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 1g으로 석유 8t(톤)을 태워 만들어내는 전기에너지와 같은 양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빛과 열에너지를 만드는 태양이라면 가능하다. 강한 중력이 작용하고 뜨거운 태양 중심부에서는 태양을 구성하는 수소 원자핵이 융합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핵융합이라고 부른다.
태양에서만 가능한 핵융합을 지구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면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를 부르는 화력발전도, 탈원전 논란도 필요 없다. 먼 미래에서나 가능한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해 지구에서도 핵융합 반응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1억 도에 이르는 뜨거운 ‘인공태양’이 짧은 시간 동안 한국 땅에서 타올랐다.
지구에서 핵융합 반응 일으키려면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항성인 태양은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수소 원자끼리 융합할 때 헬륨 원자핵으로 바뀌면서 잃게 되는 질량만큼 중성자가 튀어나오는 게 핵융합 반응이다.
이 때 튀어나오는 중성자는 엄청난 열에너지를 갖고 있다. 핵융합 반응을 지구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에너지로 물을 끓여 생성된 수증기로 터빈을 돌려 무한한 전기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핵융합 연구를 ‘인공태양’ 연구로 부르는 이유다.
태양은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인 플라스마(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이온상태)를 스스로 만든다. 중심부 온도 약 1500만 도에서 플라스마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태양 자체의 큰 질량과 상상을 초월하는 중력이 플라스마를 촘촘한 밀도로 가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량이 태양의 0.0003%에 불과한 지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론적으로는 플라스마의 밀도와 온도를 곱한 값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데, 태양만큼 큰 중력을 얻기 힘든 지구에서는 태양과 유사한 촘촘한 플라스마 밀도를 만들지 못한다.
핵융합 반응을 일으킬 플라스마의 이온 밀도가 높아야 서로 부딪혀 핵융합 반응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지구에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면 이론상 태양 중심 온도인 1500도보다 7배가량 높은 1억 도의 초고온 플라스마를 만들어 태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밀도를 보완해야 한다.
2008년 플라스마 첫 발생 이후 10년 만
1억 도 이상 초고온 플라스마가 만들어졌다면 이를 가둘 그릇(핵융합장치)이 필요하다. 플라스마를 만들 연료로 쓸 중수소와 삼중수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 억 도의 플라스마 상태에서 수소 원자핵들이 융합해 태양에너지와 같은 핵융합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핵융합장치는 초고온 플라스마를 진공 용기 속에 넣고 자기장을 이용해 플라스마가 벽에 닿지 않게 가둬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상용화에 가장 근접한 방식은 ‘토카막(Tokamak)’이다. 토카막은 초고온의 플라스마를 자기장을 이용해 가두는 핵융합장치를 말한다. D자 모양의 초전도 자석으로 자기장을 만들어 플라스마가 도넛 모양의 진공용기 안에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제어한다.
한국의 핵융합장치인 ‘KSTAR(Korea Supercon -ducting Tokamak Advanced Research·케이스타)’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2년 동안 국내 기술로 개발된 초전도 핵융합장치다. 국가핵융합연구소는 2007년 8월 KSTAR를 완공했다.
2008년 5월, KSTAR 연구진은 초전도 핵융합장치 운전을 위한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극저온 냉각 시운전을 단 한번에 성공했다. 약 한 달 뒤인 6월 13일, KSTAR는 최초로 플라스마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12년의 연구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8년, KSTAR 연구진은 플라스마 중심 이온온도를 1.5초간 1억 도 이상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8월 말부터 12월까지 진행한 KSTAR 플라스마 실험을 통해서다. 플라스마 이온온도 1억 도는 핵융합 반응의 원료가 되는 중수소-삼중수소 간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온도다.
韓-中, 1억 도 달성 선두 경쟁
KSTAR와 유사한 시기에 구축된 중국 초전도 핵융합장치 ‘이스트(EAST)’는 지난해 11월 플라스마 온도를 1억 도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KSTAR와 이스트 중 누가 먼저 1억 도를 달성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가피했다. 당시 KSTAR의 공식 기록은 7000만 도. 중국 측은 KSTAR보다 이스트가 1억 도 달성에 앞섰다고 발표했다.
윤시우 KSTAR연구센터장은 “추후에 공개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이스트가 달성한 것은 이온온도가 아니라 전자온도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스트는 전자기파를 이용해 플라스마를 가열하는 방식이다.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플라스마는 전자와 이온으로 구성되는데, 결국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이온끼리 융합해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온온도를 1억 도로 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문가들은 KSTAR가 이스트를 앞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KSTAR 연구진은 올해 플라스마 이온온도 1억 도를 10초간 유지하는 데 성공하면 핵융합에너지 실증을 위한 장시간 운전 조건인 300초 이상 고성능 플라스마를 운전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윤 센터장은 “플라스마가 가열되다가 식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제어해 5~6초 지속할 수 있다면 이온온도 1억 도를 10초까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올해 세계 최초로 10초 이상 유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올해 추가로 도입하는 중성입자빔가열장치(NBI)-2를 활용할 계획이다.
핵융합은 ‘현실의 인공태양’
한국과 중국이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토카막 핵융합장치를 운용하고 있지만, 이들 핵융합장치의 주 연료는 중수소다.
중수소만으로 플라스마를 만들어 실험하는 이유는 중수소 실험 데이터로 중수소-삼중수소 핵융합 반응 데이터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중수소-삼중수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면 방사선이 발생하는데, 원자력규제기관의 방사선 안전 규제를 충족해야 반응을 할 수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실제로 중수소-삼중수소로 핵융합 반응을 실험할 수 있는 현존 장치는 유럽의 상전도 토카막인 ‘JET’가 유일하다. 1983년 완공된 JET는 강한 자기장으로 플라스마를 가두는 초전도 방식이 아니라 상전도 토카막이어서 효율이 떨어진다. 현재 초전도 토카막으로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를 목표로 건설 중인 최대 규모 장치는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건설 중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다.
한국과 유럽연합(EU),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인도 등 7개국이 참여해 구축하고 있는 ITER는 2025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2025년 이후에는 중수소-삼중수소를 이용한 초전도 핵융합 반응을 통해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 검증에 나선다.
유석재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은 “KSTAR의 플라스마 이온온도 1억 도 달성은 향후 국제핵융합실험로에서 진행될 핵융합 반응 실험에 중요한 데이터가 될 것”이라며 “이제 핵융합 연구는 ‘꿈의 인공태양’이 아니라 현실과 가까워지는 인공태양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