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명품이 있었다. 이 발명품을 이용하면 매일 비타민A 결핍으로 사망하는 어린이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발명품은 개발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쓰이지 못했다. ‘비운의 주인공’은 황금쌀(Golden Rice). 그런 황금쌀이 드디어 식탁 위에 오를 가능성이 생겼다.
‘20년 만에 황금쌀 (재배) 승인 날 듯(After 20 years, Go lden Rice nears approval)’.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11월 22일자에는 방글라데시 정부가 유전자변형생물체(GMO·Genetically Modified Orga nism)인 황금쌀의 재배를 승인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지 매체인 다카 트리뷴에 따르면 당초 방글라데시 정부는 11월 15일 이전에 황금쌀 재배 승인을 공식화할 방침이었지만, 심사를 맡은 바이오안전성핵심위원회 위원 한 명이 사망하면서 발표가 미뤄졌다. 방글라데시가 황금쌀 재배를 승인할 경우 세계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황금쌀 재배가 허가되는 것은 최초다.
수선화와 박테리아의 합작품
황금쌀은 이름 그대로 금처럼 노란빛을 띠는 쌀이다. 황금쌀의 노란색은 베타카로틴(β-carotene)에 의한 것이다. 베타카로틴은 비타민A의 전구물질로, 주로 녹황색 채소나 해조류에 많이 들어있다. 베타카로틴은 우리 몸에 흡수되면 장과 간에서 비타민A인 레티놀로 전환되는데, 레티놀은 다시 레티날로 바뀌고 시각색소로 활용된다.
비타민A가 부족하면 여러 결핍증이 생긴다. 특히 시각색소와 관련된 성분인 만큼 비타민A가 부족하면 야맹증 등 눈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95 ~2005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세계 122개국에서 5세 미만 어린이 1억9000만 명과 임산부 1900만 명이 비타민A 결핍증을 앓고 있다. 야맹증과 각막연화증 등 비타민A 결핍증으로 실명한 어린이 환자는 매년 25만~50만 명이며, 이들 중 절반은 실명한 지 1년 이내 사망했다.
무엇보다 이들 중 대다수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국민이다. 비타민A 보충제를 먹거나, 베타카로틴 성분이 풍부한 채소와 해조류를 섭취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유니세프 등 여러 구호단체들이 이들 국가에 영양제를 보급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1990년 잉고 포트리쿠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식물과학연구소 교수팀은 유전자변형 기술로 베타카로틴을 함유한 쌀을 만들 수만 있다면 비타민A 결핍 문제를 드라마틱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페터 바이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응용생명과학센터 교수를 찾아갔다. 바이어 교수는 수선화 꽃잎을 노란색으로 만드는 베타카로틴의 생합성 경로를 규명한 인물이었다.
베타카로틴이 합성되려면 탄소 20개로 이뤄진 제라닐제라닐파이로인산(GGPP)이라는 분자가 필요하다. 이 분자는 쌀의 배젖에도 있다. GGPP 분자 2개가 합쳐지면 파이토엔(Phytoene)이라는 탄소 40개짜리 분자가 되고, 이 구조가 약간 바뀌어 라이코펜이 됐다가 최종적으로 베타카로틴이 된다. 쌀에서 베타카로틴이 합성되려면 이 세 가지 과정이 쌀의 배젖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연구팀은 박테리아인 에르위니아(Erwinia uredovora)에서 파이토엔 불포화효소(PDS/Crt1)가 파이토엔을 라이코펜으로 바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효소와 함께 나팔수선화(Narcissus pseudonarcissus)에서 파이토엔을 합성할 수 있는 파이토엔 합성효소(PSY)와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로 전환하는 효소(LCY-β·라이코펜 베타 사이클레이스)를 쌀에 넣으면 베타카로틴을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1999년 연구팀은 이들 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를 벼에 주입해 1g당 1.6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분의 1g) 이상의 베타카로틴을 함유한 쌀을 생산할 수 있는 유전자변형 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1월 14일자에 발표했다. 황금쌀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doi: 10.1126/science. 287.5451.303
하지만 베타카로틴의 양이 문제였다. 가령 대한영양사협회의 2015년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 활용 가이드북’에 따르면 3~5세 유아의 비타민A 권장 섭취량은 350μg이다. 식품 속 베타카로틴으로 이를 충족하려면 4.2mg의 베타카로틴을 섭취해야 한다. 이를 황금쌀로만 채우려면 하루에 밥을 2.6kg 먹어야 한다. 현실성이 없는 셈이다.
이번에는 기업이 나섰다. 세계적인 농업 기업인 신젠타의 레이첼 드레이크 연구원팀은 옥수수와 고추, 토마토, 수선화 등 여러 식물의 PSY 유전자의 활성을 비교해 옥수수에 있는 PSY 유전자의 활성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팀은 옥수수의 PSY 유전자와 에르위니아의 Crt1 유전자를 벼에 주입해 2004년 2세대 황금쌀을 개발했다. 2세대 황금쌀은 1세대보다 약 23배 많은, 쌀 1g당 36.7μg의 베타카로틴을 함유했다. 이 정도면 밥 한두 공기도 하루 권장섭취량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doi: 10.1038/nbt1082
먹을 수 있는 면화, 카로티노이드 풍부한 고구마
황금쌀이 특정 성분을 생산하도록 유전자를 변형했다면, 생산성을 높이거나 외부 요인에 저항을 띠도록 유전자를 바꾸기도 한다.
야생 토마토의 일종인 피살리스 프루이노사(Physalis pruinosa) 품종은 기존 토마토보다 맛이나 향에서 뛰어나지만, 곧게 자라지 않으며 낙과가 잦아 생산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미국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연구팀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CRISPR)-캐스9를 이용해 형질을 바꿔 생산성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doi: 10.1038/s41477-018-0259-x
브라질 상파울루대 연구팀은 다른 야생 토마토(Solanum pimpinellifolium)의 유전자를 변형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 토마토는 기존 야생 토마토보다 3배 크고, 한 번에 10배가량 많이 열리며, 시중 토마토보다 항암물질인 라이코펜이 약 5배 많다. doi: 10.1038/nbt.4272
먹을 수 없는 작물에서 특정 성분을 없애 먹을 수 있게 개조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전자변형(GM) 면화다. 면을 만드는 원료인 면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면화씨는 지방과 단백질이 풍부해 영양학적으로 우수하지만, 동물에게 심부전이나 빈혈 등을 일으키는 독 성분인 고시폴(gossypol)이 있어 식용으로 쓸 수 없다.
2006년 키어티 래토어 미국 텍사스A&M대 토양및작물과학과 교수팀은 유전자 조작으로 면화씨가 고시폴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GM 면화를 개발했다. doi: 10.1073/pnas.0605389103
이후 2018년 10월 미국 농무부 산하 동식물검역소가 식용 GM 면화의 재배를 승인하면서 생산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식용으로 사용되려면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최종 승인이 필요해 당장은 먹을 수 없다. 래토어 교수는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면화씨를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다면 연간 5억 명 이상에게 단백질을 제공하는 셈”이라며 “사료로 쓸 수도 있어 재배 가치가 높다”고 주장했다.
이외에 병충해나 추위, 더위, 가뭄 등 외부 요인을 이겨낼 수 있도록 형질을 전환한 작물도 있다. 인도에서 널리 재배되는 해충 저항성 면화나 우간다 바나나 농가를 덮친 해충 문제를 해결한 해충 저항성 바나나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는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식물시스템공학연구센터 책임연구원팀이 고구마 속 IbOr이라는 유전자가 카로티노이드 축적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이 유전자를 안토시아닌이 풍부한 자색고구마에 발현시켜 카로티노이드와 안토시아닌이 모두 풍부한 고구마를 만들었다. doi: 10.1093/jxb/ery023
곽 책임연구원은 “고구마 속 IbOr 유전자는 고온과 가뭄, 고염분에도 강하며, 모든 식물에 적용할 수 있어 다양한 환경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황금쌀이 개발된 바 있다. 하선화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관(현 경희대 유전공학과 교수) 팀은 고추 속 PSY 유전자로 황금쌀을 만들어 국제학술지 ‘식물생명공학저널’ 2010년 10월호에 발표했다. doi: 10.1111/j.1467-7652.2010.00543.x
GMO 콩과 옥수수, 기름과 전분 원료로 사용
황금쌀처럼 유전자를 변형한 GMO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환경에 미칠 영향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나라마다 판단이 엇갈린다.
국내에서도 GMO 허용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 우리 정부가 상업적으로 재배를 허가한 GMO는 없다. 상업적 재배까지 이어지려면 농촌진흥청, 국립환경과학원, 국립수산과학원 등 여러 기관이 환경 위해성에 대해 협의 심사를 진행해야 하며, 식용 작물의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인체 위해성 검사도 별도로 거쳐야 한다.
박순기 경북대 식품생명과학전공 교수(농촌진흥청 농업생명공학연구단장)는 “환경단체의 반대와 비우호적인 국민 정서 등으로 기업이 GMO 재배 허가 신청도 못 하고 있다”며 “현재 상업적 재배를 신청한 경우는 식용으로 쓰지 않는 제초제 저항성 잔디뿐인데, 그마저도 신청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아직 심사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총 6종(콩, 옥수수, 면화, 카놀라, 알팔파, 사탕무)의 작물만 적용 GMO로 수입 가능하다. 주로 콩과 옥수수를 많이 수입하는데, 콩으로는 식용유를, 옥수수로는 전분이나 당을 만든다. 박 교수는 “이미 많은 사람이 여러 형태로 GMO를 섭취하고 있다”며 “GMO가 식탁에 오른 지 10년 이상 지났지만 부작용에 관한 사례는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6년 노벨상 수상자 151명은 그린피스에 GMO 반대 운동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보냈다. 199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리처드 로버츠 미국 노스이스턴대 교수는 2017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주최한 워크숍에 참석해 “GMO를 악마화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2018년 일본 전문가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GMO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미국 농무부도 유전자 가위 같은 새로운 육종 기술은 전향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다. 박 교수는 “최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GMO가 등장하고 있다”며 “변화하는 연구 환경에 맞춰 GMO 심사 절차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