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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도 연구한다

과학고 창의적 연구 발표회

 

지난 2월 5일 코엑스에서는 전국 16개 과학고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창의적 사사연구 발표회가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친구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얼마전 영재학술세미나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헝가리 젬멜마이스대 피터 시멀리 교수는 “호기심 왕성한 고등학생들에게 바람직한 기회를 제공하는데 과학연구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등학생 시기는 낯선 환경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때라는 것. 기성 사회나 익숙한 제도, 과거에는 그대로 수용했던 것들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지니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시멀리 박사의 이런 주장에 다른 나라의 과학교육가나 영재전문가들도 대체로 공감한다.

미국과 유럽, 가까운 일본에서는 과학영재의 육성과 함께 청소년 대상의 과학 교육은 이미 보편화돼 있다. 1980년대부터 이공계 기피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들 나라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실험과 탐구 중심의 과학교육, 연구교육(R&E)이다. 얼마 전부터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우리나라에서도 조심스럽게 시도되기 시작했다.

지난 2월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대형 회의장들이 밀집한 건물 한편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어린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여드름이 채 피기 전인 앳된 모습들이다. 한쪽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머릿속에 무언가를 떠올리며 열심히 웅얼거린다. 다른 한편에서는 삼삼오오 노트북 주위에 모여 무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전날 발표 준비로 밤을 샌 듯 피곤함이 얼굴에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이날 열린 행사는 정부가 과학영재교육 내실화사업의 하나로 처음 실시한 창의적 사사연구과제 발표회. 창의적 사사연구란 어린 학생들과 대학 교수들이 팀을 이뤄 하나의 연구 주제를 놓고 연구와 교육을 함께 하는 일종의 실험학습을 뜻한다. 2000년 처음 시작된 사사연구가 정규 학교에 도입된 것은 지난 2003년 부산영재과학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때 나온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7월부터 전국의 과학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확대 실시됐다.

이 발표회는 바로 과학고 학생들이 대학 교수들의 지도를 받아 진행한 연구 성과를 결산하는 자리였다. 이번 행사에는 신설 학교인 부산 장영실과학고를 제외한 전국 16개 과학고 출신 72개 팀이 참가했다. 모두 72명의 대학교수와 지도교사 70명, 학생 2백88명이 이번 과제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연구 분야는 모두 6가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같은 기본적인 과학 과목은 물론 수학, 정보과학도 연구에 포함됐다. ‘마이크로폰 격자와 컴퓨터 인터페이스 측정을 이용한 음파 간섭과 회절 분석’ ‘백혈구 이동에 관여하는 표면 단백질 αxβ2의 활성화 구조분석’ ‘차세대 표시소자용 청색 유기전기발광재료 개발’ 등 이날 발표된 보고서 제목만 보더라도 학생들의 연구가 단순 실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이용한 생활효소에 관한 연구’나 ‘침입분석과 실시간 대응을 위한 알고리즘 개발’ ‘수학적 모델을 통한 인구역학 문제’로 넘어가면 ‘고등학생이 해봤자’라는 폄하가 어느새 목구명 뒤로 쏙 들어간다.

각 팀은 현직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게서 3차에 걸친 엄격한 평가를 받게 된다. 일단 서류평가를 거친 학생들은 다시 4명의 평가 교수들 앞에서 25분 동안 지난 6개월간 대학연구실과 학교를 오가며 틈틈이 연구한 결과를 설명해야 한다. 심사위원들로부터는 ‘왜 이런 주제를 잡았느냐’ ‘실험 환경은 어떻게 만들었냐’라는 상식적인 질문 외에도 모든 실험 과정과 장비의 특성을 잘 이해했는지를 묻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진다. 심사는 연구성과와 발표태도, 성실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뤄진다.

이날 참가한 72개팀 가운데 최우수평가를 받은 팀은 모두 16개팀. 6개 과목 가운데 우수팀이 많은 과목은 4팀을 배출한 생물과 수학이었다. 생물의 경우 지역성을 살린 창의성이 돋보인 주제가 많았다는 평가였다. 수학도 수준 높은 이론들을 토론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생 수준에서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물리와 지구과학, 정보 분야는 실험이 까다롭다는 과목 특성상 우수팀이 비교적 적었다.

힘들었어도 기분은 좋아요
 

청소년기의 실험실습은 이후 진로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학생들이 사사연구과제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그야말로 백인백색이다. 인천과학고에 다니는 상규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경남과학고 종욱이는 본인이 하고 싶어서 이번 과제에 참가했다. 특히 종욱이는 몇달 전 과학동아에서 읽은 기사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던 중 마침 이런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교수로 재직 중인 아버지를 졸라 관련분야의 지도교수를 섭외한 열성파에 속한다.

대부분 다른 학생들도 선생님의 추천을 받거나 자기가 좋아 과제에 자원했다. 각팀을 이끈 지도 교수들도 대학영재교육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거나 평소 연구교육에 관심을 가져왔던 과학자들이다.

연구주제는 대부분 교수들이 제안한 것들이다. 자신의 연구 일부를 떼어내 학생들에게 제안한 경우도 있고 연구교육의 취지를 살려 본인 전공과 상관없는 과제를 내준 경우도 있다. 또 경남대 권순기 교수처럼 주제를 잡아온 학생들이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끔 조언만 해준 사례도 있다. 그렇게 주제를 잡는데 한달 이상이 걸렸다.

어느 정도 주제가 잡히자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일단 연구에 맞는 실험실 환경을 만들고 필요한 장비를 확보해야 했다. 특히 구할 수 없는 실험 장비와 재료는 학생 스스로 직접 만들거나 조달해야 했다. 제작 과정에서 막히는 부분은 책을 보거나 교수에게 물어보면서 해결해 나갔다.

연구 도중 가장 좌절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학생들은 “실험 결과가 잘 안나왔을 때”라고 말한다. 그것도 실패 원인을 찾기 힘들 때 말이다. 사사연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험실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선배 과학자들이 어린 연구자들에게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규도 그런 경우다. 피스톤 대신 물로 열기관을 만든 상규는 “교수님에게서 이론도 많이 배웠지만 무엇보다 연구 도중 맞닥뜨리는 오류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배운 것 같다”고 말한다.

종욱이와 효반이, 지수는 다른 선배 과학자들에게서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받은 경우다. 까다로운 연구주제를 잡다 보니 실험 장치를 직접 만들기 불가능했던 것. 이때 실험 장치를 만들어 주겠다고 선뜻 나선 사람들은 LG전자연구소 연구원들이었다. 덕분에 우수팀으로 뽑힌 종욱이네는 선배 연구자들이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또 연구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점이 뭐였냐는 질문에 학생들은 “실험 때마다 매번 일지를 기록해야만 했던 것” 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장기간 연구를 해본 경험이 없는 어린 학생들에게서 충분히 나올 만한 답변이다. 실험 시간도 부족한데 중간 결과와 실험 과정을 기입해야 한다는 것은 말만 들어도 정말 지겨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한 연구자가 되기 위해 성실함과 꼼꼼함을 갖추는 것은 기본. 성실성에 많은 비중을 뒀다는 평가 의원의 심사평은 일리 있는 말이다.

학생들은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최대한 자기 시간을 쪼개 연구를 수행했다고 말한다. 학업 때문에 한주에 1-2번, 심지어 한달에 고작 2-3번 교수들과 만날 수 있었지만 부족한 시간을 보충이라도 하듯 주어진 시간을 1백% 활용했다.

친구들은 입시 준비로 바쁜데 괜히 시간 낭비한 것 아니냐란 질문에 한 학생은 “웬걸요. 입시 준비보다 더 값진 경험이었어요. 기회만 있으면 또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실험실습 위주의 공부가 좋아 진학은 했지만 이미 입시지옥으로 변해버린 과학고의 현실을 고발한 씁쓸한 답변이었다.

참가자 모두 만족해

평가위원들이 이번 평가에서 가장 역점을 둔 기준은 창의성과 성실성이었다. 오히려 연구 결과의 완성도는 그 다음이었다. 생물과 수학 과목에서 우수팀이 많이 배출된 것도 연구의 주제의 독창성과 교수·학생의 성실성이 높았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다.

심사를 담당했던 한 교수는 “사사연구이기 때문에 지도교수와 학생, 교사가 제대로 각자 역할에 성실히 임했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고 말한다. 연구 진행과정에서 각자의 역할 분담이 잘됐는지, 연구의 진행을 위해 어떻게 협력했는지가 주요 기준이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학술적으로 치우친 경우,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경우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행사를 주관한 KIM연구소 김명환 소장은 “평가 결과 팀을 이끌었던 교수가 열의와 책임감이 높을수록 연구 수준과 완성도,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게 나왔다”고 말한다.

한편 대다수 참가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번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고 말한다.

상규는 특히 이번 실험을 통해 대학에서 연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실험실습을 해보긴 했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이론에 치우친 면이 많았어요. 실험을 하면서 교수님에게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노하우를 많이 배웠어요.”

올해 3학년에 올라가는 상규는 이 경험을 꼭 살려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귀띔했다.

지도 교수들도 모처럼 보람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한성과학고 학생들과 팀을 이뤄 발표에 참가한 전동렬 명지대 교수는 “원래 원자구조분석이 전공이었지만 이번 과제를 수행하면서 다른 분야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고 말했다. 화학 분과에 참가한 경상대 권순기 교수도 “예상과 달리 학생들이 수준 높은 결과를 얻어서 좋았고 특히 연구가 끝난 뒤 학생들로부터 모두 화학과에 진학하겠다는 말을 들어 뿌듯했다” 고 말했다. 권 교수는 또 “혼자 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텐데 뛰어난 학생들 덕분에 짧은 시간에 좋은 연구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며 학생들을 추켜 세웠다.

발표 심사를 맡은 교수들은 이런 기회가 더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화학과 심사를 맡은 경남대 이상천 교수는 “학생들에게는 일찍부터 연구실 분위기와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라며 “이런 경험을 많이 할수록 다른 분야(의대)에 한눈 파는 일이 줄어들 것” 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또 “선배 과학자 입장에서도 자질이 있는 어린 학생들이 진짜 과학자로 성장하도록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라고 말한다.

평가가 끝난뒤 물리분과 평가위원을 맡았던 한 교수는 “단순히 교육 연구에 머무르지 말고 실용화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논문으로 키웠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실제 이번 발표에 참가한 인천과학고 이상규 학생의 연구보고서는 3월 폴란드에서 열릴 예정인 ‘노벨상으로 가는 첫걸음’(The First step to Nobel Prize)이라는 국제 청소년 우수과학논문심사대회 출전이 결정됐다. 경남과학고 김종욱 외 2인의 연구도 올해 안에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등재저널에 발표될 예정이다.

넘어야 할 산 많아

이번 과제에 참여한 학생과 교수, 전문가들의 긍정론에도 불구하고 고교생 연구가 대중화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상천 교수는 “교육과정에서 실험실습을 경시하는 풍조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 라고 말한다. 심지어 과학고에서도 일반대 진학 준비로 실험실습은 뒷전이기 일쑤라고 한다. 입시 중심의 교육이 계속되다보니 설립 초기 취지였던 실험실습 중심의 영재 육성이 사라졌다는 것. 무엇보다 각 학교 행정가들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또 호기심 강한 학생들을 맡아 가르칠 전문 교사의 임용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인건비 중심의 예산 책정 방식이 연구비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지적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사연구에 대한 전문가들의 생각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처음 실시한 사업인 만큼 몇가지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영재교육의 내실화는 물론 과학 대중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제2차 창의적 사사연구과제는 3월 중 시작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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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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