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DF 파일에서 고화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Under the sea~♪, under the sea~♬’.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순간, 머릿속에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주제곡이 울려 퍼졌다. 겉보기에는 동해와 별 다를 바 없었는데, 그 속은 달랐다. 맑디맑은 바닷속은 맨눈으로도 10m 아래 바닥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팔뚝만 한 해삼이 촉수를 펼쳐 정신 없이 모래를 긁어 먹고, 총천연색의 열대어들이 산호 안팎을 호기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적도에 가까운 북위 7도에 위치한 이곳은 미크로네시아 축주(州) 웨노섬이다.
추장과 SNS가 공존하는 웨노섬
8월 20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학생 참가자 9명은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다. 인천에서 괌, 괌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두 시간 가까이 날아 마침내 미크로네시아에 발을 내디뎠다. 총 14시간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인공위성으로도 사진 한 장에 다 담지 못하는 드넓은 태평양에는 수많은 섬이 각기 국가를 이루고 있다. 그중 미크로네시아 연방공화국(FSM·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은 태평양 서쪽 600여 개의 섬을 품고 있는 도서국이다.
미크로네시아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약 1만3000명)가 사는 웨노섬은 오랜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추장 중심의 사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공항이 있는 시내에서는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거리를 오가지만, 조금만 산속으로 들어가면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낯선 곳 한 편에 태극기가 걸린 흰색 건물이 하나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이 운영하는 태평양해양과학기지(KSORC)다. 2000년에 세워진 태평양해양과학기지는 지난 19년 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해양을 연구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국내 해양과학자들이 상주하거나 수시로 오가면서 지천에 널린 건강한 산호와 열대어 등 수많은 생물종을 연구하고 해양자원으로 개발했다. 필요시에는 채집한 시료를 국내에 들여와 연구를 이어나갔다.
KIOST는 이곳의 열대 해양 연구를 청소년들도 직접 체험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열대해양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KIO-Dream 열대해양캠프’라는 이름으로 고등학생 8명과 대학원생 1명이 참여했다. 평생 잊지 못할 새로운 경험과 막연했던 꿈에 대한 확신을 얻은 그들의 8박 9일 일정에 동행했다.
▲ PDF 파일에서 고화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지인에게 ‘보스’라 불린 해양과학자
이번 캠프를 이끈 박흥식 KIOST 해양생물자원연구단 책임연구원은 웨노섬 현지인들에게 ‘보스(boss)’로 불린다. 2000년 태평양해양과학기지 설립 당시부터 이곳에서 열대해양의 생물 연구에 몸담아 온 터줏대감이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기지 대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다시 찾은 기지. 그의 방문 소식을 듣고 입구부터 마중 나온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Is it your job?(이게 너의 일이니?)”
말린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두른 한 현지인에게 박 책임연구원이 놀란 듯 물었다. 10여 년 전부터 봤던 동네 어린 소녀가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태평양해양과학기지에 취직한 것이다.
현재 기지에는 한국인 직원 4명(기지 대장 1명, 직원 3명) 외에도 기지를 관리하는 현지인 직원이 20명가량 있다. 박 책임연구원은 그들과 반갑게 재회하며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20년 동안 기지 내 식당에서 일하며 한식에 통달한 현지인 직원은 그날 저녁 각종 한국식 밑반찬과 함께 앞바다에서 갓 잡은 랍스터를 가득 내왔다.
박 책임연구원의 흔적은 기지 곳곳에 있었다. 특히 배양동에서 자라고 있는 관상어, 자이언트 클램(대왕조개) 등 다양한 해양 생물들은 모두 박 책임연구원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19년간 박 책임연구원을 포함해 이곳을 거쳐 간 연구원들은 열대해양 생물의 특성을 알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특성을 이용해 신물질을 만들어내거나 양식법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박 책임연구원이 개발한 흑진주 양식기술은 2008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 책임연구원은 현지인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바로 학생들을 배에 태워 기지 근처 오사쿠라 섬으로 향했다. 박 책임연구원은 “요즘에는 영상이나 사진 등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 많지만, 직접 접촉하고 경험하면 다른 차원의 느낌을 준다”며 “이번 캠프의 유일한 목표도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열대 바다에 뛰어들어 해양과학뿐만 아니라 이곳의 삶과 문화를 몸소 느껴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동안 맹그로브에서 산호초까지 열대해양 생물들을 직접 연구한 박 책임연구원은 캠프 내내 학생들이 한 번이라도 더 바다 아래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바닷속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말 서툰 유학생이 수다쟁이가 되기까지
인천국제공항에서 괌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학생 참가자 몇몇이 모여앉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유독 멀찍이 떨어져 앉은 학생 참가자가 있었다.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던 그는 다음날 태평양해양과학기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기지에서의 첫 저녁 식사. 학생 참가자들이 모여 앉은 식탁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발음이 어딘가 약간 어색했다. 그는 일곱 살에 한국을 떠나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 외국에서 살고 있었다.
안재윤 군(니제르 사헬아카데미 12학년)은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와 케냐를 거쳐 현재는 니제르에 거주하고 있다. 미국 대학 입학을 앞두고 한국에 머물던 중 KIO-Dream 열대해양캠프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고.
비록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해양과학자가 되겠다는 목표만큼은 참가자들 가운데서 가장 뚜렷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해양생물학자의 꿈을 꾼 그는 지난해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해 인도양의 열대해양 생물들을 직접 관찰하기도 했다. 안 군은 “해양 생물 중에서도 산호를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며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해양 생물을 연구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캠프 내내 이어진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은 그에게 천국에서의 시간과도 같았다. 바다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색색의 산호들이 빛나고 있었다. 박 책임연구원은 “산호의 촉수 색깔은 공생하는 플랑크톤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했다.
플랑크톤이 광합성을 통해 얻은 유기물을 동물인 산호에게 주고, 대신 산호는 플랑크톤이 살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광합성에 필요한 무기물을 제공하며 공생하는 것이다. 플랑크톤은 산호의 촉수에 밀집해 사는데 이때 플랑크톤이 갖고 있는 색소에 따라 촉수의 색깔이 결정된다.
안 군은 “산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산호가 플랑크톤과 공생을 통해 바다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며 “산호가 바다에 얼마나 중요한 생물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산호에 관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캠프가 끝날 때쯤 어느새 안 군은 수다쟁이가 돼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장난을 치며 한층 친해졌다. 그는 현지 고등학교인 세이비어스쿨을 방문했을 때 다른 참가자들을 위해 통역도 자처했다.
안 군은 “솔직히 처음에는 참가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을 정말 많이 했는데, 친구들이 서툰 내 얘기도 들어주고 자신의 얘기도 들려줘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며 “친구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 PDF 파일에서 고화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대해양에서 확인한 미래 환경운동가
박 책임연구원은 “열대해양 체험 캠프를 열 번 넘게 이끌었는데, 이번처럼 전원이 고등학생 이상인 경우는 처음”이라며 “참가자들이 열대해양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 예상한 수준 이상의 질문들을 쏟아낸다”고 혀를 내둘렀다.
참가자 중에서도 정예원 양(용인외대부고 3학년)의 습득력은 돋보였다. 정 양은 어렸을 때부터 환경보호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얼마 전 해양 생물 보호를 위한 일러스트책자를 만들기도 했다”며 “활발히 활동하던 SNS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모집해 함께 만들었다”고 말했다.
캠프에서도 그의 관심은 환경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이렇게 넓고 맑은 바닷가를 본 적이 없다”며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바다를 보니 이런 청정의 자연을 당연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열대 해양이 맑은 이유는 쓰레기 같은 각종 오염물의 유입이 애초에 적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 플랑크톤이 바다를 부유하지 않고 대부분 산호에 붙어 살기 때문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 바다와 달리 열대지역 바다에는 플랑크톤에게 꼭 필요한 인(P) 성분이 적다”며 “그나마 산호로부터 인 성분을 얻을 수 있어 플랑크톤이 산호 촉수에 붙어서 살게 됐고, 이를 통해 바다가 더 투명하게 보인다”고 설명했다.
열대 바다가 맑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웨노섬 해안가를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맹그로브다. 캠프 3일 차 오전, 학생들은 열대지역에만 서식하는 염생식물인 맹그로브 관찰에 나섰다. 맹그로브는 평소 바다에 잠겨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큰 썰물 때는 밑부분을 드러내는데,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에 늘어서 자란다.
“맹그로브에 너무 가까이 가면 썩은 냄새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맹그로브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다가가는 학생들에게 박 책임연구원이 경고했다. 사실 썩은 냄새의 정체는 육지로부터 흘러들어온 유기물이다. 육지의 유기물들이 빗물이나 강에 쓸려 바다로 유입되는데, 맹그로브가 해안가에서 이런 유기물을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유기물이 가득한 맹그로브 숲에는 똥 냄새와도 비슷한 풍부한 유기물 냄새가 나기도 한다. 덕분에 바다는 맑은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정 양은 “열대해양이 맑게 유지되는 이유를 알고 나니 환경보호의 필요성이 피부에 와 닿았다”며 “이번 캠프에서 자연을 직접 경험하면서 진로에 관한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다”고 말했다.
꿈을 만든, 꿈을 다진 열대해양
참가자들은 저마다 꿈이 달랐지만 꿈에 다가가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캠프를 즐겼다. 바다를 세상에 소개하는 영상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김준성 군(제주 한림공고 1학년)은 바닷속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액션캠을 매일 같이 들고 다니며 열대 해양을 영상으로 담았다.
남극세종과학기지와 북극다산과학기지에서 미세플라스틱을 연구한 경험이 있는 김지수 인천대 해양과학과 연구원은 “나중에 꼭 이곳에 다시 와서 열대 바닷속에는 미세플라스틱이 얼마나 있는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훗날 해양경찰을 꿈꾸는 박진성 군(부산 해사고 1학년)은 학생들과 동행한 해양경찰 직원과 진로를 상담하기도 했다. 박 군의 질문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편을 기다리는 공항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이번 캠프에서 꿈이 바뀐 참가자도 있었다. 캠프에서는 실험 프로그램을 두 차례 진행하는 등 해양생물, 특히 해양동물을 가까이에서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바다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건진 해삼과 불가사리, 어류 등을 해부하고 내부 구조를 하나씩 알아갔고, 기지에 마련된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했다. 낯선 모양의 생물들도 나름의 구조를 갖추고, 각기 그 환경에 맞는 삶을 살아가며 지구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상진 군(경기 충훈고 2학년)은 “원래는 유전자 재조합으로 식물을 개량해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며 “이번 캠프에서 다양한 해양동물을 보며 심해생물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생물을 해부하며 징그러워하면서도 열정적인 탐구 자세로 임한 박지민 군(서울 장훈고 2학년), 그리고 생애 첫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하며 어떤 일에도 도전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강진희 양(제주 신성여고 2학년)과 손규원 양(경북 울진고 1학년)까지. 이들은 훗날 꿈에 다가갔을 때 올 여름의 열대 바다를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