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전류의 공급 방식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8월 개봉하는 영화 ‘커런트 워(Current War)’는 새롭게 나온 교류 방식에 맞서 자신이 이룩한 직류 방식의 전력 공급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토머스 에디슨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천재 발명가 에디슨과 교류 방식을 완성한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그리고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조지 웨스팅하우스까지, 3인이 벌인 ‘전류 전쟁’의 민낯을 들여다보자.
노력의 대명사? 비정한 사업가
영화 초반부, 에디슨은 “나는 12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다 못 만들 만큼 아이디어가 많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1%의 영감과 99% 노력’을 강조했던 에디슨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1847년 태어난 에디슨은 실제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전등과 축음기 등 1093개의 특허를 가진 발명가로 성장한, 노력하는 천재였다. 그런 그가 잘했던 것이 또 있다. 본인의 개발한 기술로 돈을 버는 일, 바로 사업이었다.
1879년 에디슨은 시간이 지나도 전류의 크기와 방향이 변하지 않는 직류 방식을 이용해 백열전구를 완성했다. 영화에서 그는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백지수표를 가져올 준비는 됐지?”라고 말한다. 1년 뒤 에디슨은 당시 가장 빠른 증기 여객선인 ‘SS오레곤호’ 내부 전등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최초로 움직이는 물체에 전기가 들어온 사건이었다.
에디슨은 미국 뉴욕에 1881년 처음 직류발전소를 세웠고, 고객들에게 전기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에디슨이 만든 110V 전압을 쓰는 직류식의 전기 공급 시스템은 미국 전기 시장을 장악해 갔다. 한 발전소에서 반경 0.8km 내의 지역에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한계가 명확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성태 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장은 “전선에는 저항이 있고, 이 때문에 멀리 보낼수록 전력이 손실될 수밖에 없다”며 “전기를 멀리 보내려면 손실 전력을 고려해 결국 전압을 높여야 하는데, 당시에는 고전압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선을 굵게 제작해 저항을 낮춰 멀리 보낼 수도 있었지만, 전선의 원료인 구리가 너무 비싸 경제성이 떨어졌다.
에디슨이 이룩한 직류식 전기 공급 시스템은 1887년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교류 방식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직류식 전기 공급을 고집하며 자신의 사업을 지키려는 에디슨의 전류 전쟁도 이때부터 막을 올린다.
에디슨은 “고전압을 쓰는 교류가 사람을 죽인다”고 선전했고, 이를 전기의자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기의자 실험은 오히려 전류 전쟁에서 교류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교류를 흘린 전기의자로도 사형수를 단번에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에디슨이 급기야 웨스팅하우스가 자신의 기술을 훔쳐갔다며 억지를 쓰는 장면도 나온다.
거의 모든 현대 기술의 원조
전기와 무선통신 등 인류의 전기 시대를 완전히 뒤바꾼 이가 바로 테슬라다. 그의 얼굴은 세르비아를 여행하면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인이었던 테슬라를 기리기 위해 세르비아가 100디나르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테슬라와 에디슨은 결과적으로 원수가 됐지만, 모든 인연이 그렇듯 둘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공대를 나온 테슬라는 1884년 6월 미국 에디슨연구소 연구원으로 뽑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고, 이때 에디슨을 처음 만났다.
실제로 테슬라가 1919년 집필한 자서전에는 에디슨과의 첫 만남에 대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과학 교육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그처럼 뛰어난 성취를 이룬 거인이 놀라웠다”고 썼다(테슬라의 자서전은 올해 국내에서 ‘테슬라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다).
이들이 서로에게 신뢰를 쌓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 에디슨의 직류 방식을 도입한 SS오레곤호는 조명 장치가 고장 나 출항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테슬라가 수리하면서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의 신뢰는 금세 깨졌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직류용 표준 발전기의 철심을 짧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당시 돈으로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테슬라는 이후 1년간 오전 10시 30분부터 다음날 오전 5시 30분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연구에 매진했다. 결국 테슬라는 이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그런데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주급 10달러만 올려주겠다며 말을 뒤집었고, 이에 실망한 테슬라는 1885년 회사를 그만뒀다.
테슬라의 천재성을 알아본 투자자들은 테슬라를 찾아왔고,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하기로 했다. 테슬라는 대학교 2학년 때 직류 발전기를 처음 접한 이후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교류 전동기와 변압기를 만들기 시작해 1887년 6월 에디슨의 전력 공급 사업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교류식 전기 공급 시스템을 완성했다.
이밖에도 테슬라는 전기기계용 전류 전환 장치, 전기 아크등, 최초의 X선, 고전압용 코일, 무선 라디오 등을 발명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다른 전기공학자들처럼 자신의 발명과 이론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은데다 기이하고 괴팍한 성격 탓에 처음에는 저평가됐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전기공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에디슨을 굴복시킨 사업가
테슬라가 완성한 교류식 전기 공급 시스템의 특허권은 웨스팅하우스(당시 정식 명칭은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컴퍼니’였다)가 곧바로 사들였다. 웨스팅하우스는 공기브레이크를 발명한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설립한 종합 전기 회사였다.
영화에서 웨스팅하우스를 만난 테슬라는 “에디슨보다 나은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테슬라의 교류식 전기 공급 시스템이 장거리 송전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판단한 웨스팅하우스는 이 방식을 발전소에 도입하려고 했고,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에디슨과 전류 전쟁을 벌이게 된다.
교류 방식의 송전 시스템을 대중에게 알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송전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에디슨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웨스팅하우스는 1891년 6월 19일 미국 콜로라도주 산미겔강에서 텔룰라이드 금광까지 약 4.2km에 걸쳐 교류 방식으로 전기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70km 송전에도 성공했다.
또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는 1893년 세계 만국박람회에서 백열등 9만6620개를 교류 방식으로 밝혔으며, 2년 뒤에는 교류발전소를 이용해 나이아가라 폭포에 수력발전소를 세우면서 사실상 교류 방식의 효용성을 인정받게 됐다. 결국 에디슨의 직류발전소는 설 자리를 잃게 됐고, 이후 교류식 송전 시스템이 지금까지 130년 간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송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직류식 송전 시스템의 필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 교류가 전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변압 기술이 부족했던 직류에 비해 유연하게 전압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거리를 송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론적으로 교류 방식이 직류 방식에 비해 송전 효율이 떨어진다. 전류가 100이 필요하다고 할 때, 직류로는 100만 보내면 되지만 교류는 그보다 더 많이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한 센터장은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고압의 교류를 전력변환기를 이용해 고압의 직류로 바꾸고 이를 다시 마을 인근에서 교류로 바꿔 공급하는 고압직류송전(HVDC) 방식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며 “이를 활용하면 에디슨 시대와는 달리 직류 방식으로도 전력 손실 없이 먼 곳에 전기를 배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압직류송전 방식은 중국 등에서 일부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