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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로켓] 한국 로켓 개발의 서막, 과학로켓 ‘KSR’

※편집자 주.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개발할 수 있게 된 데는 과학로켓 ‘KSR(Korea Sounding Rocket)’ 시리즈의 역할이 컸다. 미사일을 실어 나르는 로켓이 아니면 그 필요성을 인정받기 어렵던 30여 년 전, 과학로켓 연구가 어떻게 싹을 틔워 나로호 개발로 이어졌는지, 나로호 발사를 성공으로 이끈 조광래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이 국내 로켓 개발에 얽힌 이야기를 과학동아에 연재한다.

 

 

1998년 9월 1일 평소 알고 지내던 청와대 외교안보 관계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화급하게 몇 가지 숫자를 불러주면서 계산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로켓의 비행궤적이었다. 전문 연구원들이 계산을 하는 사이 또 다른 정부기관으로부터 동일한 요청이 들어왔다. 북한이 대포동 1호를 발사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대포동이 불붙인 과학로켓 연구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인공위성을 우주로 올리기 위해 추진체인 로켓을 발사한 흔적이었고, 위성은 궤도 진입을 못한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분석 결과 발표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고민 끝에 인공위성 발사 시도는 맞는 것으로 보이나 궤도 진입에는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다른 우주 기술 선진국도 우리와 같은 분석 내용을 제출했다고 한다. 국내 연구진의 계산 능력과 분석 수준이 어느 정도는 입증된 셈이다.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는 해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특히 일본은 이 사건을 아주 상세히 다뤘다. 그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성능 지구관측위성시스템 구축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계획한 위성들이 지금까지도 우주 궤도를 돌고 있다. 
국내에 미친 파장도 적지 않았다. ‘도대체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한국도 조속히 우주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연구비만 지원되면 2005년경에는 한국도 로켓을 발사할 수 있다’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타나 수많은 의견들을 쏟아냈다. 
그동안 10년 넘게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로켓 개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득하고 다녔던, 하지만 번번이 경제성을 이유로 거절당했던 우리 연구팀에게는 참으로 기운 빠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2010년 예정이었던 한국의 자체 로켓 발사 계획은 별다른 기술적 검토도 없이 2005년으로 크게 앞당겨졌다. 

 

최초의 과학로켓 KSR-I, ‘원샷원킬’ 하늘을 날다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에 전 세계가 민감하게 반응한 건 로켓이 군사적 용도로, 또는 평화적 용도로 모두 사용 가능한 물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부터 로켓을 개발했지만 그 때는 군사용 미사일 위주였다. 우리나라가 소위 말하는 평화적 용도의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다. 
이중 목적이 가능한 로켓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로켓 개발을 위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해왔다. 우리나라는 1996년 4월 30일 제12회 종합과학기술심의회에서 우주개발중장기 기본계획을 의결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었지만 국가적인 지원과 국내 연구진의 저력을 믿고 시작한 도전이었다. 
과학로켓의 이름은 KSR로 정했다. KSR은 ‘코리아 사운딩 로켓(Korea Sounding Rocket)’을 줄인 단어로 과학적 관측을 위해 하늘로 보내는 로켓이라는 뜻을 가졌다. KSR-I은 1단으로 된 고체 추진기관 로켓으로 길이가 6.7m, 지름이 42cm, 무게가 1.25t(톤), 추력 8.8t으로 설계됐다. 유도제어기능이 없는 기초적인 수준의 무유도 로켓으로, 비행 중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1초에 4회전 정도로 로켓을 회전시켜 안정성을 확보하는 스핀 안정화 방식을 적용했다. 
개발은 성공적이었다. 1993년 6월 4일 충남 태안 해안에서 첫 발사를 시도했는데, 곧바로 로켓이 최고 초속 989m로 최고 고도 39km까지 77km 거리를 190초 동안 비행했다. 군이 아닌 민간에서 수행한 최초의 과학로켓 발사였다. 같은 해 9월 1일 두 번째 발사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로켓에 장착된 오존층 관측 센서로 한반도 상공의 오존층 수직 분포 상태를 직접 측정하고 학계에도 보고했다. 
달콤한 성공은 지난 3년여 간의 고생을 싹 잊게 해줬다. 전용 발사대가 없어 일본 우주과학연구소(ISAS)와 가고시마(鹿兒島) 발사장에서 어깨너머로 본 지식으로 이동형 발사대를 만들어야 했던 기억이 났다. 
심지어 발사대를 운용하고 연습할 장소가 없어 대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당시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항공우주연구소) 기숙사 옆 주차장에 발사대를 가져다 놓고 로켓을 장착하고 기립시키고 점화기를 점화시키는 연습을 계속했더랬다. 주차장에 로켓 발사대라니, 다시 떠올려 봐도 이질적인 장면이다. 

 

값진 실패를 안겨 준 KSR-II

 

KSR-I 성공은 자연스레 KSR-Ⅱ 개발로 이어졌다. 1997년 7월 9일 KSR-Ⅱ 발사를 시도했다. KSR-Ⅱ는 KSR-I과는 달리 2단으로 된 고체 추진기관 로켓으로 설계됐다. KSR-Ⅱ는 관성항법장치를 탑재해 조종날개로 비행 초기 자세제어가 가능했다. 개발에는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KSR-Ⅱ는 이륙 후 20.8초 만에 통신이 두절됐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로켓이 만에 하나 지상에 추락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행히 KSR-Ⅱ는 낙하할 것으로 예상된 통제 지역에 무사히 ‘입수’했다. 비록 통신은 두절됐지만 로켓이 정상적인 궤도로 비행할 수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가 가치 있는 실패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발사장에서 철수해 연구소로 돌아와 보니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전신)에서는 이미 조사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곧이어 조사단이 들이닥쳤다. 비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게다가 로켓 시스템을 한 번도 개발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실패 원인을 규명하며 연구원들에게 이중 삼중의 부담을 안겼다. 연구원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고, 건강에도 이상이 생겼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밤낮 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그 결과 유력한 실패 원인이 관성항법장치의 전자회로를 구성하는 1~2mm 크기의 작은 커패시터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허무하지만 로켓 개발 과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를 보강해 1998년 6월 11일 2차 발사를 수행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완벽하게 날았다. KSR-Ⅱ는 우리나라가 고도 100km 이상의 ‘진짜 우주’로 보낸 첫 물체였다.

 

 

크리스마스이브, KSR-III를 선물받다

KSR-I과 KSR-Ⅱ는 고체 추진기관을 사용해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연구개발하기에는 국제적인 제약이 많았다. 고체 추진기관은 별도로 연료를 주입할 필요가 없어 발사가 비교적 간편하다 보니, 미사일 같은 무기류의 추진기관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KSR-Ⅲ는 과감히 액체 추진기관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97년 12월 24일 본격적으로 연구 개발에 착수했다. 
KSR-Ⅲ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연구팀에게 크리스마스이브 선물과 같았다. KSR-Ⅲ 연구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KSR-Ⅱ 1차 발사의 실패 원인을 규명하는 일과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앞선 프로젝트를 실패한 상황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당시 우주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정윤 과학기술부 국장(후일 과학기술부 차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KSA) 교장이다)이 소신을 갖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끝끝내 설득시키지 않았더라면 KSR-Ⅲ를 시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는 훗날 나로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KSR-Ⅲ의 핵심 구상은 소형 가압식 액체엔진을 개발하고 그것을 다발로 묶어 아주 큰 추력의 1단을 구성함으로써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로켓과 같은 거대 복합 체계종합시스템에서 어느 한 부분만 중요하거나 어렵다고 말하는 게 옳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KSR-Ⅲ에서는 가압식 액체엔진 개발이 핵심이었다. 
액체엔진은 연료와 산화제를 효율적인 비율로 적절하게 섞어 연소실 안에서 안정적으로 연소되게 하는 장치다. 이와 같은 연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온 고압의 가스가 노즐을 통해 분출되면서 추진력을 발생시키고, 이 추진력의 반작용 힘으로 로켓이 우주 공간으로 비행하게 된다. 
이것을 ‘독학’으로 개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위험천만한 연소시험이 매일매일 반복됐다. 만에 하나 연소가 안정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찰나에 폭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으며 가압식 엔진개발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2002년 초까지 연소시험은 총 45회, 연소시간(누적시간)은 700여 초를 기록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새로 개발한 액체엔진에 연료탱크, 산화제탱크, 각종 공급배관과 밸브류, 제어기 등을 적용해 로켓의 단을 구성하고 종합연소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그해 11월 28일 곧바로 발사를 감행했다. 700여 초 정도 연소시험을 수행한 엔진을 비행시키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훗날 러시아 엔진 전문가에게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자,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다소 무모해 보이더라도 일단 도전해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발사 당일 돌발 상황이 생겼다. 로켓을 발사할 때는 안전을 위해 비행궤도 상의 상공을 지나는 항공기에게 통보하고 낙하 예상 지역을 통행하는 선박을 막는다. KSR-Ⅲ도 해당 항공기에 통보하고 군과 해양경찰의 도움을 받아 낙하 예상 지역을 완전히 비운 후 로켓에 액체산소를 충전했다. 그런데, 외국 대형 화물선박 한 척이 막무가내로 낙하 지역을 지나가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로켓에 영하 183도의 액체산소를 충전한 상태에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기에 피가 마르는 듯했다. 
‘10, 9, 8, 7, 6, 5, 4, 3, 2, 1, 발사.’ 
오후 2시 52분 26초, KSR-Ⅲ가 이륙했다. 그때까지도 외국 화물선박은 KSR-Ⅲ의 예상 낙하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로켓이 낙하할 시간에는 선박이 해당 지역을 벗어날 것으로 보고 아슬아슬한 발사를 강행했다. 
길이 14m, 지름 1m, 연료를 포함한 무게가 6t인 KSR-Ⅲ는 연구진의 모든 걱정을 날리고 힘차게 하늘을 날았다. 최고 속도 초속 899m로 무려 231초 동안 비행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액체엔진 발사를 성공시킨 희열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KSR-I과 KSR-Ⅱ, KSR-Ⅲ는 훗날 새로운 발사체를 개발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특히 KSR-Ⅲ에서는 액체엔진을 비롯해 관성항법장치, 추력벡터제어시스템, 추력기 자세제어시스템 등의 부품을 모두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새로운 발사체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지와 용기를 얻었다. 

201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조광래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나로호개발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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