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아졌어!”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주인공 스캇 랭(폴 러드)은 특수 슈트를 이용해 몸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정확하게는 개미만큼 작아지는, 다운사이징 기술이 핵심이다. 주인공은 몸의 크기를 더욱 줄여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까지 섭렵한다. 실제로 최근 과학계에서는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복잡한 구조물을 나노미터(nm·1nm는 10억분의 1m) 수준으로 확 줄이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나노 세계에 나타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은 쉽게 말해 3D 프린팅 기술로 나노미터~마이크로미터(μm·1μm는 100만분의 1m) 크기의 구조물을 만드는 기술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3D 프린팅과는 차이가 있다.
대개 3D 프린팅은 크기가 밀리미터(mm) 이상이어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크기의 물체를 만들 때 사용한다. 이때 각종 재료를 열로 녹여 주삿바늘 정도 굵기의 노즐을 통해 분사하면서 기판에 차곡차곡 재료를 쌓는 방식으로 물체를 프린팅한다. 마치 치약을 짜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데 밀리미터 이하의 매우 작은 구조물을 만들 때는 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은 빛에너지를 이용해 고체 입자를 생성한 뒤 모양을 프린팅하거나, 작은 입자를 내보낼 수 있는 탐침 시스템을 만들어 물체를 쌓는다.
안성훈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마이크로미터 수준에서는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 기술로 복잡한 구조물을 잘 만들 수 있지만 나노미터 수준에서는 만화캐릭터 수준의 복잡한 구조물을 프린팅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 에드워드 보이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교수팀이 신개념 다운사이징 기법을 적용한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 기술로 나노미터 수준의 복잡한 구조물을 프린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구조물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내용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지난해 12월 14일자에 실렸다. doi: 10.1126/science.aau5119
연구팀은 폴리아크릴레이트와 폴리아크릴아미드를 섞어 만든 하이드로겔을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의 재료로 사용했다. 이 재료는 염화마그네슘과 같은 2가 양이온이나 염산과 만나면 탈수 작용이 발생해 수축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다운사이징에 최적화된 재료인 셈이다. 연구팀은 이 하이드로겔에 ‘양광자석판인쇄기법(Two-photon Lithography)’을 적용해 머리카락 한 가닥 너비로 만든 앨리스 캐릭터의 패턴을 20~200배 줄여 수백 nm 수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양광자석판인쇄기법은 10nm 수준의 패턴을 입혀야 하는 반도체 생산과 같은 나노 공정 등에 널리 사용된다. 먼저 짧은 파장의 광자를 발생시키는 펨토초레이저 두 개를 한 지점에 쪼여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그러면 액체 상태로 존재하던 분자가 고체 입자로 변하고, 이 입자를 조절하면 나노 패턴을 그릴 수 있다.
연구팀은 우선 양광자석판인쇄기법을 적용해 μm 크기의 앨리스 패턴을 만들었다. 그런 뒤 하이드로겔의 화학적 조건을 바꿔 수분을 제거해 크기를 1000배가량 줄였다. nm 크기의 앨리스 패턴이 만들어진 것이다. 보이덴 교수는 “특수 하이드로겔을 재료로 사용하면 앨리스처럼 복잡한 구조물도 비교적 쉽게 3차원 나노 구조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10μm 은행잎과 예수상 조각
보이덴 교수팀이 개발한 방법을 사용하면 복잡한 나노 구조물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다만 수축하는 특성을 띠는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안 교수는 “이 연구는 우선 넓은 면적으로 프린팅한 뒤 이를 줄이는 방식으로 다운사이징에 성공해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의 구조적 정밀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면서도 “고분자이면서 수축까지 가능한 특수 재료를 써야하는 게 단점”이라고 평가했다.
재료에 상관없이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으로 정교한 나노 구조물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선 재료에 구애받지 않도록 에어로졸 및 잉크젯 방식의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 기술을 쓸 수 있다. 이 방식은 매우 미세한 초정밀 노즐을 통해 공기와 입자를 섞어 만든 잉크를 기판 위에 충돌시켜 잉크를 접합시키는 방식이어서 고분자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배합해 쓸 수 있다.
하지만 공기와 함께 입자를 충돌시켜 쌓는 방식이어서 정교함이 떨어진다. 때문에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야 한다. 이를 위해 진공 상태에서 전기장을 이용해 속도를 높인 집속이온빔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이온빔을 조각칼처럼 쓰는 셈이다.
안 교수는 이를 이용해 2~10μm 크기의 은행잎과 예수상을 3차원으로 정교하게 조각하는 데 성공했다. doi: 10.1088/1361-6439/aa6758 안 교수는 “수천~1만 볼트(V)의 전기장을 가해 속도가 빨라진 이온들을 렌즈를 이용해 수 nm 이하의 범위에 모을 수 있다”며 “MIT 연구진이 사용한 방식처럼 복잡한 구조를 바로 만들 수는 없지만, 최근에는 이런 방식으로 원하는 글자를 그리는 등 나노 조각 기술이 정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사전자현미경에 사용되는 탐침과 같은 μm 두께의 펜촉을 만들어 미세한 국소부위에 액체 잉크를 뿌리는 ‘물리칩 방식’도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에 사용된다. 또 분자가 전기장에 따라 스스로 자라게 하는 자기조립 방식도 활용되고 있다.
근육 대신할 구조물도 3D 프린팅으로
다운사이징 기술이 각광받는 이유는 향후 의료나 우주탐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nm 수준에서는 간격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색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나노구조색’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박홍규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팀은 2016년 ‘나노레이저 압력센서’라는 고감도 재난 경보 센서를 개발했다. 외부 압력에 따라 나노레이저의 간격이 변하고 이를 색으로 확인할 수 있어 이 센서를 건물에 설치할 경우 균열 등이 나타날 때 구조적 결함을 바로 탐지할 수 있다. doi: 10.1038/ncomms11569
의료용 나노로봇 개발에도 다운사이징 기술은 유용하다. 현재 수~수십μm의 로봇이 많이 개발돼 제어하는 기술이 나오고 있지만, 이를 바로 인간의 몸에 넣어볼 수는 없다. 만약 로봇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폭이 5~10μm인 모세혈관을 막아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특정 조건에서 생분해되는 원료로 의료용 나노로봇을 만들어 제어하면 향후 약물을 전달하는 등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최근 안 교수팀은 집속이온빔을 이용해 근육의 가장 작은 단위인 근원섬유(Myofibril)를 수백nm 크기의 구조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안 교수는 “현재 이 구조물의 성능을 검증하고 있다”며 “사람의 근육을 대신하는 기본 구조물 제작 등 의료용 연구에 3D 나노-마이크로 프린팅 기술을 계속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