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할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떠난 이를 되살리는 마법을 쓰거나 그를 복제해서라도 다시 곁에 머물게 만드는 상상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영화 ‘레플리카’는 남겨진 이들이 가진 이런 바람을 과학을 통해 완벽하게 이뤄낸다.
영화의 배경은 대서양의 작은 섬 푸에르토리코의 한 숲 속이다. 이곳에 위치한 첨단 건물에서는 인간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도플갱어(자신과 정확히 똑같이 생긴 사람)를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다. 살아생전의 기억과 감정까지 완벽하게 복제하는 게 목표다.
신경과학자인 윌 포스터(키아누 리브스)는 이곳에서 수십 년간 죽은 사람의 기억을 뽑은 뒤 이를 로봇에 이식하는 기술을 연구해왔다. 기술이 거의 완성돼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작업만 남았다.
뇌에 저장된 기억 복제, 가능할까
이상완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단기 기억은 해마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기억이 어떻게 쌓이고 사라지는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며 “특히 장기기억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뇌 속 작동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뇌의 작동 과정을 완전히 밝히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는 포스터 박사팀이 시행한 것처럼 컴퓨팅 기법으로 온전히 뇌를 복제할 수 있는 알고리듬을 짜기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처럼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상황 판단 과정이 일부 밝혀지면서 이를 컴퓨팅 기법으로 모사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사람은 인공지능과 달리 상황에 따라 판단을 시시각각 바꿀 수 있다. 이는 이세돌 9단을 이긴 인공지능 ‘알파고’와도 구분되는 점이다. 알파고는 ‘게임은 무조건 이기는 것’이라는 한 가지 목표가 설정된 알고리듬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인 시스템이다. 바둑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기 위한 최선의 계산만 반복한다.
이 교수는 “가령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바둑을 모르는 동생과 게임을 할 때, 알파고와 달리 30분간 대등한 경기를 하다가 져줄 수 있다”며 “게임에 지면 동생이 크게 낙담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목표를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경과학계에서는 중뇌와 측전전두피질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이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목표를 재설정한다고 해석한다. 이 교수팀은 이런 과정을 반영해 외부 상황에 맞게 목표 전략을 일부 수정할 수 있는 강화학습 알고리듬을 개발해 1월 16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doi: 10.1126/scirobotics.aav2975
이 교수는 “두뇌에서 벌어지는 신경과학적 과정을 이용해 인공지능이 목표를 스스로 재설정하도록 할 수 있다”며 “앞으로 등장할 차세대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특정 범위 내에서는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공배양으로 인간 복제, 가능할까
아내의 복제품을 만들기 위해 적용된 인공배양 기술은 야마나카 신야 일본 교토대 교수가 2006년 8월 개발한 유도만능줄기세포(iPSC) 기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도만능줄기세포란 체세포를 적절한 물질(전사인자)과 함께 넣어 분화 능력이 있는 줄기세포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이론적으로 유도만능줄기세포에 완벽한 환경을 마련해주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공 배양기가 이런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인공배양을 통해 온전한 사람을 완성하는 기술은 현재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아직은 대장이나 심장세포, 뇌 등 생체기관을 수 mm3에서 수 cm3 부피의 3차원 조직으로 배양하는 데 성공한 수준이다. 실제 기관처럼 크게 배양하지 못하며, 조직 사이에 연결된 혈관들을 완벽히 재현하지도 못하고 있다.
김정범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부 교수는 “유도만능줄기세포나 수정란에서 분리한 줄기세포를 배양하면 갑자기 암으로 변해버리는 등 제어하기가 극도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영화에서처럼 체세포를 줄기세포로, 이를 다시 성인으로 온전히 성장시키는 체외배양시스템은 아직은 없다는 말이다.
기억 따라 감정도 전송, 가능할까
기억과 감정이 동시에 움직인다는 영화의 이런 설정은 뇌과학계에서는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다. 일례로 어제 저녁 연인과 레스토랑을 찾았다고 하자.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뿐만 아니라 당시 테이블들의 배치 상태와 같은 공간 정보, 상대방의 표정, 분위기 등 모든 조건을 기억으로 저장한다. 1년의 세월이 흘러도 식사를 함께했던 연인의 얼굴, 그를 사랑했던 감정은 생생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레스토랑 내부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와 같은 공간 정보는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 포함된 기억과 감정이 항상 하나로 묶여 뇌에 저장되고 같이 움직인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은 아직 없다.
1971년 존 오키프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는 해마에서 위치를 인지해 기억하는 ‘장소세포’를 발견했다. 이후 현재까지 공간의 배치 상태를 패턴으로 인식하는 격자세포나 경계를 인지하는 세포, 속도를 인지하는 세포 등의 존재가 확인됐다. 하지만 이들 세포가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기억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 교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뇌에 새겨지는 기억과 감정에 대한 비밀을 완전히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의 결말은 궁금증으로 남겨두고, 영화에서 줄곧 던지는 질문으로 잠깐 되돌아가보자.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 받는 육체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에게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이식해 영원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인간으로 유한한 인생을 살 것인가, 로봇으로 영생을 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