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은 윤정과 지호의 스무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파티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처 이탈리아 식당에서 온가족이 저녁 외식을 할 정도는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호는 21일에 술에 취한 채 술집 계단을 올라가다가 발을 삐끗해 뒤로 넘어졌고, 지금 엉덩이 뼈가 부러지고 왼쪽 정강이뼈에 금이 간 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식당 예약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녁엔 쌍둥이들과 함께 근처 중국 식당에서 테이크아웃 음식을 챙겨 들고 병원을 찾을 예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결혼기념일 같은 행사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20이라는 숫자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십진법의 힘이었다.
20년이라니. 참 오래도 같이 살아왔다.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결혼한 윤정은 몇 년 더 일찍 할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쌍둥이 형제는 내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아들 둘을 얻은 뒤로 모든 게 2배속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5월에 돌아오는 생일을 넘기면 벌써 만으로 47살이었다. 쉰이 코앞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윤정은 일정을 검토했다. 집안 일을 끝내고 4시까지는 번역 중인 다리오 프레다의 책을 작업해야 했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예방접종을 하러 고양이 민트를 아파트 밑에 있는 동물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고양이를 데리고 돌아오면 근처에 사는 여자들과 5년째 이어가고 있는 독서 모임에 잠시 얼굴을 들이밀어야 했다. 여자들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가겠지만, 윤정은 거기서 헤어져 쌍둥이들과 함께 아빠가 갇혀 있는 병원을 찾을 것이다. 하루가 이렇게 증발해가는 것이다.
윤정이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동안 지호는 계속 무의미한 문자를 보내오며 윤정을 귀찮게 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잠시 생긴 휴가를 즐기며 책도 읽고 영화도 보겠다고 선언했지만, 남편이 그렇게 맘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윤정도 알았다. 3개월 전에 다니던 회사를 떠난 남편은 사촌 두 명과 함께 창업 준비 중이었고 세 남자는 지금 정신 없이 바빴다. 뼈 몇 개가 부러졌다고 맘 편하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집안 일이 끝나자 10시 반이었다. 윤정은 거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커피테이블 화면에 프레다의 영어 원고와 번역기가 초벌 번역한 한국어 원고를 동시에 띄웠다. 격세지감이 몰려왔다. 결혼 직후 이 직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번역 대부분은 윤정의 머리와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70퍼센트가 번역기의 몫이었다. 이제 윤정이 하는 일은 번역보다는 편집에 가까웠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나면 이 직업은 또 어떻게 바뀔까.
존재하기는 할까.
번역기의 발전은 20년 전에도 예상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프레다가 쓴 책의 내용이었다. 20년 전 윤정은 자신이 시베리아 동토층에 묻혀있던 고대 외계 우주선의 잔해에 대한 진지한 학술 서적을 번역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긴 러시아 정부도 최대한 은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선에서 170종이 넘는 외계 미생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죽어나가고 사설 스파이 위성들이 이 모든 상황을 생중계하는 경우엔 그게 쉽지 않다.
3시 반까지 14장이 마무리되었다. 윤정은 그날 작업분을 한 번 훑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던 민트를 잡아 케이지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동물병원이 있는 상가 건물은 아파트에서 5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기실 의자엔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모두 같은 단지 이웃이었다. 윤정과 같은 나이 또래인 명은 엄마는 엘리자베스 칼라를 쓴 초코라는 이름의 다리가 짧고 코 주변이 까만 믹스견을 데리고 왔다. 옆에서 울먹이고 있는 30대 초반의 여자는 대학 동창과 함께 근처 가구 공방을 운영하는 안은성으로, 와플이라는 카오스 냥이를 키우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고, 같은 독서 모임의 회원인 은성은 종종 윤정의 가족이 여행을 떠날 때 민트를 돌봐주었고, 윤정 역시 그 집에 비슷한 사정이 생기면 와플을 맡았다. 와플은 15살이었고 지난 몇 주 동안 많이 아팠다. 은성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니 그 동안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화가 잔뜩 난 민트를 거실에 풀어놓고 윤정은 독서 모임이 있는 북카페로 갔다. 모임에서는 4월 동안, 얼마 전 새로 번역된 유도라 웰티의 전집을 읽고 있었다. 은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와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윤정은 웰티의 책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와플 이야기를 했다. 아직 대학생이던 은성이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채 울고 있던 와플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그 까칠한 고양이가 민트와 합작해서 윤정의 가죽 소파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 모임 사람들과 헤어진 윤정은 병원까지 걸어갔다. 병실은 식당처럼 시끄러웠다. 쌍둥이들은 테이크아웃 중국 요리들을 여기저기 벌려놓았고 남편의 두 사촌들은 스포츠 뉴스를 보면서 떠들고 있었다. 윤정이 들어오자 남자들은 모두 20주년을 축하하는 흐리멍덩한 말들을 생일축하라도 하는 것처럼 웅얼거렸고 곧 음식에 달려들었다.
쌍둥이와 함께 집에 돌아온 윤정은 아이들에게 거실 텔레비전을 내주고 베란다로 나왔다. 놀이터 옆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보였다. 은성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정은 밖으로 나갔다. 둘은 인사를 주고받았고 윤정은 은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와플은 이미 동물병원을 거쳐 장례업자에게 가 있었다. 고양이의 유골은 전에 스캔해 둔 와플의 모습에 맞춘 작은 도자기 인형이 되어 월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와플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주고 받았고 같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은성은 3층에서 내렸고 윤정은 6층으로 올라갔다. 쌍둥이들은 아직도 게임 중계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방에서 태블릿으로 유도라 웰티 전집의 마지막 권을 읽던 윤정은 9시 정각을 치자 욕실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흐릿한 욕실 거울을 바라보며 아무런 생각없이 칫솔을 꺼내던 윤정은 갑자기 깜짝 놀라 이를 악물었다.
그 동안 흐릿하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 한꺼번에 정리되고 명확해졌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 윤정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니야.
“추억충이에요.”
의사가 말했다. 윤정은 의사가 반쯤 돌려놓은 모니터를 통해 그녀의 눈과 뇌 사이에 숨어있는 쌀알 크기의 외계 기생충을 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실 필요도 없고요. 추억충의 성충 수명은 기껏해야 4주 정도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위험한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쓸데없이 건드리다간 오히려 일만 키우죠.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새 약을 처방해드립니다. 하루에 한 번씩 복용하시면 알이 퍼질 가능성이 80퍼센트 줄어들어요.”
젊은 의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윤정을 올려다보았다.
“가벼운 감기 증상과 현기증을 열흘 전에 겪으셨다니 성충의 수명은 한 보름 정도 남았군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아셨나요?”
“그냥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윤정은 대답했다.
“얼마나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것이었나요? 제 주변에 추억충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감염자의 자각이 이렇게 분명한 경우라면….”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가끔가다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달까. 게다가 요새 제가 시베리아 우주선에 대한 책을 번역하고 있거든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도 모르니까 제 친구의 번호를 알려드리죠.”
윤정은 예의 바르게 그녀가 내민 종이조각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지만 약국에서 약을 사고 나오는 동안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윤정은 일차 번역을 거의 마무리 지은 다리오 프레다의 원고를 태블릿으로 열었다. 시베리아 우주선에서 나온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일급 전문가는 프레다 말고도 많겠지만 프레다만큼 이들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추억충은 시베리아 우주선 생명체 중 유전적으로 조작되었음이 의심되었고 확인된 여섯 종 중 하나이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유충은 혈액을 타고 뇌와 눈 사이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성충이 된다. 성충은 알을 모두 소진하고 사흘 안에 죽는다. 혈액 안에서 부화한 유충은 다시 호흡기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추억충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이전 숙주의 기억을 다음 숙주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정보가 다음 세대와 숙주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프레다는 이 생명체가 자료수집용으로 만들어졌으며 10만 년 동안 지하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천천히 퇴화되었다고 믿는다. 고장난 기계인 셈이다.
그 고장난 기계가 지금 내 머릿속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윤정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온 몸의 힘을 빼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그녀의 몸 속에 숨어 있는 이질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랑이었다. 안은성에 대한 지속적이고 끈질긴 사랑의 감정.
그것은 성적인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로맨틱한 것인가? 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는 위험한 단어이다.
윤정은 그녀를 지나쳐갔고 지금도 옆에 머물고 있는 수많은 여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들, 동료들, 이웃들, 좋아했던 연예인들, 이미지들로만 떠도는 무언가. 그들 중 누구라도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주변의 진짜 사람들은 아니었다. 전에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그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웃어버리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로맨틱한 감정을 진짜 사람에게 느꼈다는 그 이상한 현상 때문에.
윤정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데이트는 억지로 거쳐야 하는 통과제의였다. 지호에 대한 감정은 동료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지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들에겐 사랑의 감정보다 빨리 연합해서 경제적인 단위체를 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험악한 시절이었다. 이 감정이 그녀 자신의 것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왜 안 되는가. 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인가? 하지만 뇌와 눈 사이에 숨어있는 쌀알만한 외계생명체가 가느다란 신경망을 내 뇌 이곳 저곳에 박고 있는 게
확인되었다면 그 생명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누구한테서 온 것일까.
화요일 저녁, 윤정은 은성의 가구 공방을 찾아, 서재 구석 빈 자리에 끼울 새 책장을 주문했다. 그 계획은 몇 달 전부터 품고 있었고 지호와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은성은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녀는 가게의 3D프린터로 만든 와플의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와플의 재로 만든 같은 모양의 작은 조각상이 어제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했다. 새 조각상은 그 옆에 놓을 것이었다. 은성은 와플이 남긴 고양이 물건들을 차마 치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청소를 할 때마다 와플의 털과 발자국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고도 했다.
은성의 친구 화연이 작은 머그잔에 담긴 대추차를 내왔다. 차를 마시면서 윤정은 책장의 디자인을 검토했다. 윤정이 가져온 치수로도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빈 공간에 딱 맞추려면 보다 정확한 측정이 필요했다. 은성은 가게문을 닫은 뒤 휴대용 스캐너를 갖고 윤정의 집을 들르겠다고 했다. 한 시간 뒤, 은성은 윤정의 집을 찾았다. 민트의 느긋한 환대를 받으면서 은성은 서재 구석 공간을 스캔했다. 윤정은 책상 옆에 서서 일에 열중한 은성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친근했던 이웃이었던 사람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예전부터 은성이 예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연예인처럼 눈에 확 뜨이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친근하게 예쁜 외모다. 하지만 지금 그 외모에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 얼굴과 몸의 선 하나하나가 윤정이 정확하게 해독할 수 없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은성의 아름다움은 그 알 수 없는 정보의 표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 밑을 조금만 더 파고 들 수 있으면 이 갑갑함이 풀릴 텐데. 윤정이 은성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그 정보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윤정은 은성에게 저녁을 먹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은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메뉴는 태국식 볶음밥이었다. 윤정이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리였다. 쌍둥이는 그릇을 하나씩 들고 자기네 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식당엔 윤정과 은성만 남았다. 둘은 두 사람의 다리를 번갈아 비비면서 칭얼대는 민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자스민 차를 마시면서 윤정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갔다. 드디어 식탁 위까지 올라온 민트 때문에 와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다시 나왔고 드디어 화연이 마련한 새 아파트 이야기도 나왔고 독서 모임에서 읽고 있는 유도라 웰티의 책들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윤정에게 대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은성이 앞에 있다는 것, 그 존재감이 자신에게 전자석처럼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정은 대화를 풀어가면서 그 감정을 객관화시켜 분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지난 며칠 동안 윤정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 지 오래였다. 지금 은성 때문에 뛰고 있는 것은 윤정 자신의 심장이었다.
기억 역시 분리하기 힘들었다. 윤정이 물려받은 기억은 칼로 자른 것처럼 경계나 모양이 분명하지 않았다. 감정이 은성의 외모에 의해 자극되었으므로 시각적인 정보가 분명히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소리와 연결된 청각적 정보도 숨어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분리해 나다가 보면 원래 기억을 갖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기억까지 가려낼 수 있는 걸까? 윤정은 자신이 없었다. 윤정이 물려받은 건 수줍은 짝사랑의 기억이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기억은 은성에 대한 기억 뒤에 숨어있었다.
무엇보다 윤정은 귀찮아졌다. 은성의 존재가 주는 쾌락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를 분석하기가 싫어졌다. 왜 이 감정과 감각을 즐겨서는 안 되는가. 내가 은성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윤정의 생각이 방황하는 동안 한 시간 반이 흘러갔다. 이야기는 유도라 웰티에서 앤 래드클리프로, 앤
래드클리프에서부터 번역가의 고충으로 흘러갔고 번역가의 고충에서… 그 뒤부터는 잘 기억도 안 났다. 윤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와플이 남긴 고양이 먹이와 간식을 받으러 은성의 아파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소파에 앉아 힘없이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던 은성의 어머니와 조용히 인사를 주고 받은 윤정은 기계적으로 아직 아파트 이곳 저곳에 남아있는 와플의 흔적을 찾았다. 벽 구석에 서 있는 캣타워, 벽지 모서리에 붙어 있는 한가닥 고양이 털, 소파 옆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고양이 목걸이 그리고 선반 위에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 조각상.
그 순간 어떤 희미한 기억이 윤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윤정은 그 기억을 잡으려 했지만 그 기억은 순식간에 다시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아파트와 관련된 이질적이고 낯선 기억. 그 사람은 여기에도 왔었던 걸까? 그리고 그 기억은 무언가 손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은성과 화연이 만든 새 책장이 들어왔다. 책장은 빈 공간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서 마치 이전부터 벽의 일부였던 것 같았다.
그 뒤로 한동안 윤정은 은성을 만나지 않았다. 번역 마감이 코앞이었고 지호가 휠체어와 목발을 끌고 병원에서 돌아와 귀찮은 잡일이 잔뜩 생겼다. 마지막 주 독서 모임은 건너 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동안 윤정은 단 한 번도 은성을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윤정의 머리는 은성을 둘러싼 소용돌이와 같았다. 거의 마무리가 된 프레다의 책 작업은 은성에 대한 집착을 부풀릴 뿐이었다. 창업 문제 때문에 잔뜩 짜증이 난 지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윤정은 은성에 대한 몽상 속으로 도피했다. 그러는 동안 추억충이 가져온 기억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꾸준히 계속 되었다. 화요일 아침에 최종 원고를 보낸 윤정은 서비스 회사에서 온 도우미에게 지호를 맡기고 근처 커피빈으로 도피했다. 에스프레소와 머핀을 하나씩 시켜놓고 ‘시칠리아 로맨스’를 읽었다. 혐오스러운 후작 때문에 개고생하는 여자들 이야기였다. 페이지는 훌렁훌렁 넘어갔지만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지친 눈을 쉬려고 태블릿에서 눈을 돌렸을 때, 윤정은 강한 데자뷔를 겪었다. 그건 전에 은성의 아파트에서 겪었던 일과 거의 비슷한 현상이었다. 익숙한 공간이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완전히 재해석되는 것.
윤정은 창 너머 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은성의 가구 공방은 멀지 않다. 구석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면 여기서도 가게가 보일 정도였다.
윤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기분은 커피빈에서 가구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동안에도 깨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은성을 생각하고 은성을 볼 기대에 들뜬 채 이 길을 반복해서 걸었던 것이다. 길을 걷는 동안 그 누군가의 모습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아마도 남자. 아마도 낯선 사람. 윤정은 조금씩 불쾌해졌다. 지금까지 순수하고 즐겁기만 했던 은성에 대한 감정에 더러운 불순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불쾌함은 길 건너편에서 은성의 가게를 바라보는 위치에 섰을 때 정점에 달했다.
부인할 수 없는 염탐자의 시선. 왜 이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파란불이 켜졌다. 윤정은 망설였다. 바로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확 밀치고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걸어갔다. 윤정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 뒤를 따랐다. 걷는 동안 둘의 걸음걸이는 거의 완벽하게 리듬이 맞아떨어졌다. 남자는 잘 맞지 않는 싸구려 새 양복을 입고 있었고 이발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피부는 거칠었고 얼핏 본 불그레한 옆얼굴은 불안해보였다.
길을 건넌 남자는 가구 공방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안으로 돌격했다. 그는 인사하는 화연을 거의 밀쳐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은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게 정신 나간 횡설수설이란 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정이 훔쳐보는 몇 분 동안 가게 안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은성은 겁에 질려 있었고 화연은 화가 잔뜩 나있었다. 남자는 사정하고 애걸하고 울먹이다가 슬슬 화를 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윤정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윤정이 들어오자 안의 두 여자들은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에겐 윤정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알아듣기 힘든 뭉개진 발음으로 은성에게 계속 뭐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후렴처럼 반복되는 “은서 씨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만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윤정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갑자기 들어와서 저러네요.”
은성이 대답했다.
남자는 화를 버럭 냈다. 발을 구르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윤정이 열어둔 문을 통해 남자의 고함소리가 흘러나왔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잠시 뒤 순찰차가 도착했고 경찰관 두 명이 내렸다. 다들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화연이 경찰에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경찰관들은 발버둥치며 저항하는 남자를 가게에서 끌어내 순찰차에 태웠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어요.”
간신히 상황이 정리되자 화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죄의식과 수치심이 목까지 올라온 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후작은 로체스터의 흉한 버전이라고요.”
지연 엄마가 말했다.
“로체스터가 나중이죠.”
서지음 교수가 덧붙였다.
“알아요, 알아요.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교수님.”
마지니 자매의 흉악한 아버지와 로체스터를 비교하는 지연 엄마의 조곤조곤한 연설이 이어졌다. 독서 모임의 절반은 동의했고, 나머지 절반은 이 재수없는 인간을 감히 로체스터와 비교하는 것 자체를 동의할 수 없었다.
샬롯 브론테가 이야기를 짜는 데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후작과 로체스터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어쨌건 앤 래드클리프의 소설들은 다 비슷비슷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우돌포의 비밀’을 먼저 읽은 미주 엄마가 우쭐거렸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제인 오스틴으로 넘어갔고 누군가가 ‘제인 오스틴 북 클럽’이라는 옛날 영화와 거기서 SF광으로 나온다는 휴 댄시라는 배우 이야기를 꺼냈다. 그 누군가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 줄거리 소개가 한참 이어졌다.
윤정은 거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종종 추임새를 넣고 후작에 대해 몇몇 코멘트를 던지긴 했지만 도저히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제 윤정은 그 남자에 대해 알만큼 알았다. 이름은 심창대라고 했다. 알코올 중독자였고 술에 취해 아내와 2살짜리 아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이혼당했다. 9개월 넘게 실직상태였고 보조금으로 간신히 의식주만 해결하며 살아왔다. 낮 시간 대부분을 지하철역 주변을 방황하며 보냈고 해가 지면 늘 술에 절어 있었다.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루저’였다. 저번 직장에 있었을 때 사무실 책상과 선반을 맞추려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은성의 공방을 찾은 적이 딱 한 번 있었고 그게 1년 전이었다. 그 때부터 은성에게 집착했던 걸까? 경찰은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왜 갑자기 그 날 그 난리를 쳤던 걸까? 은성이 자기를 받아줄 거라는 망상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심지어 그는 은성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윤정은 어떻게 그 남자가 가게를 습격하는 현장을 잡을 수 있었던 걸까? 처음에 윤정은 그게 일종의 텔레파시가 아니었나 의심했다. 하지만 추억충과 관련된 자료를 아무리 읽어도 텔레파시는 말이 안 되었다. 그냥 우연이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생각해보니 그리 이상한 우연도 아니었다. 윤정에겐 그 남자의 기억, 적어도 그 기억의 흔적이 있었다. 그의 계획을 아는 건 불가능했지만 운 좋게 그 리듬에 쓸려갈 수는 있었다.
가게의 소동 이후 윤정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며칠을 보냈다. 추억충이 가져다 준 은성에 대한 감정은 최근 몇 년 동안 있었던 일 중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고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알고 봤더니 어린애나 두들겨 패는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 스토커의 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아름다운 무언가로 착각할 수 있었던 걸까? 윤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정답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몇 분 전, 바로 이 북카페에서 은성의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였다.
생각해보라. 이 모든 게 심창대의 망상이라고 친다면 설명 안 되는 구석이 너무 많다. 윤정이 가진 은성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은 친밀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옆에서 조용히 감정을 키워온 누군가의 것이었다. 심창대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다. 윤정은 은성의 아파트에 대한 특별한 기억도 갖고 있었는데, 심창대는 은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윤정이 물려받는 기억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것이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게 말이 됐다. 추억충은 숙주의 기억을 다른 숙주에게 전염시킨다. 그 과정은 계속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 누군가의 기억이 심창대에게 전염되고 그 전염된 기억이 다시 윤정에게 넘어가고. 이렇게 되면 심창대가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알코올로 망가진 그 남자의 두뇌가 추억충이 넘겨준 기억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윤정 전에 추억충이 거쳐온 숙주들이 과연 두 명뿐이었을까? 세 사람일 수도, 네 사람일 수도, 다섯 사람일 수도 있었다. 아니, 꼭 사람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은성의 아파트와 관련된 기억. 그것은 은성의 손에 대한 것이었다. 그냥 손이 아니라 엄청난 크기로 부풀려진 거인의 손. 이제 기억이 난다. 감염 과정 중 뒤틀린 게 아니라면 그건 와플의 기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와플이 죽은 게 과연 우연일까? 추억충은 인간의 몸에 기괴할 정도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늙은 고양이에게도 그럴까?
윤정은 그 과정을 생각했다. 처음에 추억충은 일차 감염자의 기억과 감정을 추출해냈다. 감염자는 기침을 통해 그 정보를 품은 유충들을 사방에 뿌렸다. 은성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정보는 별 의미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은성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은성을 아는 새로운 감염자는 그 감정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누적되고 강화된 기억과 감정은 기침을 통해 또다시 전파된다. 그 기억에서 기억의 주체를 골라낼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심창대의 기억이 그렇게 쉽게 묻힐 수 있었던 것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은성에 대한 사랑이 전염병처럼 동네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은평구 안은성 팬클럽.
누군가 기침을 했다. 지연 엄마였다. 환절기 감기일까? 아니면 지연 엄마도 감염된 것일까? 지연 엄마를 감염시킨건 윤정이었을까? 약이 감염 가능성을 80퍼센트 정도 줄여준다고 했지만 나머지 20퍼센트는? 그 이전에 감염되었다면? 처음부터 추억충에 감염된 독서 모임 사람이 윤정 하나뿐이 아니었다면? 만약 이 기억을 가진 추억충이 은성 자신에게 감염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윤정이 새로운 추가 기억을 담은 추억충에게 다시 감염이 된다면 이번엔 어떨게 될까? 첫 감염자가 추억충에 묻어 온 다른 기억때문에 은성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을 수도 있었을까?
윤정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독서 모임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우연일 수도 있었지만 은성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중심에 앉아 있었다. 미주 엄마가 은성에게 피칸 쿠키를 내밀었다. 은성이 히폴리투스에 대한 다소 밋밋한 농담을 하자 다들 소리내어 웃었다. 가게에 찾아온 스토커 이야기가 나왔고 모두 은성을 위로했다. 막내인 은성은 전부터 모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전에도 지금 같았는가?
상관없었다. 윤정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이 감정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누구를 거쳤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랑 자체였다. 이 때문에 윤정의 삶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윤정은 덩치 크고 시끄러운 세 남자들과 함께 툴툴거리며 남은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은성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일 것이고 그 뒤로도 윤정의 일부로 남아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라고,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윤정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