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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모습 드러낸 파란장미

팬지의 ‘블루 진’ 도입해 꽃피워

 

마침내 모습 드러낸 파란장미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 주고파.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비오는 수요일이면 생각나는 노래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의 첫 구절이다. 이처럼 장미하면 떠오르는 색이 빨강이다. 그런데 식물의 중매쟁이인 벌은 파장이 긴 빨간색 빛을 잘 보지 못한다. 대신 파장이 짧은 가시광선이나 자외선에 민감하다. 그런데 왜 장미는 벌의 주의를 끌지도 못할 빨간색을 갖게 됐을까.

“짙은 빨간색 장미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육종을 통해 만들어낸 품종입니다. 야생 장미꽃은 색이 옅어요. 분홍이나 연노랑, 또는 흰색이지요. 꽃잎의 수도 훨씬 적습니다. 보통 5장에서 많아야 20장 정도지요.”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장미육종가인 김원희 연구원의 설명이다. 많게는 1백여장의 꽃잎이 겹겹이 달려있는 탐스러운 빨간 장미는 자연을 소재로 한 인류의 ‘작품’인 셈이다. 수천년에 걸쳐 개발된 장미의 품종은 이제 2만여종이 넘는다. 다채로운 색상은 물론 최근에는 꽃잎 앞뒤의 색이 다른 품종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유전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불과 20-30종의 야생장미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란 장미 꽃말은 ‘불가능’
 

이번에 꽃피운 파란 장미에는 팬지의 ‘블루 진’ 이 도입됐다.


이처럼 신의 손을 가진 것 같은 장미 육종가들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바로 파란 장미를 만드는 것이다. 화훼분야의 ‘성배’ (聖杯)로 불리는 파란 장미는 그래서 꽃말도 ‘불가능’ 이다.

그런데 마침내 파란 장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6월 30일 일본 주류회사인 산토리사는 자회사인 플로리진의 연구자들이 파란 장미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수천년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호주에 본사가 있는 플로리진(Florigene)은 생명공학 기술을 써서 신품종 화훼류를 개발하는 회사다. 1986년 설립될 당시 모토가 ‘파란 장미’ 를 개발하는 것이었으므로 18년 만에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수천년 동안 실패해온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장미에는 원천적으로 파란색소를 만들 유전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육종을 해도 파란 장미가 나올 수 없지요.”

이번 연구를 이끈 플로리진의 존 메이슨 박사의 설명이다. 빨강, 노랑, 주황색 물감을 이리저리 섞어봐도 파란색이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연구자들은 다른 식물에서 찾아낸 파란색소를 만드는 유전자, 즉 ‘블루 진’ (Blue Gene)을 장미에 집어넣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파란 장미에 블루 진을 ‘이식’ 해준 식물은 제비꽃과의 귀여운 풀 팬지.

꽃의 색은 주로 안토시아닌 계열의 색소들의 조합으로 결정된다. 때로는 당근의 색깔을 내는 캐로티노이드가 참여하기도 한다. 안토시아닌 색소는 크게 3가지가 있다. 빨간색의 시아니딘, 주황색의 펠라고니딘, 파란색의 델피니딘이 그것이다. 이들은 DHK라는 한 물질이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변형돼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장미의 게놈에는 DHK를 델피니딘으로 바꾸는 과정에 꼭 필요한 효소인 F3'5'H의 유전자, 즉 ‘블루 진’ 이 결핍돼 있다.

“장미 뿐 아니라 카네이션, 국화 등 많은 화훼류에서 이 효소의 유전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파란색 꽃이 드문 이유지요.”

KAIST 생물과학과 최길주 교수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지난 2001년 다른 식물의 유전자를 도입해 주황색 페튜니아를 개발한 장본인이다. 페튜니아의 경우 DHK를 펠라고니딘으로 바꿔주는 효소가 결핍돼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주황색 꽃이 없다. 이처럼 자연계에서는 한 식물이 3가지 색소를 다 만들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특히 10대 화훼류 중에는 프리지아만 빼놓고 모두 블루 진을 갖고 있지 않다.

플로리진은 1991년 페튜니아의 게놈에서 최초로 블루 진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뒤 이 유전자를 장미와 카네이션에 도입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유전자는 장미에서는 작동하지 않았고 카네이션에서만 제 몫을 했다. 1994년 마침내 블루 진이 제대로 작동한 카네이션이 꽃을 피웠고 1996년 ‘문더스트’ (Moondust)라는 이름으로 시판돼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문더스트는 최초로 상업화된 유전자변형 꽃이다.

“페튜니아의 블루 진이 왜 장미에서는 활성이 없는지는 모릅니다. 꽃잎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죠. 아무튼 우리는 다른 꽃들에서 블루 진을 찾기로 했습니다.”

메이슨 박사의 설명이다. 같은 기능을 하는 효소라도 식물에 따라 구조가 조금씩 다르므로 장미꽃 세포 안의 조건에 맞는 효소를 찾아야한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유전자가 바로 팬지의 블루 진. 이번에 개발된 파란 장미의 색소를 분석한 결과 델피니딘이 99%를 차지했다. 유전자가 완벽하게 작동한 것이다.

파란 장미, 연보라빛에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육종법으로 파란 장미를 만들려고 했지만 연보라빛을 얻는데 그쳤다. 이런 노력으로 얻은 품종의 하나인 ‘리틀 실버’


플로리진은 블루 진이 들어간 카네이션 ‘문더스트’ 를 공식적으로는 파란 카네이션이 아니라 ‘엷은 자주색’ (mauve) 카네이션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선을 보인 파란 장미 역시 과연 ‘파란’ 이라는 형용사를 쓸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다. 파란색보다는 오히려 연보라색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저희가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제가 즐겨 참고하는 영국왕립원예학회(RHS)의 색상표에 따르면 이번 장미는 ‘보라색’ 범위에 속합니다. 물론 조명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도 하고요.”

메이슨 박사는 블루 진이 장미에서 성공적으로 발현됐다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둔다고 말한다. 일단 유전자가 발현하게 했으므로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좀더 선명한 파란색을 가진 장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루 카네이션의 경우도 1997년 색이 훨씬 짙은 ‘문섀도우’ (Moonshadow)가 개발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7가지 품종이 시장에 나와 있다. 현재 이들 카네이션은 전세계로 고가에 수출되고 있다. 그러나 문섀도우 역시 보라색 기운이 여전히 강하다. 그렇다면 블루 진을 넣었는데 왜 순수한 청색의 꽃이 나오지 않을까.

식물의 색소는 주위 상황에 따라 색이 조금씩 변한다. 델피니딘의 경우도 세포의 pH나 금속이온의 농도, 다른 색소의 존재 여부, 꽃잎 세포의 형태 등에 따라 파란색에서 보라색을 거쳐 자주색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갖는다.

따라서 델피니딘을 만드는 유전자 하나만 달랑 넣어서는 진짜 파란 꽃을 기대하기 어렵다. 카네이션이나 장미의 경우도 발현되는 색소의 거의 전부가 델피니딘이지만 아직까지 순수한 파란색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현재 플로리진은 세포의 내부 조건을 결정하는 다른 유전자들을 변화시켜 델피니딘이 좀더 파란색을 띨 수 있게 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플로리진은 2007년쯤 좀더 선명한 파란 장미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편 전혀 다른 유전자로 파란 장미에 도전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1998년 미국 반더빌트대 의대 피터 구엔게리치 교수팀은 사람의 간에 존재하는 특정한 효소의 유전자를 박테리아에 넣을 경우 박테리아가 파랗게 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효소가 박테리아에 존재하는 특정한 아미노산을 청색색소인 인디고로 바꾸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 효소를 장미에 넣고 박테리아의 아미노산을 공급하면 진짜 파란 장미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디고는 델피니딘보다 파란색이 훨씬 진하고 선명한 색소이기 때문이다.

한편 산토리에서 파란 장미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전해진 뒤 오보가 아니냐는 문의가 많았다. 이미 꽃집에 파란 장미가 나와있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실제로 시중의 파란 장미는 이번에 발표된 것보다 훨씬 파란색에 가깝다. 그러나 이 장미는 파란 염색약을 머금은 흰장미다.

일본에서 개발된 ‘판타지아’ 라는 약제를 물에 타 장미를 꽂아놓으면 색소가 꽃잎에 도달해 흰장미가 파란 장미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봄 첫선을 보였다.

분자 육종 시대 열려
 

페튜니아는 주황색 색소인 펠라고니딘을 만들지 못해 주황색 꽃이 없다. KAIST의 최길주 교수는 다른 식물의 유전자를 도입해 주황색 페튜니아(가운데)를 꽃피웠다.


새로운 모양이나 빛깔을 갖는 꽃을 만들어내는 작업, 즉 화훼육종은 인내와 세심함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김원희 연구원은 “신품종 장미를 개발하려면 5-8년이 걸린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장미육종을 시작해 2000년에야 처음 국산 장미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육종법은 한계가 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실상 예측이 불가능한 작업인데다 해당 식물의 게놈이 갖고 있지 않는 형질은 아무리 많은 교배를 해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육종법으로 파란 장미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리틀 실버’처럼 꽃잎이 연보라빛을 띠는 품종이 고작”이라며 리틀 실버의 사진을 보여준다.

최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분자 육종’ (molecular breeding)이 주목을 받는 이유도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다양한 식물의 게놈을 분석해 꽃의 색상과 생김새뿐 아니라 병충해 저항성, 꽃의 수명 등을 개선할 수 있는 유전자들을 찾고 있다. 품종간의 교배가 아니라 특정 기능을 가진 유전자를 넣어줌으로써 원하는 특성을 갖는 식물을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꽃이 싱싱하게 오래 피어있게 할 수 있다면 상품성이 훨씬 커진다. 꽃이 일찍 시드는 이유는 식물이 호르몬인 에틸렌을 분비해 노화과정을 촉진하기 때문. 현재는 환경에 유해한 티오황산은 용액으로 처리해 식물의 에틸렌에 대한 민감도를 낮춰 꽃이 시드는 시간을 늦추는 방법을 쓰고 있다.

플로리진은 식물체에서 에틸렌을 만드는 ‘ACS 유전자’ 의 작동을 멈추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하고 있다. 즉 ACS 유전자의 스위치를 꺼버리면 더이상 에틸렌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꽃이 일찍 시드는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된다는 것. 이 회사는 이 방법이 오히려 환경친화적임을 강조한다.

한편 장미의 향성분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유전자도 밝혀졌다. 이스라엘의 연구자들은 이 유전자를 도입해 향이 강한 장미를 창조하는데 도전하고 있다. 추위나 병충해에 강한 식물에서 찾은 유전자를 도입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메이슨 박사는 “유전자변형기술은 식물이 본래 갖고 있는 게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신속한 품종 개발을 가능케 한다”며 “전통적인 육종법과 병행하면 앞으로 놀라운 품종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지만 유전자변형 식물이 유통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연구자들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화훼류는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은 편이다. 카네이션의 경우는 영양생식을 하기 때문에 꽃가루를 거의 만들지 않는다. 실제 유전자변형농산물에 완강한 거부감을 갖는 유럽도 최근 플로리진의 카네이션 ‘문더스트’ 의 수입을 허가했다. 메이슨 박사는 “외부 유전자를 도입하는 방법은 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의 작업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면 무턱대고 반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의 영감이 된 ‘검은 튤립’
 

소설의 영감이 된 ‘검은 튤립’


화훼육종에서 파란 장미와 쌍벽을 이루는 것이 검은 튤립이다. 1593년 네덜란드에서 튤립이 처음 재배된 이래 육종가들은 검은 튤립을 만드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다 1850년 검은 튤립이 갑자기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소설 ‘검은 튤립’ 을 발표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검은 튤립을 창조하려는 주인공 코르넬리우스 반 배얼리의 역경과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검은 튤립을 정의와 순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후 수많은 육종가들이 검은 튤립을 만들기 위해 매달렸다. 그 결과 ‘검은 튤립’ 으로 불리는 품종이 몇가지 개발됐다.

이 중에서 1944년 선보인 ‘밤의 여왕’ (Queen of Night)은 아직까지도 검은색에 가장 가까운 품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밤의 여왕’ 의 꽃잎도 검은색이 아니라 아주 짙은 자주색이다. 그렇다면 검은 튤립은 불가능의 영역인가.

네델란드 국제꽃구근센터의 기술담당 프란츠 루젠은 “진짜 검은색이 나오려면 어떠한 색조도 가져서는 안되는데 이는 식물이 죽었을 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살아있는 잎이나 꽃 가운데 진짜 검은 예는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 검은 장미도 나와있지 않다.

안토시아닌

식물의 2차 대사물인 플라보노이드(flavonoid)의 일종으로 꽃이나 과실의 색을 내는 색소다. 분자의 벤젠고리에 붙어있는 수산화기(-OH) 개수에 따라 시아니딘(2개), 펠라고니딘(1개), 델피니딘(3개) 등 3가지로 나뉜다. 꽃잎 세포질에서 만들어진 안토시아닌은 액포에 저장돼 꽃잎에 색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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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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