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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의 명강의로 소문난‘자연과학의 세계’강의에 만화가 나오는가 하면, 수업은 학생의 열띤 논쟁으로 끝나기 일쑤다. 하지만 매년 강의평가서에서는 빠지지 않고 추천된다. 왜일까.

 

서울대 김희준 교수의 자연과학의 세계
 


동장군의 심술이 채 가시기도 전인 3월 초, 오랜만에 찾은 대학교정은 꽃샘추위도 잊은 채 여기저기 모여 앉아 밀린 얘기를 나누는 학생들로 들뜬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만에 찾은 대학의 산뜻한 공기도 마실 틈 없이 약속된 강의실을 찾아 헐레벌떡 뛰었다.

찾아간 강의실은 서울대 25동 대형강의동. 강의실은 미리와 자리잡고 있는 수강생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도 잠시, 오늘의 주인공인 화학과 김희준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자연의 화두 찾는 참선과정

김교수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화두(話頭)라는 한자를 크게 썼다. ‘아니, 자연과학 강의에 웬 화두. 내가 강의실을 잘못 찾았나’하는 의문도 잠시, 김 교수는 다시 ‘웰컴 투 내추럴 사이언스 월드’(Welcome to natural science world)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기자는 강의실을 제대로 찾긴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기자가 찾은 강의는 서울대 김희준 교수가 매년 개설하는 ‘자연과학의 세계’다. 김교수의 강의는 한 학기 강의가 끝나고 작성되는 ‘강의평가서’에 빠지고 않고 추천될 만큼, 서울대 내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명강의다. 특히 모두 영어로 진행되는 이 강의는 이공대생은 물론 인문, 사회, 예능계 학생에게 오히려 더 인기가 있다. 현대과학의 정수는 물론 현대사회의 필수조건인 영어회화를 연습할 최적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김교수 강의는 마치 고승의 오묘한 화두에 대해 그 해답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수행과정을 연상시킨다. 매 학기 강의가 시작될 때마다 김교수는 그 학기 강의내용의 화두를 수강생과 함께 준비한다. 그런 다음 화두에 대한 답을 수강생과 함께 찾아간다. 수강생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과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체득할 수 있다.

김교수가 좋아하는 자연과학의 화두는 ‘자연은 어떻게 폰 노이만 기계를 만들었나’이다. ‘폰 노이만 기계’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컴퓨터과학자인 폰 노이만 교수가 제창한 개념으로, 스스로 복제할 능력을 지닌 기계를 말한다. 인간이 제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로봇을 만든다해도 자기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는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그런데 간단한 단세포 생명체인 대장균은 20분만에 한번씩 자신을 복제해 두배로 증식한다. 박테리아야말로 매우 뛰어난 폰 노이만 기계인 셈이다. 도대체 박테리아는 어떻게 이런 비법을 터득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자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인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났을까. 또한 어떻게 간단한 원시세포에서 우주의 기원까지 탐구하는 인간이 진화됐을까.

이런 질문들이 준비되면, 바로 이 궁금증이 ‘자연과학의 세계’1학기 전체 화두가 된다.


지루함 없애는 돌발퀴즈

오늘의 강의는 빅뱅우주론으로 대표되는 우주의 탄생과 기원에 관한 내용이다. 우주론에 대해 귀동냥으로 들어 조금은 알고 있는 기자는 ‘또 지루하고 복잡한 수식이 열거되겠군’하며 은근슬쩍 허리를 뉘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미리 준비된 OHP를 통해 느닷없이 퀴즈를 내는 것이 아닌가. 투영기를 통해 나온 질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 In the beginning,all the mass of the universe was confined in a tiny space "

위의 말은 몇년 전 뉴스위크지에 실린 빅뱅에 관한 기사의 첫 대목이다. 질문은 다음의 네가지 보기(A. length B. mass C. time D. energy) 중 자연의 세가지 기본적인 양이 아닌 항목을 묻는 것이었다. 물론 답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A. 길이’ 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주론에 관한 강의의 첫 도입치고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교수는 항상 이렇게 강의를 재밌게 이끌 참신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우주’와 ‘생명’이라는 두단어로 요약되는 거창한 전체주제를 이끌다보면 자칫 하루하루의 강의가 지루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김교수는 매 시간마다 그 강의에 맞는 작은 화두를 준비한다.

오늘의 작은 화두는 ‘우주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떻게 진화하고 있나’이다. 학생들로부터 위 질문에 대한 대답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듣던 강의는 자연스럽게 빅뱅으로 넘어갔고, 이어서 우주의 폭발과 팽창, 에너지의 증가, 그리고 우주의 나이까지 얘기됐다.


만화 한 컷의 힘

이처럼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는 강의 시작할 때 던져진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를 위해 김교수는 화두를 도입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매년 개발하고 있다. 많은 참신한 방법 중 김교수가 애용하는 수단은 그날의 주제를 함축하는 만화 컷의 도입이다.

원자 세계에 대한 만화를 보여주면서 쿼크는 렙톤과 함께 지금까지 알려진 자연의 가장 궁극적인 소립자라는 점, 양성자는 전하가 +2/3인 업쿼크와 -1/3인 다운쿼크가 강한 핵력으로 결합한 +1의 양전하를 가진 입자라는 사실, 그리고 중성자는 강한 핵력에 의해 전기적으로 반발하는 양성자들을 원자핵 속에 묶어둔다는 사실 등을 자연스럽게 꺼낸다.

이런 방식으로 강의를 이끌다보면 어렵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현대과학의 요소가 쉽고 재밌게 이해될 수 있다. 굳이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레고조각은 원자라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소립자의 세계는 수강생의 마음 속에 들어와있다.

또한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에는 좋은 비디오 테이프가 적극 활용된다. 특히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코넬대의 호프만 교수가 해설을 하는 ‘화학의 세계’(World of Chemistry)는 김교수가 즐겨 사용하는 비디오다.

20가지 주제로 돼 있는 테이프 중에서 원자의 세계, 주기율표, 화학결합, 단백질 등의 내용은 화학뿐 아니라 일반 교양과학을 재밌고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강의에 적극 이용된다. 자막이 없기 때문에 OHP를 이용해 미리 키워드를 보여주면 이해가 쉬울 뿐더러 영어 듣기연습도 돼 수강생들이 즐거워한다.


논쟁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식 대화

김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강의 방식은 대화식 방법이다. 아무리 흥미 있는 내용이라도 교수의 일방적 강의만으로는 수강생의 주의를 유지하기 힘들다. 김교수 스스로 ‘소크라테스식 방법’으로 이름붙인 대화식 강의는 이런 단점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약 1백명이 넘는 강의생과 대화식 수업을 진행하려면 특수한 방식이 필요하다. 김교수는 이를 위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고안했는데, 이 중 가장 애용하는 방식이 ‘소크라테스식 대화’이며, 내용은 ‘아레시보 메시지’다.

1974년 11월 16일 푸에르토리코의 아레시보 관측소에서는 우리 은하계의 내의 구성성단인 M13으로 마이크로파 신호를 보냈다. 우주에 우리 이외의 생명체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아레시보 메시지란 이 때 발사된 신호에 들어있던 내용을 말한다.

먼저 김교수는 아레시보 메시지에 포함될 만한 자연과학의 주요 키워드를 제시한다.

쿼크, 플랑스 상수, 볼츠만 상수, 만유인력, F=ma, E=mc2, 주기율표, 원자번호, 실리콘, 철, 20가지 아미노산, 아데닌, 구아닌, 티민, 사이토신, 인간게놈의 프로젝트, 지구상의 총인구, 사람의 키 등등

그러면 학생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레시보 메시지에 포함될 적당한 내용을 고르고,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 뒤 다른 학생은 그에 대한 타당성 또는 부적합성을 제기하면서 강의는 진행된다. 일방적으로 사실을 전하는 방식보다 효율적이며,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도 흥미와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다.


1분 쪽지에 담긴 수많은 사연

소크라테스식 대화강의에도 허점은 있다. 자칫하면 적절치 못한 논의에 시간을 뺏길 수도 있고, 수줍음이 많은 학생의 경우 토의에서 제외되기 쉽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김교수는 ‘1분 쪽지’를 도입한다.

김교수의 강의는 2-3분 정도 일찍 끝나는데, 이때 수강생은 각자의 1분 쪽지를 작성한다. 내용은 그 날의 강의에서 좋았던 점, 개선을 바라는 점, 의문사항 등이다. 김교수는 이 쪽지를 읽으며 출석체크도 하고, 좋은 질문 몇개를 골라 다음 시간에 간단히 답을 하거나 토의 자료로 활용한다. 1분 쪽지는 학생의 의문을 해소하는 방편일 뿐 아니라 교수와 학생 사이의 의사 소통을 위한 훌륭한 매개체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파악해 가능한 강의에 반영하는 자세는 명강의 필수조건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1분 쪽지는 귀중한 강의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김교수가 귀국해서 처음 강의를 맡던 1997년, 일반화학 강의의 한 수강생이 적어낸 1분 쪽지의 내용을 김교수는 아직까지 활용하고 있다.

‘미시세계에서도 인간사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군요. 반발력 있는 것들을 묶어주고(중성자), 가만히 있으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양성자), 활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여러 반응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네요(전자).’


기막힌 기말 프로젝트

김교수는 매 강의마다 전체 주제 안에서 그 날의 소주제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간단히 얘기함으로써 한 학기 동안의 긴장을 유지한다. 이때 김교수를 도와주는 가장 큰 우군은 지난 학기 수강생이 제출한 ‘기말 프로젝트’다.

자연과학의 세계 수강생은 성적평가를 위해 기말 프로젝트를 제출해야 한다. 김교수는 이 기말 프로젝트를 학기 초에 미리 발표한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지난 학기에 제출된 프로젝트 중에서 그 날의 강의내용에 관련된 것들을 보여준다. 수강생은 한 학기 동안 ‘선배’들의 프로젝트를 감상하며 자신의 기말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기말 프로젝트는 김교수 입장에서 강의의 긴장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참신한 강의 도구의 원천인 셈이다.

프로젝트는 강의의 전반적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독창적 방법으로 제시하거나, ‘왜 인이 생명현상에 필수적인가’하는 구체적 주제에 대해 답하는 방식이다. 특히 가장 인기를 끄는 프로젝트 형식은 ‘광수 생각’같은 시사만화를 활용해 과학의 원리를 산뜻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이미 김교수 강의의 ‘전매특허’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방법은 비자연과학도가 자연과학에 대해 쉽게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문·사회계열 학생의 유연한 사고방식을 통해 자연과학을 보다 풍부히 만들 수 있다.

프로젝트의 형식은 만화뿐 아니라 자서전, 시, 수필, 소설을 각색하거나 현상수배, 시조, 한자성어, 신문기사를 이용할 수도 있다. 수강생의 입장에서도 딱딱한 계산문제를 풀어내는 것보다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선호한다.

해결돼야 할 평가방식

자연과학의 세계를 한 학기동안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세기를 통해 밝혀온 원자의 세계를 어떻게 한시간 안에 모두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김교수는 “자연과학에서는 물론 사실의 원인을 구체적 수식을 통해 전개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전체적 그림에 대한 이해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하버드대의 허쉬바흐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푸는 훈련보다 중요한 개념을 쉽고 재밌게 가르치는 일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는 고급학년의 전공과목이 아닌 교양과목이다. 정량적인 문제해결보다 정성적인 개념의 확립이 보다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런 김교수도 고민거리가 있다. 바로 학생의 평가방식 문제다. 기말 프로젝트만으로 수강생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한학기 동안 재밌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동원해 자연의 본질을 이해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학생들을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강의는 평가방식의 편이성 때문에 정량적 문제풀이 위주로 학생을 평가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강의에서 개념이해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시험에 출제되는 내용을 중시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딜레마는 외국에서도 계속 논의되고 있는, 뾰쪽한 해답이 없는 문제다. 김교수는 “어려운 문제이긴 해도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꾸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수강생의 이해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어느정도 평가의 객관성을 유지 할 수있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김교수는 기말 프로젝트와 수업중 토론에참여하는 수강생의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정량화 할 방법을 찾고 있다.



세포 옆에서

하나의 세포를 만들기 위해
푸른 행성 지구는 그렇게 진화했나보다.
DNA 이중나선을 붙들기 위해
150억년 전 빅뱅 우주는 또 그렇게 수소를 만들었나보다.

긴장과 초조로 가슴 조이던
기나긴 우주진화의 갈림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지구에 정착한
자연의 레고 원자들이여

생명은 화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을 보여주려고
네가지 염기도, 스무가지 아미노산도
원자들의 화학결합으로 만들어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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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공 기자
  • 사진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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