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성공률은 난소 나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자궁은 40~60대에도 가임력(임신 능력)이 비교적 잘 보존되므로, 이론상으로는 20대에 난자를 채취해 얼려두면 폐경이 된 60대에도 외부에서 호르몬을 투여하면 임신이 가능하다. 20대의 ‘신선한’ 난자를 미래를 위해 냉동할 수 있다니. 혹할만한 제안이다. 공상과학(SF)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앞으로 일상이 될까. 냉동 난자 기술의 현재를 짚어봤다.
2월 13일과 14일, 국내에서 난임 치료로 유명한 차병원과 마리아병원을 차례로 방문했다. 두 병원 모두 ‘가임력보존센터’에서 냉동 난자 시술을 하고 있다.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서울역센터 로비에는 6개의 거대한 냉동 탱크가 전시돼 실시간 모니터링 중이었다. 탱크 속에는 배아, 난자, 정자가 냉동돼 있다.
서울마리아병원에서는 채혈을 통해 기자의 난소 나이를 측정했다. 만 27세인 기자의 난소 나이는 35세로, 남은 난자는 5만 개 이하로 추정됐다. 주창우 서울마리아병원 과장은 “만 35세가 되면 임신 성공률이 20대 초반과 비교해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말했다. 35세라니 이럴수가. 순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냉동 난자 생존율 95% 이상
2014년 10월 페이스북과 애플은 자사 여직원들에게 최대 2만 달러(약 2259만 원)의 난자 냉동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에서는 난자 냉동 열풍이 불었고, 페이스북과 애플은 우수한 여성 인재를 유치하겠다는 측면에서 직원 복지 정책으로 난자 냉동 비용 지원을 내세웠다.
난자 냉동은 시험관 아기 시술과 기본적인 원리와 과정이 같다. 차이점은 난자를 얼리느냐, 배아를 얼리느냐다. 주 과장은 “시험관 아기 시술은 이미 40년 이상 된 안정된 시술이지만, 난자 냉동은 이제 10년이 채 안 됐다”며 “배아와 달리 난자는 보관 기간 등에서 생명윤리법의 규제를 강하게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자는 우리 몸에서 가장 커다란 세포다. 이재호 차의과대 의생명과학과 교수는 “난자는 수분 함량이 많고, 반수체(염색체의 수가 절반인 개체)여서 미수정된 배아보다 주변 환경에 약하다”며 “세포 내 물질이 얼면서 칼같이 뾰족한 결정이 생기고 부피가 팽창해 세포가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난자와 배아를 냉동한 초기에는 완만동결법이 사용됐다. 먼저 난자를 동결보호제가 포함된 배양액에 넣는다. 그러면 삼투압 현상에 의해 난자의 수분이 밖으로 배출되고 동결보호제가 천천히 난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난자의 온도를 천천히 낮춰 영하 80도까지 냉각시킨 뒤 영하 196도 액체 질소에 넣어 보관한다. 완만동결법의 단점은 이 과정에서 얼음이 생겨 세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최근 임상에 도입된 유리화동결법을 이용한다. 완만동결법보다 높은 농도의 동결보호제에 짧은 시간 동안 노출해 탈수를 유발한 뒤 급속 냉동시키면 세포의 안과 밖이 유리화된 고체 상태로 변해 세포 손상 없이 분자 운동이 정지된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냉동된 난자를 녹일 때는 실온의 배양액에 담가 온도를 올려 녹이는 급속 해동법을 이용한다. 유리화동결법이 도입된 이후 냉동 난자의 생존율은 40%에서 95% 이상으로 크게 올랐다.
이정렬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현재까지 발표된 연구에서 유리화동결법으로 냉동한 난자와 신선 난자를 비교했을 때 수정률, 임신율, 분만율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난자 동결 및 해동에 경험이 많은 기술자가 숙련된 기술로 시행을 때의 결과인 만큼 모든 난임센터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내 난자 냉동 사례는 최근 증가하는 추세다. 이 교수는 “암 및 난소질환이 있는 여성이 가임력 보존을 위해 난자를 냉동한 사례는 2013년 이후 약 650여 건 정도”라고 말했다. 미혼여성의 난자 냉동 건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다.
냉동된 난자, 해동한 뒤에는?
난자 냉동 사례는 증가하고 있지만, 해동 사례는 아직 드물다. 주 과장은 “냉동된 난자를 이후에 얼마나 해동해 사용했는지에 대한 통계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다”며 “많게는 8%, 적게는 4~5%의 냉동 난자만이 해동된다”고 말했다.
서울마리아병원 가임력보존센터의 경우 2013~2018년 난자 해동 사례는 40건 정도다. 이 중 21%가 임신에 성공했다. 주 과장은 “난자 채취 당시 나이가 평균 40세 정도인 것을 생각했을 때 시험관 아기 성공률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냉동 난자의 임신 성공률이 일반 시험관 아기와 비슷하다”면서도 “난자 냉동을 시행하는 경우 암 환자나 난소 질환자의 가임력 보존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해동 당시 전신의 상태와 자궁 상태 등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체외수정 시술보다는 임신율이 저하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난자는 몇 개나 얼려야 할까. 임신 성공률은 냉동시킨 난자의 수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다다익선이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분당서울대병원 가임력보존센터에서는 임신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총 10~15개의 난자를 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한 번에 10~15개를 채취하면 가장 좋지만 이보다 적게 배란이 될 때는 난자 채취를 여러 번 할 것을 권유한다”고 말했다.
난자를 한 번 채취할 때 비용은 200만 원 정도다. 보통 한 달에 하나씩 난자가 배란되므로 냉동 난자 시술 역시 시험관 아기 시술처럼 난자 채취 전 과배란주사를 맞아 난자의 생성을 촉진한다. 한 번에 채취할 수 있는 난자의 개수는 나이와 개인의 난소 상태에 따라 다르다.
과배란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주 과장은 “과배란주사를 과하게 사용하면 난소가 붓고 배에 복수가 차는 난소과자극증후군에 노출될 수 있다”며 “무리하지 않게 배란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비용을 많이 들이면 보장 범위가 더 넓고 혜택이 많은 보험처럼, 난자 냉동 역시 효용을 따져 얼마나 많은 난자를 냉동할지 여성 본인이 선택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난소 냉동, 자궁 이식…사회 제도 뒷받침돼야
최근에는 난자 냉동에서 더 나아가 난소 냉동, 자궁 이식 등 새로운 방식의 생식 기술 연구가 활발하다. 난자 냉동은 아직 배란이 없는 초경 전의 소아암 환자나 항암치료가 당장 시급한 환자에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때 난자 대신 난소 조직 전체를 동결하는 게 해법이 될 수 있다. 난소 냉동은 난자 냉동에 비해 아직 임상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시험관 아기가 아닌 자연 임신이 가능하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가임력보존센터는 2015년 7월 항암치료를 앞두고 난소를 동결해뒀던 34세 여성에게 동결보존 돼 있던 난소를 복강 내에 이식하는 수술에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 doi: 10.3346/jkms.2018.33.e156 이 교수는 “향후에는 20대 때 난소 한 쪽을 얼려두고 50대에 폐경이 온 뒤 이식해 폐경을 늦추는 방법이 임상에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연구팀은 2013년 세계 최초로 자궁 이식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 2016년 연구에 따르면 자궁 이식을 받은 여성 11명 중 7명이 임신에 성공했다. 기증자는 대체로 엄마, 이모 등 출산 경험이 있는 친인척이다(폐경 이후여도 상관없다). 만약 딸이 엄마의 자궁을 이식받는다면 딸과 손녀가 아기 때 같은 집에서 자란 셈이다. doi: 10.1016/S0140-6736(14)61728-1, doi: 10.2147/IJWH.S75635
이들은 여성에게 ‘커리어 해방’을 가져다줄까? 서울마리아병원 가임력보존센터의 광고 카피는 “사랑도 보존이 되나요?”다. 난자 냉동은 항암치료를 앞둔 환자는 물론 사회적인 이유로 출산을 미루는 여성에게 아이를 언제 낳을지 결정하는 선택권을 제공한다.
정연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난자 냉동을 본다. 정 교수는 “난자 냉동 역시 다른 생식기술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해방과 억압이라는 양극단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다양한 측면이 있다”며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이러한 압박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로만 난자 냉동을 선택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난자 냉동과 같은 생식기술을 이용해 여성 개인이 위험을 감수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주 과장 역시 “난자 냉동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돕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라며 “무엇보다 차후 출산 계획이 있는 자가면역질환이나 암 환자처럼 꼭 필요한 사람에게 이 기술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