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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희(가명·24) 양은 주변에서 매사에 꼼꼼하고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녀는 특이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료나 기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관하는 것이다. 실제 그녀의 집에 가보면 초등학생 때 썼던 교과서와 공책, 일기와 숙제만 한 보따리가 넘는다. 대청소를 하거나 이사를 할 때 버릴 만도 하지만 자신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며 애지중지 챙긴다.


[저장강박 환자의 집.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은 결과, 온 집이 쓰레기로 꽉 차버렸다.]



 


쓰레기를 모으는 사람들

이소희 양처럼은 아니지만 일부 수집가들도 특정 물건을 모으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기도 한다.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적인 병리현상의 경계선에 있었던 유명한 인물이 바로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이다. 그는 매일 벼룩시장, 골동품상점, 경매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며 일반적으로 별 의미없어 보이는 물건을 사 모으고 정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것을 타임캡슐이라고 부르며 5층짜리 대저택 전체를 가득 메울 정도로 수집을 반복했다.

이번엔 좀 더 병적인 경우다. 김승윤(가명·31) 군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이상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패션광고를 스크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패션에 관심이 생기거나 물건을 사기 위해서려니 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광고문도 가위로 잘라 끊임없이 스크랩하더니 그것을 보관한 상자가 수십 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리로 나가 무료신문이나 전단지 등을 한 보따리씩 가지고 왔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가위질을 하면서 스크랩을 반복했다. 결국 상자가 집은 물론 복도와 옥상까지 채웠지만 증상은 계속됐다. 주변에서 누가 말려도 지쳐 쓰러져 잘 때까지 반복했다.

회사에서 업무상 중요하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깐깐하게 따지고 확인하는 직장상사, 책상 위가 조금만 어지럽혀지거나 옷에 때가 살짝만 묻어도 말끔히 청소하거나 씻어내지 못하면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사람, 언젠가 쓸 지도 모른다며 온갖 사소한 영수증과 메모지 등을 끊임없이 모으는 경우 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주변에서 한두번쯤 마주한 장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 ‘강박적이다, 결벽증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강박증의 특이한 형태 중 하나인 저장(hoarding)은 쓸모가 없거나 가치가 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거나 불필요하게 수집하는 증상이다. ‘물건을 버리거나 잃게 될까’ 하는 걱정이 대표적인 저장강박사고이며, 물건을 수집하거나 쌓아 두는 것이 저장강박행동이다. 물건을 버리고자 하면 ‘언젠가 필요할 것이다,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언젠가는 가치 있는 물건이 될 것이다’ 등의 생각으로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다.


이러한 저장강박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지금 자신의 e메일 함을 열어보자. 버리지 않고 모아둔 메일이 수백 통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 e메일을 다시 본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장강박은 처음에는 단순히 필요한 것들을 모아두는 일에서 시작한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카드영수증이나 고지서 등을 한참이 지났는데도 어딘가 구석에 모아 놓는 일부터 시작해서, 재활용 센터에서 눈에 띈 쓸 만한 가구나 소품을 모으거나 이미 완전히 망가져서 고칠 수도 없는 전자제품이나 작아서 입을 수도 없는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모습으로 진행되곤 한다. 심한 경우 쌓아둔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버거워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온 집안이 쓸모없는 물건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허리케인이 마을을 휩쓸고 간 뒤,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 진열대가 비었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동, 저장

저장은 생물학적으로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행위다. 쥐와 같은 설치류나 조류처럼 식량을 채집하고 쌓아놓는 행위에서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까치는 동전이나 보석, 장난감 같이 그들의 생활과 아무 상관없는 것도 끊임없이 저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현상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생존과 관련한 식량채집이 반복되다가 목적은 상실하고 행위만 남아있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사람도 이러한 저장행위가 낯설지 않다. 수 년 전, 중국에 대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피난민이 생겼다. 이에 놀란 중국인들은 구할 수 있는 모든 식료품과 가스, 물 등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엄청난 사람이 몰려 이 광경이 해외토픽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웃한 일본이나 우리도 마찬가지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라면이나 통조림, 물, 부탄가스 등을 많이 사두는 걸 보면 결국 저장이란 생존과 관련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는 이러한 정보가 곧 동물의 식량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나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는 것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미셀 푸코는 정보와 지식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곧 권력이고 이것이 가능한 집단과 아닌 집단 사이에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이것을 개체 내로 적용해 본다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할지도 모를 정보를 정리하고 요약하고 저장해 놓는 것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동으로 동물의 저장활동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제럴드 네스타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저장강박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미국 내에서만 70만~140만 명에 달한다. 이러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미국에서는 저장강박을 소재로 한 ‘호더스(Hoarders)’, ‘호딩 : 산채로 매장하기(Hoarding: Buried Alive)’ 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천장까지 쌓인 상자나 닉슨 대통령 시대부터 모아온 신문지 더미, 길거리에서 주워온 고양이들, 혹은 다 먹은 고양이용 캔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모습 등이 나온다. 이는 국내 매체에서도 종종 보는 모습이다.

 


특정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뇌

뇌과학에서는 이러한 저장강박증을 뇌기능 장애로 설명하고 있다. 저장강박행위와 관련이 있는 부위로 보상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안와전두엽(orbito-frontal cortex), 갈등이 유발될 수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앞쪽 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그리고 특정 자극에 맞춰 습관화된 행동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미상핵(caudate nucleus), 원하는 동작이나 반응이 되도록 조절하는 기저핵(basal ganglia) 같은 선조체(striatum) 구조물이다.

저장강박은 이 부위에서 새로운 자극을 처리하지 못하고 과거 자극이 계속 머릿속에서 해결되지 않고 맴돌 때 생긴다.

실제 저장강박증 환자들은 안와전두엽에서 선조체 안쪽으로 연결되는 회로가 과활성화 되어 있다. 대개 이 부분이 과활성화 되어 있으면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저장강박증의 경우에는 저장이라는 행동이 반복되면서 버려야 할 물건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 또 배외측전두엽 (dorsolateral-prefrontal cortex)에서 바깥쪽 선조체로 연결되는 회로에 문제가 생겨도 저장강박증이 나타난다. 안와전두엽이 하던 행동을 계속하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면 배외측전두엽은 새로운 자극이 들어왔을 때 이를 처리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새 자극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던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저장강박증 치료에 심부뇌자극술이라는 것이 있다. 문제가 있는 뇌 회로를 직접 교정해주는 방법이다. 심부뇌자극술은 대뇌안쪽으로 사람 머리카락 두께의 전극을 삽입하고 전류를 통해 뇌세포의 활성을 조절한다. 과활성되어 있는 뇌신경은 억제하고 활성이 떨어져 있는 뇌신경을 자극해서 제기능을 되찾아준다. 주로 파킨슨 환자들의 손 떨림 같은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으나 우울증이나 강박증에도 효과가 있다는 보고가 늘면서 점차 시행이 늘어가는 추세다.

저장강박증도 결국 대뇌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결과다. 단순히 자신의 물건을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는 것까지 비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저장강박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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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이화영 | 글 권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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