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다양성(Biological diversity)’이라는 용어는 야생 생물 과학자이자 자연 보호론자인 레이몬드 대즈만이 1968년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10년 이상 지난 1980년대가 돼서야 생물종의 관리와 보전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생물학적 다양성의 의미와 중요성을 인지한 것은 40년이 채 되지 않은 셈입니다. 지금은 흔히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라고 줄여 씁니다.
생물다양성은 말 그대로 생물의 다양성을 뜻합니다. 지구 생물종의 다양성,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다양성, 생물이 지닌 유전자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이번 호에 소개할 논문은 유전자의 다양성 측면에서 생물다양성을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된 기념비적인 논문입니다.
생물다양성은 왜 중요할까?
생태계는 생물종의 다양성에 영향을 받으며, 생물종은 유전적 다양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생태계와 종, 유전자 등은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는 셈입니다.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로 종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결국 멸종하면, 그 생물종이 포함된 생태계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생태계든, 종이든, 유전자든 그 다양성을 원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지구 생태계를 이루는 핵심 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생물종의 품종을 개량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해왔습니다. 그 결과 현재 지구는 생물다양성의 손실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동물과 식물, 곰팡이 등 여러 생물종의 보전 상태를 알리고 생물다양성을 위한 지표를 마련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1993년에는 생물다양성의 보전과 생물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및 이익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를 위해 ‘생물다양성협약’이 발효됐고,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194개국이 가입한 상태입니다. 생물다양성협약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과 함께 세계 3대 환경협약으로 꼽힙니다.
생물다양성은 어떻게 확인할까?
생물다양성 연구란 지구상의 생물종을 발굴하고, 이들의 서식 환경(사막, 삼림지, 습지대, 산, 호수, 강 및 농경지)에 속하는 모든 생물과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 종 내의 유전자와 한 집단 내 개체들 사이의 유전적 변이 연구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유전적 다양성 연구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특정 생물 종이 생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생물다양성 연구의 기본이 되는 분야입니다. 유전적으로 건강한 생물종은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고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생물종은 환경 변화나 교란에 극히 취약해 개체수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멸종에 이릅니다.
이런 이유로 개체수가 적은 멸종위기 생물종의 경우 유전적 다양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낮아지는 이유는 근친교배, 집단 내 이형접합성의 감소, 생태계의 물리적 분리로 인한 고착 등이 있습니다.
유전적 다양성 연구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스티븐 오브라이언 교수는 1982년 고전적인 방법인 알로자임(Allozyme)법과 피부이식(Skin graft)법을 이용해 치타의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알로자임법은 염색체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는 상동유전자에 의해 생성된 효소군을 이용해 진화적 유사성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피부이식법은 같은 종에서 다른 개체의 피부를 이식한 뒤 자가면역반응에 의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효소군이 다양할수록, 또 거부반응이 나타나는 시간이 짧고 강도가 클수록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오브라이언 교수는 당시 연구를 통해 치타의 상동유전자에서 유전자 염기 배열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다형성 좌위(polymorphic loci)와 면역거부반응을 유도하는 이형접합성(heterozygosity)의 평균값이 0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치타의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것으로 나온 겁니다. 이럴 경우 새끼의 생존율, 개체 수 증가율, 성체의 몸집 크기와 수명 등이 모두 감소합니다. 또 이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치타가 멸종이라는 비극을 맞을 수 있습니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치타의 멸종을 예견한 이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리면서 생물다양성에 대한 비교유전학적 접근법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됐습니다.
유전자 정보는 어떻게 활용될까?
전 세계 동물원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나 개체수가 현저히 적은 일부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동물의 족보를 관리하고, 교배를 할 때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족보 관리보다 더 확실하게 혈통을 관리하는 방법은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동물원은 1981년부터 보전유전학팀을 구성해 야생에서 포획한 개체의 유전자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찾아낸 유전자 정보를 토대로 해당 개체의 생존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면 잡종 교잡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번식을 위한 수컷과 암컷의 선택적 교배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단순히 특정 유전자나 단백질의 이형접합성을 보강하는 수준을 넘어 한 생물의 유전자 정보 전체를 확인해 지도를 만듭니다. 유전자 지도를 이용하면 해당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더 정확하고 빠르게 확인할 수 있고, 개체수의 변화 추이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오브라이언 교수는 데이빗 하우슬러 미국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UC샌타크루즈) 교수, 올리버 라이더 샌디에이고동물원 보전연구소 박사 등과 함께 전 세계 18개국 58개 기관이 참여하는 ‘게놈 10K’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0K’라는 이름처럼 척추동물 1만 종의 유전자를 분석해 유전자의 흐름과 진화적 다양성을 규명하고 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목적입니다.
어떤 유전자 지도가 나왔을까?
국내에서도 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 관련법을 제정했습니다. 2009년에는 ‘생명연구자원의 확보·관리 및 활용에 대한 법률’이 공표돼 생물다양성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대됐습니다. 국립중앙과학관, 국립생물자원관,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제주생물다양성연구소 등 50여 개 국가 기관이 지속적으로 생태 조사를 진행하고 생물종 확보와 관리를 통해 국내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2013년 게놈연구재단과 테라젠이텍스, 에버랜드동물원 등 공동연구팀은 대표적 멸종위기종인 호랑이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연구로 옛 한국호랑이의 모태가 되는 시베리아호랑이가 백호랑이보다 유전적 다양성이 더 낮고 매우 심각한 수준의 멸종위기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doi: 10.1038/ncomms3433
2016년에는 필자가 속한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게놈산업기술센터 교수팀과 국립생물자원관 공동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표범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표범도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멸종위기 동물이고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이 연구로 드러났습니다. doi: 10.1186/s13059-016-1071-4
이처럼 유전자 지도는 멸종위기종의 보전이나 복원을 위한 기초 정보로 사용할 수 있고, 유전적 거리가 가장 먼 개체들 간의 짝짓기 등 종 보전 계획을 수립할 때 과학적 근거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살아가는 동안 생물다양성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도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다양성의 일부입니다. 생물다양성의 미래가 인간의 미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학민. 울산과학기술원(UNIST) 게놈산업기술센터 박사과정 연구원이다. 동식물의 유전자지도를 그리고 이를 토대로 종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호랑이, 고래, 표범, 독수리, 해파리 등의 유전자지도를 완성하는 동물 게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howmany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