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계획적일까, 우연일까. 우주 탄생 초기에 물질과 반물질이 미묘한 비대칭을 이뤄 오늘날의 우주가 형성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중우주(Multiverse) 이론은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다중우주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외에도 무수히 많은 우주가 있다고 본다. 물질과 반물질의 양이 많고 적음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는 우주가 무한히 존재하고, 그중에서 마침 물질이 반물질보다 10억분의 1 정도 미세하게 더 많은 우리 우주와 같은 일부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다중우주 이론에 의하면 우리 우주는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우리 우주의 역사 또한 다중우주에 견주면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 우주에서만 임의로 작동하는 조건들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우연히 행성들의 속성이나 원자 속 전자의 에너지 상태를 결정하는 매개변수가 생명 친화적으로 세팅됐고, 다른 많은 우주는 이런 매개변수가 생명이 탄생할 수 없도록 세팅됐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가 다중우주 이론‘들’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중우주 아이디어는 이름처럼 다중적이다. 한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맥스 테그마크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물리학과 교수팀은 이를 4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 다중우주는 우리의 관측 한계를 벗어난 지역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다. 오늘날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범위는 약 465억 광년으로 한정돼 있다. 하지만 관측 가능한 우주 범위 밖에서 우주가 멈춘다는 증거는 없다. 그 너머에서 반지름이 465억 광년인 또 하나의 공간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처럼 캡슐 모양의 우주가 계란판처럼 끝없이 늘어선 다중우주를 ‘누벼 이은 다중우주’ ‘패치 다중우주’ ‘허블 볼륨 다중우주’ 등으로 부른다.
2006년 테그마크 교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입자가 10115개 존재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입자 하나의 배열을 2진부호로 계산하면 모든 입자가 만들 수 있는 배열의 수는 210115개가 된다. 이는 엄청나게 큰 수지만 유한한 값이다. 만약 우주의 크기가 무한이라면, 그래서 입자 배열이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한 개 있다면, 확률적으로 우리 우주와 입자 배열이 똑같은 우주가 다시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우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을 걸로 예상된다. 그 우주들 속에서 나의 도플갱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단계 다중우주는 우리 우주와 다른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우리와 전혀 다른 다중우주다. 대표적인 것이 영원한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다. 먼저 인플레이션 이론부터 살펴보자.
인플레이션 이론은 급팽창 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우주가 밀도가 무한한 한 공간에서 시작됐으며, 초창기에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에서는 우주가 척력을 발생시키는 인플라톤(Inflaton) 입자의 장(Field)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본다. 우주가 탄생한 지 10-32초만에 1030배로 팽창하자, 이것들의 에너지가 뚝 떨어지면서 물질과 암흑물질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주 초창기에 최초로 방출한 빛이 남긴 온도 흔적(우주배경복사)이 균질한 것은 인플레이션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영원한 인플레이션 다중우주에서는 이러한 인플레이션이 계속 일어나며 끊임없이 새끼 우주가 태어난다. 인플라톤 입자의 에너지 상태가 변덕스럽게 바뀌면서 어딘가에는 팽창이 일어나고, 어딘가에는 뻥 뚫린 공백이 생기면서 그 안에 물질과 은하가 만들어진다. 우주 여기저기에 우주가 계속 생겨나는 과정은 포도송이 모양이나 빵 속 기포의 형태로 많이 묘사된다. 각각의 우주들은 물리법칙이 완전히 다른 우주일 가능성이 있다.
3단계 다중우주는 양자역학과 관련이 깊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는 파동함수로 설명된다. 파동함수는 입자가 어떤 상태(위치, 에너지)를 가질 확률을 나타낸다. 가령 책상 근처 볼펜의 위치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를 구하라면, 볼펜이 책상 아래 30cm에 있을 확률이 9%, 책상 위 5cm에 있을 확률이 90%, 5500km 상공에 있을 확률이 1%라고 계산하는 방식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볼 때 볼펜은 세 곳에 모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다가 관측을 하면 한 곳에 100% 존재하는 것으로 확률이 바뀐다.
여기서도 다중우주 아이디어가 나온다. 관측을 해도 파동함수가 붕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책상 아래, 위, 5500km 상공 모두에 볼펜이 존재한다. 다만 세 곳에 각각 볼펜이 있는 세계가 ‘갈라질’ 뿐이다. 이때 갈라진 세계 하나하나가 다중우주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우리가 행하는 판단과 행동 각각이 우주를 갈라놓는다. A라는 독자가 이 글을 끝까지 읽을지 건너뛸지 고민하다 건너뛰는 선택을 했다면, 글을 끝까지 읽은 A가 살고 있는 우주와, 건너 뛴 A가 사는 우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 같은 양자 다중세계는 무한히 갈라질 수 있다.
마지막 4단계 다중우주는 수학으로 시뮬레이션 한 우주다. 흔히 물리적 우주가 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수학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수학이 있고 이것에 대응하는 물리적 우주가 있다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숫자나 방정식, 함수가 존재할 때, 이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컴퓨터로 다양한 수학적 우주를 프로그래밍 해 물리적 다중우주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리 우주도 입자의 상태, 상수, 파동함수 등 물리학적 조건을 절묘하게 맞춘 우주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중우주 아이디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신 끈이론과 관련된 다중우주도 있다(이 시점에서 이번 글을 건너 뛰어 새로운 다중우주를 창조하려는 독자들이 있을 듯하다). 그중 한 가지는 시간에 따라 나타나는 다중우주다. 지금까지 설명한 다중우주들은 모두 공간 속에 여러 개의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시간 속에 여럿이 존재하는, 즉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다중우주가 가능하다.
주기적 다중우주는 새로운 끈이론을 통해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설명 중 하나가 브레인(brane) 충돌 빅뱅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끈이론의 고차원 시공간을 떠다니는 3차원 공간(브레인)이고, 근처에 있는 다른 브레인과 주기적으로 충돌할 수 있다. 이 충돌이 바로 빅뱅이다. 빅뱅이 무한히 일어나며 새로운 우주를 하나씩 계속해서 창조할 수 있는 셈이다.
그밖에 우리 우주 안에 우주상수가 다른 새로운 우주가 생길 수 있고, 이 과정이 반복돼 다중우주가 된다는 랜드스케이프 다중우주론도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다중우주론은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론만 보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인플레이션 이론의 타당성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이론 자체는 우주배경복사 관측으로 설득력을 획득했지만, 핵심인 인플라톤 장은 측정을 통해 증명되지 않은 가설적인 장이다. 양자역학의 기묘한 특성에 의해 무한히 갈라질 수 있는 다중우주 또한 현실에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수많은 입자들로 구성된 현실 우주가 정말로 갈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우리 우주가 무한한 세계와 우주로 가득 찬,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이해한 것이다. 우리 우주는 인간이 탄생하기 좋은 절묘한 조건을 가졌지만 결코 특이한 우주는 아니다. 수많은 우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주장만큼이나 혁명적이다. 우리는 인류의 우주관이 또 한 번 바뀌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