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는 당신의 논문을 ‘제20회 국제물리및공학물리학회(ICPEP 2018)’에서 구두 발표하도록 승인합니다. 이 학회는 8월 6~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논문은 추후 와셋(WASET·World Academy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에서 출판하는 저널에 실릴 수 있습니다. ‘제20회 ICPEP 2018’에서 뵙겠습니다.”
몇 초 만에 만든 가짜 논문으로 학회 참가 승인
8월 2일, 기자는 ‘Gwa Kim(김과)’라는 가명으로 논문 작성에 도전했다. 성은 ‘김’, 이름은 외자인 ‘과’로 지었다. 논문을 함께 쓴 공동저자는 ‘이학’과 ‘박동’, ‘최아’ 등 세 명이다. 눈썰미 좋은 독자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들의 성은 국내에 가장 많다는 성을 차용했고, 이름은 ‘과학동아’에서 한 글자씩 땄다. 저자들의 소속 대학도 임의로 하나 만들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개발한 ‘과학 논문 자동생성기’인 ‘사이젠(SCIgen)’ 사이트(pdos.csail.mit.edu/archive/scigen)에 접속해 저자(author) 란에 4명의 이름을 차례로 넣었다. 그리고 ‘생성(generate)’ 버튼을 눌렀더니 순식간에 A4용지 3장 분량의 영문 논문이 튀어나왔다. 대충 훑어보니 초록부터 서론, 실험 방법과 결과, 결론, 심지어 참고문헌 목록까지 논문 양식을 제대로 갖췄다.
이번에는 와셋(WASET) 홈페이지(waset.org)를 열었다.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일본 오사카 등 학술대회(학회)가 열리는 도시의 사진들이 첫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장 내일 열리는 학회부터 12월 27~28일 오스트리아 빈을 마지막으로 올해 열리는 학회만 58개가 한 줄에 3개씩 바둑판처럼 나열돼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 오사카성 등 도시의 대표 관광지가 사진으로 걸려 있어 여행사 홈페이지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맨 위에는 올해부터 2031년까지 연도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뒤인 2031년의 학회 일정이 벌써 결정됐다니. 조금씩 ‘사기’의 기운이 풍긴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결정했다.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사진을 클릭하니 수많은 카테고리가 뜬다. 항공우주, 기계공학, 농업, 동물학, 식물학, 건축학, 생물학 등 과학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학, 사회학, 언어학, 법학, 정치학 등 인문사회 분야도 있다. ‘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라는 와셋의 이름이 무색해진다.
손이 가는대로 ‘물리학’을 골랐다. 8월 6~7일 열리는 ‘제20회 국제물리및공학물리학회(ICPEP 2018)’였다. 혹시나 주최 측에서 논문 내용을 보고 분야를 바꾸라고 연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분 뒤 어떤 분야를 눌러도 결국 동일한 페이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1 저자로 ‘김과’를 등록하고, 사이젠으로 만든 논문을 업로드했다.
며칠 뒤, ICPEP 측으로부터 구두 발표를 해도 좋다는 승인서가 e메일로 날아왔다. 단, 학회 참가비 명목으로 500유로(약 64만7000원)를 비자카드로 결제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이 금액을 결제하면 ‘학회 발표 인증서(Certificate of Presentation)’를 발급해준다. 발표도 하지 않고 발표를 했다는 가짜 인증서를 주는 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기자가 발표 승인서를 받은 날짜가 현지 시간으로 이미 학회가 끝나버린 8월 8일이었다는 점이다.
‘월드’ ‘글로벌’ 단어에 현혹되지 말아야
최근 국내 연구자 일부가 와셋 등 허위 학술단체가 주관하는 가짜 학회에 참가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이런 학회에 참석한 대가는 ‘국제 학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는 연구자의 허위 실적이다.
와셋의 경우 이미 해외에서는 허위 학술단체로 알려져 있다. 위키피디아는 와셋을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다시 말해 연구 실적이 필요할 사람들을 이용하는 ‘약탈적 학회(predatory conference)’로 규정하고 있다.
와셋의 수법은 실제로 권위 있는 학회와 유사하게 이름을 붙인 학회를 열고, 연구자들에게 학회 참가비를 받아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선택한 ‘ICPEP 2018’은 입자물리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회로 꼽히는 ‘국제 고에너지물리학회 학술대회(ICHEP)’와 이름이 유사하다.
‘ICHEP’은 2년마다 개최되며, 올해는 7월 서울에서 열렸다. 와셋이 올 한 해 개최했거나 또는 개최 예정인 학회만 4만9844개에 이른다.
가짜 학회는 2008년 미국 콜로라도주 오라리아도서관 학술사서였던 제프리 비올 콜로라도대 교수가 처음 정리했다. 그는 낯선 학술단체로부터 학술지 논문 투고나 학회 논문 발표, 편집위원 가입 등을 요구하는 e메일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전 세계 학회와 저널을 분석한 비올 교수는 상당수가 공신력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해적 학술지’와 ‘해적 학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일부 학술단체 운영자들이 학술단체 판단 기준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비올 교수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결국 비올 교수는 지난해 1월 웹사이트를 닫았다.
현재는 유럽의 한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이라고 밝힌 익명의 네티즌이 또 다른 웹사이트(beallslist.weebly.com)를 열고, 비올 교수가 2017년 1월 15일까지 공개했던 해적 학술단체의 블랙리스트를 ABC 순으로 공개하고 있다. 여기에 포함된 해적 학술단체는 1200개가 넘는다. 물론 와셋도 포함됐다.
비올 교수는 해적 학술단체들이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이름에 ‘세계(world 또는 global)’나 ‘국제(international)’ 같은 거창한 단어가 들어간다. 또 ‘오픈액세스(open access·누구나 무료로 학술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자주 쓰인다. 비올 교수는 2012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약탈적 출판’이 오픈 액세스를 붕괴시키고 있다”며 “과학적 능력에는 이런 사기꾼들을 알아보는 능력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문 실릴 때까지 최소 2~3개월 걸리는 게 정상
연구자들에게 학회는 정보 교환의 장이다. 김상욱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교류할 수 있어 학회 참석은 연구자에게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최근 국제 공동연구나 융합연구가 늘어나면서 국제 학회 활동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박기홍 광주과학기술원(GIST) 지구·환경공학부 교수는 “국제 학회에서는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전 세계 동료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 최신 연구 동향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며 “박사과정 연구원도 1년에 한 번은 국제 학회에 참석하도록 장려한다”고 말했다.
학회의 권위는 논문 심사 과정에서 드러난다. 국제 학회의 경우 연구자에게 논문 초록을 받아 심사한 뒤 심사 결과에 따라 구두 발표나 포스터 발표를 승인한다. 심사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대부분의 국제 학회는 개최 최소 3개월 전에 초록 접수를 마감한다.
기자가 와셋 홈페이지에서 학회 참가를 신청하고 가짜 논문 초록을 업로드한 건 현지시간으로 8월 2일 오전 4시 57분이었다. 그런데 약 10시간 뒤인 당일 오후 3시 10분 논문 발표가 승인됐다며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 싶으면 전문을 업로드하라는 e메일을 받았다. 전문을 업로드한 뒤 발표 승인이 날 때까지는 고작 나흘 밖에 안 걸렸다.
하지만 정상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과정은 학회 발표보다 훨씬 복잡하다. 김동하 이화여대 화학생명분자과학부 교수는 “학술지의 편집장, 부편집장, 편집위원 등 에디터들이 논문을 일차적으로 심사한다”며 “이 과정을 통과하면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 3명 이상에게 논문을 보내 피어 리뷰(동료 평가)를 진행하는 게 일반적인 학술지의 논문 심사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학술지 수준이 높을수록 논문 심사 과정은 까다롭다. 박 교수는 “학술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논문을 제출해서 게재하기까지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5~12개월 걸린다”고 말했다.
과학계 자체 가이드라인 마련 필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지난 10년간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 연구자가 와셋에 참가한 사례는 총 75건, 와셋을 포함해 가짜 학회에 참여한 사례는 총 380여 건이 적발됐다고 7월 31일 밝혔다. 대학 소속 연구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현재 가짜 학회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국제 공인 기준은 없다”며 “학회 설립이 학계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와셋 같은 허위 학술단체 참가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기홍 교수는 “학회의 이름과 상관없이 국제 학회에서 발표했다고 하면 무조건 성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의 도덕적 해이도 도마에 올랐다. 김동하 교수는 “일부 연구자들은 학문적인 목적보다는 휴양이나 관광을 즐기기 위해 학회에 가는 경우가 있다”며 “와셋 같은 가짜 학술단체는 이런 심리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더욱 심각한 점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으로 받은 사업비를 항공권 구입, 체류비 등 가짜 학회 참가비 명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국가 R&D 예산은 국민의 세금이다. 현재 국가 R&D 예산 집행 규정에서 연구비 환수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남은 연구비에 한해 적용된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학회에 참석한다고 하고 가지 않은 경우에는 연구비 환수가 가능하지만, 학회의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이미 학회 참가비로 쓴 비용을 환수하기는 규정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은 이런 식으로 연구비가 새는 걸 막기 위해 사업 주관 기관이 매년 연구비를 적정하게 집행하는지 정밀정산하는 규정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 학회의 경우 분야별로 종류가 많고 다양해 현실적으로 일일이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관계자는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는 연구의 경우 성과 평가 체계가 질적평가 위주인 만큼 국제 학회 참석 여부는 사실상 평가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며 “과학계가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부적절한 학회는 차단하는 등 스스로 검증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위 있는 학술 DB 참고
‘진짜 학회’와 ‘진짜 학술지’를 확인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방법은 세계적으로 가장 신뢰도가 높은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는 것이다. 가령 클래리베이트가 제공하는 웹사이트(www.webofknowledge.com)에서 자신의 연구 분야가 속한 카테고리에서 학술지 이름과 순위를 확인할 수 있다.
클래리베이트는 지난 한 해 다른 연구자들이 논문을 얼마나 인용했는지 평가하는 ‘임팩트 팩터(IF·Impact Factor)’를 기준으로 학술지의 순위를 매긴다. ‘네이처’처럼 분야별로 학술지를 발행하는 경우에도 각 분야에서 몇 위인지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이 웹사이트에서 물리학을 선택하면 학술지의 경우 미국물리학회가 발행하는 ‘리뷰스 오브 모던 피직스(Reviews of Modern Physics)’와 세계적으로 저명한 국제학술지인 ‘네이처’가 발행하는 ‘네이처 피직스(Nature Physics)’, 스프링거가 출판하는 ‘상대성이론 리뷰(Living Reviews in Relativity)’ 순으로 상위에 랭크돼 있다.
김동하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판단한 뒤 좀 더 우수한 평가를 받는 학술지에 논문을 제출해 심사를 받는 게 좋다”며 “이 과정에서 연구 성과를 검증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리뷰 결과를 토대로 연구를 더 향상시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생소하다고 해서 무조건 허위 학술단체로 낙인찍는 일도 주의해야 한다. 김동하 교수의 경우 2016년 동료 교수들과 함께 ‘에너지 물질 및 나노기술(EMN)’에서 운영하는 학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같은 분야의 다른 학회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전문성을 살려 분야별 공통 관심사를 가진 연구자들을 한 자리에 초청하는 게 이 학회의 경쟁력이었다.
김동하 교수는 “EMN의 경우 학회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 3대 학술출판사인 스프링거 등과 협업하고 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질적으로 더욱 향상되고 규모도 커져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욱 교수는 “지금은 권위 있는 국제 학회도 설립 초기에는 과학자 몇 명이 소박하게 시작한 경우가 많다”며 “작은 규모의 학회가 학술적으로는 수준이 높은 경우도 많은 만큼 분야가 명확하고 분야별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학회가 진짜”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