다.
장영실은 1438년 자동 천문시계인 ‘옥루’도 만드는 데 성공해 종3품 대호군에 올랐다. 장영실이 부산을 떠나 한양에 온 지 30여 년 만에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장영실의 흔적은 1441~1442년 세종이 적은 몇 개의 일기로 끝으로 돌연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장영실, 어디로 갔을까
“대호군의 사건이 내내 마음을 무겁게한다. (중략) 나를 믿고 따라준 그이건만 이제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하나 없이 그대로 날아오는 창을 받아 내고 있다. 내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리고 아프다.”(1442년 3월 18일 세종실록 中)
1442년 3월 16일 세종실록에는 대호군 장영실이 만든 가마(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장영실이 의금부에 하옥된 날이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이 다칠뻔한 중대한 사건으로 대신들이 장영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도 있다. 1442년 5월 3일 장영실에 대한 내용이 담긴 마지막 세종실록에는 가마 사건의 여파로 결국 80대의 곤장형과 함께 장영실이 관직을 뺏긴 이야기가 나온다.
노비였던 장영실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에 더해 사라진 날도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는 세종과 장영실 사이에 있었던 일과 그들의 관계를 상상력으로 채워 장영실이 사라진 이유를 추적한다.
장영실은 당시 조선에 첨단 과학을 선물했지만, 이를 전수받은 사람이 없었던 탓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격루는 만든 지 21년 만인 1455년(단종 3년) 2월에 자동 시보 장치의 사용이 중지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장영실이 없으니 고장이 나도 고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이룩한 과학, 그래서 후대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과학을 이룩한 장영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