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전문가가 미래에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인공지능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인간과 똑같은 육체까지 갖춘다면, 정말로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별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렵다면 그 인공지능을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200살을 맞은 사나이
‘200살을 맞은 사나이’는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에 속한 단편입니다. 1999년에는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인공지능 로봇 앤드류는 예술품을 만들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평범한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한 마틴 가족은 앤드류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작품을 팔아서 번 돈도 앤드류의 명의로 재산을 신탁해 둡니다. 앤드류는 이 재산을 이용해 자신의 자유를 사려고 합니다.
앤드류는 판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자유를 원합니다.” 그 말을 들은 판사는 이런 판결을 내립니다. “자유라는 개념과 자유로운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진보된 정신을 가진 존재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죠.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앤드류는 로봇일 뿐입니다. 인간의 말에 복종해야 하고,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법칙에 묶여 있습니다.
무뢰한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한 앤드류는 마틴 일가의 도움을 받아 이유 없이 로봇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평생 앤드류를 지지해 온 작은 아씨는 이 소식을 들은 뒤 안심하며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앤드류의 여정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앤드류는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로봇은 로봇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은 앤드류는 두뇌를 제외한 자신의 몸을 유기물로 만든 안드로이드 몸체로 바꾸는 수술을 받습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겉모습이 인간과 흡사해진 뒤에도 ‘인공생리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합니다. 인공장기를 개발해 호흡을 하고 음식을 섭취해 에너지를 얻는 시스템을 만들지요. 앤드류의 연구는 인간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이미 많은 인간이 장기를 인공으로 대체해 수명을 늘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앤드류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자신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금속으로 만든 두뇌 때문이라고요. 대신 앤드류는 몸을 바꿔 가며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앤드류는 두뇌를 유기 신경 조직과 연결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자살과 다름없는 이 행위는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앤드류는 200살이 되는 생일에 인간으로 인정받으며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는 SF작가 필립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는 소설과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데커드는 레플리컨트를 전문적으로 제거하는 특수 요원입니다. 레플리컨트는 지적으로는 인간과 동등하고, 신체적으로는 인간보다 뛰어난 안드로이드입니다. 하지만 수명은 4년밖에 안 되고 목적을 다하거나 결함이 생기면 폐기됩니다. 인간은 이들을 전투나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게 합니다.
레이첼이 인간인지 레플리컨트인지 알아내는 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데커드는 레이첼이 인간이라는 가짜 기억을 주입받은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 뒤 도망친 레플리컨트가 살던 집에서 사진과 합성 뱀 가죽 같은 물건을 찾아냅니다.
집으로 돌아온 데커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레이첼을 발견합니다.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믿음이 흔들리면서 혼란이 온 상태입니다. 레이첼은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데커드는 레이첼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은 기억이라는 사실을 밝혀버립니다. 레이첼은 눈물을 흘리며 떠납니다.
데커드는 뱀 가죽을 실마리 삼아 한 성인클럽에서 정체를 숨긴 채 일하는 레플리컨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추격전 끝에 사살합니다. 데커드는 도망친 레이첼까지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이첼을 발견하고도 죽이지 않습니다.
로이는 타이렐에게 더 많은 삶을 요구합니다. 4년이라는 기간은 너무 짧았던 것이지요. 인간의 노예로 태어난 레플리컨트지만, 더 오랫동안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타이렐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절합니다. 로이는 타이렐을 죽입니다.
한편, 데커드는 로이가 숨어있던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남아있던 다른 한 레플리컨트의 습격을 받습니다. 데커드는 격투 끝에 레플리컨트를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그때 로이가 돌아옵니다. 로이는 막강한 신체 능력으로 데커드를 몰아붙입니다.
데커드는 옥상으로 도망쳤다가 그만 추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간신히 가장자리를 붙잡고 버티지만, 비가 와서 손이 미끄럽습니다. 데커드가 떨어지려 하자 로이가 데커드를 붙잡아 끌어올려 줍니다. 데커드가 보는 앞에서 로이는 자신이 우주에서 본 광경을 묘사하며 “그 모든 순간이 빗속의 눈물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수명이 다해 죽습니다.
● 얼마나 인간 같아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 두 작품 속 앤드류와 레플리컨트의 운명은 다르게 흘러갑니다. 앤드류는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며 죽음마저 닮으려고 노력한 끝에 결국 인간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반면, 레플리컨트는 인간과 동급의 지적 능력과 더 우월한 신체적 능력을 지니고도 도구 취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족쇄 같은 짧은 수명에서 벗어나려고 창조자까지 찾아가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영화를 보면 레플리컨트가 데커드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화면은 그 추격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모습을 비춥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레플리컨트와 무표정한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따지고 보면, 앤드류가 인간으로 인정받은 것도 법적인 기준에 불과합니다.
철학자 존 설은 1982년 ‘중국어 방’이라는 사고실험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방에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어떤 중국어에도 대꾸할 수 있는 지침과 연필, 종이 등이 있습니다. 작은 구멍을 통해 중국어로 질문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지침을 보고 답변을 중국어로 써서 밖으로 내보냅니다. 이 방을 중국어 방이라고 합니다.
중국어 방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계처럼 정해진 대로 답변을 만들 뿐이지요. 자신이 뭐라고 답변하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어 방을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중국어 방은 인간과 똑같아 보이는 안드로이드 몸이 됩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지침은 소프트웨어가 되겠지요. 중국어 질문과 답변은 각각 외부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같은 논리로 보면, 겉모습이나 행동이 아무리 인간과 똑같다고 해도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처럼 의식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은 인공지능이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튜링 테스트를 비판하기 위해 이 사고실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어 방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인간 역시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불확실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뇌가 그저 정해진 대로 입력에 따른 출력을 내놓고 있을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인간이 될 수 있을지를 판단하려면, 그 전에 인간이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나 사이보그 기술이 계속 발달한다면, 인간의 정의가 오히려 점점 넓어질 수도 있겠지요. 인간도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앤드류는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굳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고호관. 건축과 과학사를 공부했고, 동아사이언스에서 과학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SF와 과학에 대한 글을 쓰거나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SF 명예의 전당’ ‘낙원의 샘’ ‘링월드’ ‘신의 망치’ 등이 있고, 최근 달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룬 책 ‘우주로 가는 문, 달’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