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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화학자다. 화학자들은 물질을 원자 수준에서 들여다보려는 습성이 있다. 이런 필자에게 생물은 너무나 어려운 대상이었다. 세포 하나가 수천 개의 거대한 분자로 구성돼 있고, 그 구성 방식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세포들이 수조 개 모여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완성하고, 이런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 지구촌을 이룬다. 필자에게 생물이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 같았다. 


그런데 생물학에서도 화학자가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생명체가 굉장히 단순했던 그 시점, 바로 태초의 생명체에 대한 연구다. 그렇게 생명의 기원 연구는 필연적으로 필자를 생물학 연구로 이끌었다.

 


RNA에서 최초 생명체 탄생?


현재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한다. 여러 종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상생하면서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 이 지점에서 무수히 많은 궁금증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질문의 시작은 결국 생명의 기원일 것이다. 수많은 생명체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 현재 살아있는 생명을 역사의 산물로 삼아 어느 정도 추론해볼 수 있다. 현재 생명체들은 수많은 물질로 이뤄져있는데, 과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RNA, DNA, 단백질 등을 통해 생명의 기원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특히 RNA는 여러 중요한 성질들을 갖고 있다. 우선 생물의 유전정보를 보관하고 있으며, 수많은 생명체의 아주 중요한 생물학적, 화학적 작용에 관여한다. 더불어 RNA는 스스로 촉매 역할도 할 수 있다. 미국 화학자 토마스 체흐와 분자생물학자 시드니 올트먼이 이를 발견해 198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전까지는 세포 내에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단백질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RNA의 특수성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미국의 생물학자 알렉산더 리치가 1962년 ‘RNA 세계 가설(RNA world hypothesis)’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RNA 세계 가설’이라는 명칭은 1986년 미국 생화학자 월터 길버트가 처음 사용했다). 


이 가설에 의하면 지구 초창기에 RNA가 생성됐고, 그 중 자가 복제를 할 수 있는 촉매 성질의 RNA가 만들어졌으며, 이 RNA가 수천 만~수 억 년 동안 다른 물질들과 함께 진화하면서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다.

 

네 가지 필수조건을 만족시켜라


RNA가 생명체 기원 중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들을 반드시 만족해야만 한다. 


우선 유전정보를 보유한 뉴클레오티드*가 효소 없이 화학적으로 합성돼야 한다. 현대 생명체의 RNA는 효소(단백질)의 도움을 받아 합성된다. 그러나 생명이 창조되기 전에는 효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기 지구 환경에 있을 만한 물질들과 화학적인 반응만으로도 RNA의 뉴클레오티드가 합성된다는 걸 보여야 한다. 


두 번째로 뉴클레오티드 여러 개가 화학적 중합과정을 통해 합쳐져 짧은 사슬 형태의 올리고뉴클레오티드로 합성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조건은 이때 빠른 속도와 높은 정확도는 필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유전정보는 복제를 통해 전달되는데, 정확도가 낮으면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아져 몇 세대만 거쳐도 유전정보가 전달되기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복제된 수많은 올리고뉴클레오티드 중에 효소 능력을 지닌 RNA가 자연선택에 의해 자가 증식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네 가지 필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첫 번째 조건인 뉴클레오티드의 화학적 합성의 경우, 2009년 존 서더랜드 당시 영국 맨체스터대 화학과 연구원이 피리미딘계 뉴클레오티드(우리딘과 시티딘)의 합성 과정을 단계별로 밝혀내며 전체 뉴클레오티드 중 절반을 완성시켰다. doi:10.1038/nature08013 


하지만 퓨린계 뉴클레오티드(아데노신과 구아노신)의 합성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생명체는 최소 두 쌍의 서로 다른 염기쌍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수많은 생명체가 서로 다른 유전정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RNA 세계 가설의 완성을 위해서는 피리미딘계 뉴클레오티드를 제외한 또 다른 염기쌍 하나를 합성해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다만 퓨린계 뉴클레오티드는 초기 지구 환경에서 합성이 어렵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조금씩 다른 발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구 첫 생명체의 유전정보 체계가 수억 년이 흐른 현재의 유전정보와 썩 다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던 중 2017년 매튜 파우너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화학과 교수가 퓨린계 뉴클레오티드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현재 퓨린에 산소 하나가 덧붙여진 뉴클레오티드(8-oxo-퓨린계 뉴클레오티드)를 발견했다. doi: 10.1038/ncomms15270 파우너 교수는 피리미딘계 뉴클레오티드와 새로 발견된 뉴클레오티드들이 유사한 합성 과정을 갖는다는 점을 들며, 초기 생명체의 유전물질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아래 그림).

 

 

최초의 유전물질은 이노신


필자는 잭 쇼스택 미국 하버드대 화학및화학생물학부 교수 연구실에 합류해 첫 연구로 파우너 교수가 발견한 뉴클레오티드를 연구하게 됐다. 


우리 팀은 퓨린계 뉴클레오티드 중 하나인 아데노신을 활용했으며, 여기에 산소가 추가로 붙어도 복제하는 속도와 정확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산소가 붙은 뉴클레오티드는 기존의 아데노신보다 정확도가 크게 낮았고, 이로 인해 유전정보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이노신에 산소를 붙여보기로 했다. 파우너 교수의 연구에서 이노신에 산소가 붙은 화합물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실험을 왜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미 아데노신에 산소가 붙었을 때 복제를 못한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노신과 산소가 붙은 이노신(8-oxo-이노신)의 복제 속도를 비교하기 위해 우선 이노신의 복제 능력을 확인했는데, 촉매가 없는 원시 지구 환경에서도 이노신이 굉장히 신속하고 정확하게 복제를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퓨린계 뉴클레오티드에 속한 구아노신보다도 복제 능력이 뛰어났다. 


이노신은 초기 지구 환경에 풍부했을 것으로 예측되는 아질산(HNO2)에 의해 합성될 수 있다. 더군다나 구조도 퓨린계 뉴클레오티드 중 하나인 아데노신과 비슷해, 만약 아데노신의 합성 과정만 밝혀낼 수 있다면 이노신의 합성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팀은 이 연구결과를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지난해 12월 26일자에 발표했다. doi:10.1073/pnas.1814367115


여전히 생명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복잡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앞서 언급한 RNA 세계 가설의 네 가지 필수조건을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팀의 연구 결과에서처럼 첫 생명체의 유전정보가 지금과 다르다면 그것의 화학적 구조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다른 구조들이 어떻게 현재의 유전정보로 진화했는지도 이해해야한다. 


타임머신을 만들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서 지구 최초의 생명체를 관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명의 근원이라는 무모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에 완벽히 대답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접근법과 실험을 통해서 수많은 가설을 세우며 실험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알아내고, 그 결과를 모아 수많은 이론들을 비교하고 경쟁해보며 또 다른 가설을 세운다. 이런 과정을 보며 필자는 문득 이 연구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생물들의 경쟁과 상생, 그리고 진화하는 모습과 닮았음을 느낀다. 생명력을 가진 연구라고나 할까. 

 

 

글. 김서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학사를 마친 뒤 현재 하버드대 화학및화학생물학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화학을 연구하던 중 생물학에 관심이 생겨 'RNA 세계 가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skim07@fas.harvard.edu

 

 

*뉴클레오티드
DNA, RNA와 같은 핵산을 구성하는 구조적 단위. 염기의 t종류에 따라 크게 피리미딘계와 퓨린계로 나뉜다. RNA를 기준으로 피리미딘계는 염기가 우라실(U)이나 시토신(C)인 우리딘과 시티딘이 있으며, 퓨린계에는 염기가 아데닌(A)이나 구아닌(G)인 아데노신과 구아노신이 있다. 

201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서현
  • 에디터

    서동준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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