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사망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요즘에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기사가 될 만큼, 산모의 사망률이 많이 줄었는데요. 하지만 이런 통계에 가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임신 중에 또는 출산 후에 산모가 겪는 각종 질병입니다. 2017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임신중독증 환자 수는 약 1만 명에 달합니다.
얼마 전 한 유명 연예인이 출산 후 응급실에 간 일을 두고 그가 의식불명 상태라는 루머가 퍼졌습니다. 루머는 그녀가 직접 임신중독의 한 종류인 ‘전(前)자간증(pre-eclampsia)’을 앓았다고 밝히면서 일단락됐죠.
실제로 전자간증은 전 세계 산모의 약 5%가 앓고 있는 병으로, 산모를 사망으로 이끄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지구 전체로 보면 한 시간에 5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한다고 하니 움찔할 수밖에 없습니다. doi:10.1016/S0140-6736(17)30184-8
첫 번째 질문. 임신중독 사망 제1원인 ‘전자간증’
전자간증은 ‘자간’ 전에 나타나는 증상을 말합니다. 자간은 임신기간의 끝무렵 또는 출산 후에 경련을 일으키는 질환인데요. 그 전에 고혈압, 부종, 단백뇨(소변에 단백질이 섞여 나오는 현상) 등이 발생하는 것을 전자간증이라고 부릅니다. 전자간증은 출산을 해야만 멈출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자간증은 조산의 원인이 되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산모의 장기가 파열되거나 뇌출혈로 이어집니다.
전자간증 환자들의 태반은 정상산모의 그것과 다릅니다(오른쪽 그림). 태반은 엄마의 혈액 속 산소와 영양분이 태아의 혈액으로 전해지도록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정상적인 산모의 경우, 착상이 일어난 후 배아 바깥쪽에 위치한 배아세포가 자궁에 위치한 엄마의 혈관쪽으로 이동해 혈관세포를 대체하면서 엄마의 혈액이 태반쪽으로 더 많이 흐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전자간증을 앓는 산모의 경우에는 배아세포가 엄마의 혈관세포쪽으로 덜 움직입니다. 그 결과 엄마의 혈관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태아로 향하는 혈액의 양도 증가하지 않게 됩니다.
전자간증은 유전이다?
과학자들은 그동안 전자간증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가 더뎠습니다. 2004년 전자간증의 50% 이상이 유전적 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같은 연구에서 아빠의 유전자가 엄마의 유전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알려졌죠.doi:10.1002/ajmg.a.30257
이 결과를 두고 과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전자간증은 엄마의 질병인데 아빠의 유전자도 관련이 깊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전자간증을 일으키는 엄마의 유전자를 찾아내는 후속 연구에서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자간증의 유전적 원인은 결국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전자간증의 특이한 유전적 배경은 다음 일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중국의 한 여성은 전자간증 때문에 아이를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 뻔 했습니다. 이에 그와 남편은 결국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갖기로 했습니다. 시험관 아기 수술을 통해 부부의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킨 후 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켰고 태아는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출산 예정일을 5주 가량 남기고 대리모가 전자간증 때문에 입원을 하게 됐습니다. 대리모의 혈압은 위험할 정도로 높았고, 의사는 산모의 신장이 파열될 것을 염려해 결국 제왕절개를 했습니다.
수정란의 유전자 발현, 산모 건강에 영향
이 일화에서 의아한 부분은 대리모의 과거입니다. 그는 이미 출산 경험이 있었고, 당시엔 전자간증 증상 없이 무사히 분만을 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전자간증의 원인이 엄마의 유전자가 아닌, 수정란일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2017년 수정란의 유전자가 전자간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doi:10.1038/ng.3895
영국과 아이슬란드, 핀란드 등 공동연구팀은 전자간증을 겪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 2658명과, 정상 분만한 아이 30만8292명의 유전자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전자간증 산모의 아이는 정상 분만한 아이와 달리 ‘FLT1’ 유전자 주변에 특정 염기서열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염기서열은 FLT1 유전자를 정상보다 더 많이 발현되거나 또는 적게 발현되게 할 수 있습니다.
FLT1 단백질은 임신 기간 동안 배아 바깥쪽에 위치한 배아세포에서 만들어지고 이것이 엄마의 혈관으로 들어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태아의 FLT1 유전자 발현 정도가 엄마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제안한 것이죠.
우리 주변에는 전자간증뿐만 아니라 ‘골반기저근장애(pelvic floor disorder)’ 등 출산 이후 달라진 몸 상태로 고통 받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출산은 분명 축복이지만, 이것이 산모에게 평생 신체적, 정신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 태아의 성별은 ‘도미노’처럼 결정된다?
태아의 성별은 수정되는 순간 정해집니다. X염색체 하나와 Y염색체 하나가 있으면 남성, X염색체 두개를 가지면 여성이 되죠. 하지만 성이 결정되는, 그리고 그 성이 유지되는 과정은 Y염색체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태아의 성별은 임신한 지 5개월 정도가 되면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통해 생식기 구조를 보고 판단하는 거죠. 그보다 전인 배아 발달 초기에는 이 같은 방법으로 성별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생식기가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배아에게 남자의 생식기와 여자의 생식기 구조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Y염색체는 어떻게 남성을 결정할까
배아 발달 초기의 생식기 구조를 ‘두 가능성을 모두 지닌(bipotent) 생식선(gonad)’이라고 부릅니다. 수정 후 약 7주가 지나면 그제야 Y염색체를 지닌 남자 배아는 여성의 생식기 구조를 없애고 남성 생식기 구조를 발달시키고, 반대로 Y염색체가 없는 여자 배아는 남성의 생식기 구조를 없애고 여성의 생식기 구조를 발달시킵니다.
그렇다면 Y염색체는 어떻게 ‘남성’을 결정하는 걸까요. 이 질문의 실마리는 몇몇의 ‘특별한’ 여성이 제시했습니다. 바로 Y염색체를 갖고 있지만 여성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죠. 외부생식기는 물론 자궁과 나팔관 역시 X염색체 두 개를 가진 일반 여성과 동일하지만, 난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해 불임인 여성들이었습니다.
Y염색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성이 됐는지 의문을 가진 과학자들은 이들의 Y염색체를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Y염색체에서 공통적으로 유전자 하나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doi: 10.1016/0092-8674(87)90595-2 이는 바꿔 말하면 남성을 결정짓는 데 해당 유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에 ‘SRY(Sex determining Region of the Y chromosom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SRY 유전자만 있으면 Y염색체가 없어도 남성이 될 수 있을까요?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이어진 후속 연구에서 과학자들은 X염색체 두 개를 가진 쥐의 수정란에 SRY 유전자를 넣었습니다. 그러자 태어난 쥐는 남성의 생식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SRY 유전자 하나가 성별을 결정한 셈입니다.doi: 10.1038/351117a0
남성 결정 도미노를 작동시키는 첫 블록
남성과 여성은 다른 점이 아주 많은데, 달랑 유전자 하나가 모든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는 게 신기하죠. 일종의 도미노 현상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 염색체에는 남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들과 여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그런데 SRY 유전자가 없으면 배아세포는 여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을 발현시킵니다. 여성 결정 유전자들이 발현되면 남성 결정 유전자들의 발현을 억제합니다.
반면 SRY 유전자가 있으면 배아세포는 남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을 발현시키고, 여성 결정 유전자들의 발현은 억제됩니다. 배아는 남성의 생식기를 발달시키고 남성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SRY 유전자가 도미노의 첫 블록이 되는 겁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 버리는 연구가 여러 편 발표됐습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암컷 쥐에서 여성 결정 유전자 중 하나를 지웠더니 난소 세포가 고환 세포로 변해버린 연구 결과가 대표적입니다.doi: 10.1016/j.cell.2009.11.021
또 그 반대로 다 자란 수컷 쥐의 남성 결정 유전자 중 하나를 지웠더니 고환 속 세포가 난소 세포로 변하고, 해당 쥐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분비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doi:10.1038/nature10239
성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여기서 놀라운 건 배아 발달 중에 유전자를 지운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성별이 결정된 후, 심지어 생식기도 다 만들어진 성체에서 유전자를 지웠더니 생식기의 세포가 남성에서 여성, 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을 결정짓는 기작이 발달 도중에만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이 결정된 이후에도 결정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은 여성 결정 기작을, 여성은 남성 결정 기작을 끊임없이 억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남성의 경우, 남성 결정 기작이 끊임없이 여성 결정 기작을 억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남성 결정 유전자가 지워지면 여성 결정 기작이 작동해 세포의 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심리적, 또는 문화적 관점의 성은 남성과 여성만으로 나누기 어렵지만, 생물학적 수준에서만큼은 이분법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위의 발견은 생물학적 성의 정의와 성의 유동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