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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웨' 바뀌는가

세대 간에 말이 안 통하는 이유

“출첵 하자마자 지대 열공하다가 집에 왔더니 기분이 므흣해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적어도 30대 이상이다. 10대와 20대에서만 쓰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10대, 20대들은 50대 이상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상당수가 낯설다.

최근 KBS 2TV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의 ‘세대공감 올드앤뉴’ 코너는 퀴즈 대결 방식으로 세대 간에 서로 모르는 우리말을 다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젊은 세대는 옛날에 쓰던 말을 찾아내는 것이 재미있고, 나이든 세대는 새로 생겨나는 말을 접할 수 있어 즐겁다.

(주:위 문장은 ‘상상플러스’에 소개된 10대들의 말을 엮어 구성한 것으로, ‘출석체크 하자마자 제대로 열심히 공부하다가 집에 왔더니 기분이 흐뭇해요’라는 뜻이다)

신세대와 구세대, 발음도 다르다

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세대 간에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이유는 뭘까. 생각을 더 편리하게 표현하기 위해 표기가 달라지고 새로운 말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말소리와 말뜻의 관계는 세대나 성별, 지역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러나 단어만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음이나 문법도 바뀌고 있다.

서울대 언어학과 권재일 교수는 “‘상상플러스’가 세대 간에 서로 쓰지 않는 단어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단어가 문법이나 음운보다 빨리 변화해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에는 이미 발음도 많이 달라져 있다.

국립국어원 김세중 국어생활부장은 “과거에 이중모음이었던 것이 단모음으로 바뀌는 것이 좋은 예”라고 말한다. 15세기에는 ‘외’ ‘왜’ ‘웨’를 각각 ‘오이’ ‘오애’ ‘우에’로 발음했다. 수백 년이 지나면서 발음은 지금처럼 짧아졌지만 70대 이상의 노인층에서는 세 발음을 구별해서 말한다(단모음인 ‘외’는 발음할 때 입술 모양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세대는 ‘외’ ‘왜’ ‘웨’를 거의 구별하지 않고 쓴다. ‘외갓집’을 거의 ‘웨갓집’에 가깝게 발음하는 식이다.

‘애’와 ‘에’도 잘 구별하지 않는다. ‘경상도 사람은 ‘애’와 ‘에’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은 과거의 일이고, 서울 사람도 장년층 이하에선 두 발음을 섞어 쓰는 것이 현실이다. 김세중 부장은 “이미 1950년대 잡지에도 ‘젊은이들이 ‘애’와 ‘에’ 발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기사가 나온다”며 “이들 발음은 글자만 다를 뿐 이미 한 가지 소리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했다.

발음하는 모음의 수가 적어지면 말하기는 쉽지만 듣기엔 어렵다. 음성을 컴퓨터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한국어 음성인식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는 서울대 언어학과 정민화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외’ ‘왜’ ‘웨’ 발음을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음성인식 소프트웨어에서는 이들 발음을 따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음성학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발음은 그 전후의 자음이나 음절을 고려해 전체 맥락에서 가장 적합한 발음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인식한다”고 덧붙였다. 발음이 거의 비슷한 ‘외국’과 ‘왜국’은 앞뒤 단어의 뜻과 맞춰 보면서 구별한다는 말이다.

자음은 모음처럼 잘 바뀌지는 않지만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ㅅ’과 ‘ㅆ’이 구별되지 않고 쓰인다. ‘쌀’을 ‘살’로 발음하는 식이다.

하지만 두 자음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의 언어생활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서울대 권재일 교수는 “자음이 줄면서 사실은 더 간편해졌다”고 설명한다. ‘살’과 ‘쌀’도 대화 내용의 맥락에서 충분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 경제성은 모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본어에는 기본 모음이 5개밖에 없고 아랍어는 아예 모음 표기가 잘 발달돼 있지 않지만 정작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 모음을 적는 문자가 적어서 생기는 불편보다 편리한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발음 가짓수가 적은데도 큰 불편이 없는 것은 각 언어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라며 “만약 불편했다면 발음이 다시 바뀌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 변화는 1세기 이상 긴 시간에 걸쳐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빠른 속도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발음이 있다. 바로 ‘의’ 발음이다. 권재일 교수는 “이중모음인 ‘의’는 현재 음가가 대단히 불안정해 50~100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왜 그럴까.
 

10대와 50대는 사용하는 단어뿐만 아니라 발음까지 달라지고 있다. 사진은 KBS 2TV '상상플러스'의 '세대공감 올드앤뉴'의 한 장면.


왕따 발음은 사라진다

이중모음엔 ‘야(ja)’ ‘여’ ‘요’ ‘유’ 같은 ‘j’ 계열과 ‘와(wa)’ ‘워’ 같은 ‘w’ 계열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의’는 이중모음이면서 어느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 ‘왕따’발음이다. 음운의 속성상 이런 왕따 음운은 다른 음운을 자기 계열로 데려오지 못하면 서서히 없어진다. 사실 ‘의’발음은 거의 한국어에만 있는 특이한 발음이다. 러시아어나 프랑스어에 유사한 발음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다른 발음과 한 계열에 묶여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의’ 발음은 표준 발음법마저 3가지로 규정할 만큼 혼란스럽다. ‘의사’처럼 말머리에 오면 ‘의’로, 다른 음이 앞에 오는 ‘회의’ 같은 경우엔 ‘이’로, ‘우리의’처럼 관형격 조사로 쓰이는 경우엔 ‘에’로 읽는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의의’를 정확히 발음하면 ‘민주주이에 의이’가 된다. 권 교수는 “표준 발음법이 3가지인 이유는 ‘의’ 발음이 소멸되기 전이라도 언어생활을 편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규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30년 뒤 한국어의 장단이 사라진다

노년층 이하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음의 길이인 장단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17세기부터 국어에서는 음의 높낮이인 성조가 없어지며 대신 장단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권재일 교수는 “현대 서울말을 쓰는 사람들 중 60~70대 이하에서는 대화할 때 장단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년층조차 길게 발음하는 ‘눈(雪)’과 짧은 ‘눈(眼)’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세중 국어생활부장이 소개하는 일화를 보자.

“한 언어학 교수가 수능 언어영역 듣기평가를 두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아나운서가 불러주는 발음의 장단이 다 틀렸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정작 수험생들은 아무 불편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그 장단이 맞는지 틀렸는지 몰랐기 때문이죠.”

김 부장은 “굳이 장단을 구별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문제점이 없기 때문에 국어의 장단은 점점 소멸되고 있다”고 말했다. 음의 길이를 표기할 문자가 없는 것도 발음의 장단이 사라지는데 일조한다. 영어에선 같은 ‘i’ 발음도 철자법을 통해 ‘i’ ‘ee’ ‘ea’ 등으로 다르게 써서 장단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지만 한국어에는 이런 방법이 없다.

100년 전 한국인의 언어생활은 문자보다 주로 대화로 이뤄지는 구어 중심이었지만, 오늘날엔 책이나 신문 같은 인쇄매체 뿐만 아니라 블로그, 메신저, SMS 등 디지털 중심의 뉴 미디어를 통한 사이버 언어생활은 대부분 문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언어 기능은 점점 비중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다.

권재일 교수는 “30년쯤 지나 지금의 60, 70대가 사망하면 적어도 표준어에서 발음의 장단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며 “후세의 국어학자들은 ‘21세기 중엽에 장단이 소멸했다’고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문자가 발음에 영향을 주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노래방’이 대표적이다. 원래 어떤 장소를 뜻하는 ‘~방’이 붙으면 ‘사랑방’[사랑빵]처럼 ‘~빵’으로 발음되는데 ‘노래방’ ‘머리방’은 예외다. 새로 생긴 단어를 문자 형태로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음식점 간판에 ‘수라간’이라고 썼더니 종업원들까지 ‘수라깐’ 대신 그냥 ‘수라간’이라고 발음하더라”는 예도 들었다.
 

2003년 국립국어원에서 조사한 '의' 발음 선호도. 글자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발음이 혼란스럽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이'는 허용되지만 '으'는 잘못된 발음이다.


영어는 한국어를 바꿀 수 없다

최근 방송에서 일부 아나운서나 진행자들은 ‘커피’(coffee)를 ‘f’ 발음 그대로 발음한다. 물론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잘못된 발음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자주 쓰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럼 언젠가 영어의 ‘f’를 표시하는 자음이 새로 생기거나 ‘z’음을 표시하는 옛 한글 자음 ‘ㅿ’을 다시 쓰게 될까.

실제로 1930년대엔 ‘f’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ㅇㅍ’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ㅇ프리’(free) ‘ㅇ페어’(fair)같은 식이다. 심지어 ‘스트라이크’를 ‘ㅅㅌㄹㅏ이크’로 세 자음을 한꺼번에 붙여 쓰기도 했다. 1936년 외래어표기법 제정 이전엔 통일된 규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 권재일 교수는 “새 자음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말에는 ‘f’나 ‘z’가 없어도 언어생활에 아무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외래 요소가 언어에 영향을 줄 때 음운은 변화에 가장 저항이 크다”고 말한다.

김세중 국어생활부장은 “아나운서들이 ‘f’ 발음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thrill’ 같은 단어는 그냥 ‘스릴’로 발음하는 것은 결국 발음의 원칙이 없다는 말”이라고 꼬집으며 “외래어 때문에 새 자음을 만든다면 ‘f’ 뿐만 아니라 ‘v’음과 프랑스어의 비모음까지 모두 표기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구강 구조 같은 신체 조건이 바뀌면 발음도 달라질까?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신체적 조건 차이는 발음을 구사하는데 아무 장애가 안 된다”고 말한다.

서울대 권재일 교수는 “해부학에 근거해 인종 간에 발음이 선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서 한국어를 익힌 서구인들의 발음이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 증거다. 마찬가지로 최근까지 일부 학부모들이 영어 발음을 향상시키려고 아이들에게 혀 수술을 받게 한 것도 언어학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당신은 'coffe'를 어떻게 발음하고 있는가? 외국어 발음을 위해 굳이 쓰지 않는 자음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게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신체 구조는 발음과 관계없다

다만 권 교수는 “남자보다 여자들에게서 ‘다른’을 ‘따른’으로 발음하는 식의 된소리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체 특성상 여성의 목소리 톤이 높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우리말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있을까? 국립국어원에서는 언어가 바뀌는 사례를 수집하고 빈도수를 조사해 언어 변화 추이를 디지털로 계량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예로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가사에 나온 단어를 수집해 오늘날의 가사와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이미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사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앞으로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와 경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디지털 언어 연구는 전자사전이나 자동번역 프로그램 개발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서는 전산언어학, 언어정보처리 등 컴퓨터와 공학적 이론을 접목해 언어학을 연구하는 과목을 개설하면서 디지털 언어 연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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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상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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