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인싸’요!” 최근 제 작은 진료실에 찾아온 여중생 K 양의 대답입니다. 질문은 ‘꿈이 뭐야?’라는 것이었죠. K 양은 학교에도 가기 싫고, 세상에 재밌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며, 가족을 포함한 모두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의 꿈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나 관심받고 사랑받는, ‘인싸(인사이더·학급 등 또래 집단에서 인기 많은 친구)’였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만나온 많은 분들 또한 K 양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 그 소외감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이 유독 소속감에 목말라하는 것인가 의문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영화 ‘샤잠!’을 보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인싸’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 영화는 고아 소년인 주인공이 슈퍼히어로가 돼 가는 과정을 다룬 영웅물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성장을 다룬 성장물이기도 합니다.
과시 심리 나타나는 청소년기
먼저 주인공인 빌리 뱃슨(애셔 앤젤)을 살펴봅시다. 어린 시절 친모를 잃고 고아가 돼 위탁가정을 전전하던 그는 우연히 마법사 ‘샤잠’의 능력을 이어받아 슈퍼히어로가 됩니다. 하지만 그 능력으로 기껏 한다는 것이 휴대전화 충전하기, 편의점에서 맥주 사기, 자판기에서 음료 털기 등 지극히 보잘것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몸은 어른이 됐지만 내면은 여전히 14세 청소년임을 드러내는 장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외면과 내면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유튜브입니다. 보통 영화에서 슈퍼히어로들은 자신의 능력이 사회에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숨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뱃슨은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는커녕 위탁가정 형제이자 친구인 프레디 프리먼(잭 딜런 그레이저)과 함께 자신의 능력을 촬영해 유튜브에 올립니다. 그리고 유튜브 스타가 됩니다.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거리 공연을 하면서 돈도 법니다.
이런 모습은 모두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과시 심리로 볼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엘카인드 미국 터프츠대 아동연구및인간발달학부 명예교수는 이를 청소년기에 발생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설명합니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크게 두 가지로 발현됩니다. 우선 ‘상상 속 청중’입니다. 스스로 외모와 행동에 신경을 쓰듯 모든 사람도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느끼는 현상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우화’입니다. 이 현상은 자신의 경험은 너무 특별해서 다른 이가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개인적 우화는 자신이 어떠한 위험도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뱃슨이 초능력을 얻고 주목을 받음으로써 그의 상상 속 청중은 현실이 됩니다. 또한 그가 겪는 경험은 실제로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개인적 우화도 더는 망상이 아니게 됩니다. 아마 당시 뱃슨의 불멸(immortality)에 대한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사라집니다. 상상 속 청중 대신 현실 속 주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또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인기 얻으려면 호감과 지위 필요
유튜브 영상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친구 프리먼의 목적 또한 ‘인싸’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 신세였던 그는 친구의 슈퍼히어로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목받는 것은 주인공이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프리먼은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자신이 슈퍼히어로와 친구라고 주장했지만, 전날 프리먼과 다퉜던 주인공은 다음날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모두가 프리먼을 비웃었고,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후 주인공을 만난 프리먼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네 능력이 부럽다고! 나도 너처럼 인기를 얻고 싶다고!”
인기를 얻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미치 프린스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학및신경과학과 교수는 저서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에서 인기를 얻는 방법으로 ‘호감(likability)’과 ‘지위(status)’를 제시했습니다.
먼저 호감이란 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소중하게 대하며 타인이 자신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 쓰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지위란 우월감, 힘, 영향력 등과 같은 속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위입니다. 프리먼은 사람들과의 유대감 대신 슈퍼히어로의 친구라는 지위를 이용해 인기를 얻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청소년기에는 지위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경쟁을 의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위의 기반이 되는 우월감, 힘, 영향력 등은 남과 비교해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경쟁이라는 개념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기에는 지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소년들은 따돌림, 괴롭힘, 폭력 등 일차원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누군가를 괴롭히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거나 또는 이로 인해 괴로웠던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이를 가리켜 프린스틴 교수는 ‘주도적 공격성(proactive aggression)’이라고 정의합니다. 영화에서 주도적 공격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프리먼을 괴롭히는 친구들입니다.
사실 넓게 해석하면 영화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새디어스 시바나 박사(마크 스트롱)도 주도적 공격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과거 어리고 유약하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내면의 악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법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이후 그는 결국 죄악의 구슬을 손에 넣고 악마와 함께 세상을 지배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가 힘을 얻은 뒤 처음 한 행동은 바로 형과 아버지를 살해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도적 공격성을 극도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인도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인기에 신경을 씁니다. 물론 청소년기와 달리 일차원적인 방법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유대감을 형성하고 지위를 높여 인기를 얻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동문회나 향우회에 가입하거나, 좋은 직장을 얻고 재산을 모으는 것도 이런 행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속감 경험은 정체성 확립에 도움
영화 후반부에서 뱃슨은 위탁가정에서 만난 형제들의 도움으로 친어머니의 집을 찾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뱃슨은 어머니가 양육이 버거워 자신을 버렸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됩니다.
이후 시바나 박사와의 결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형제들을 보면서, 뱃슨은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가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뱃슨이 드디어 철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청소년이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가리켜 1994년 타계한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자기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청소년이 정체성과 혼돈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확립을 위해 청소년에게 필요한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어떤 집단에 속해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소속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울타리 밖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고자 하는 탐색의 과정도 겪어야 합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두 경험 사이의 비율이 조화를 이뤄야 건강한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뱃슨에게 위탁가정 형제들은 소속감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덕분에 뱃슨은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게 됩니다.
뱃슨은 위기 상황에서 위탁가정 형제들에게 자신의 힘을 전수하고, 슈퍼히어로 형제가 된 이들은 마침내 악당을 격퇴하고 힘의 근원인 죄악의 구슬을 뺏는 데 성공합니다. 또 시바나 박사와 달리 구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를 봉인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저는 영화를 본 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시바나 박사의 가족이 그의 감정을 잘 살피고 소중한 존재로 대했다면, 그가 과연 구슬의 유혹에 빠지게 됐을까요? 어쩌면 슈퍼히어로와 악당의 갈림길은 여기서 시작된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안현웅. 순천향대 의대를 졸업한 뒤 순천향대 천안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수련을 받았다. 현재 순천향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외래교수를 겸직하며 행동과학을 강의하고 있다. 뇌과학과 심리학의 통합 지역사회의 정신건강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mindwing18@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