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 여행을 떠났었다. 파리에서 아비뇽으로, 그리고 모나코까지 이어지는 여행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파리였다. 특히 파리의 개선문 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동양에서 온 관람객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같이 여행을 간 큰아들이 질문을 던졌다.
“아빠, 왜 파리에는 에펠탑을 제외하고는 높은 건물이 없죠?”
당시는 이 질문에 대답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19세기 중반 대대적인 도시 계획 이후 시작된 ‘고도 규제’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명저, ‘도시의 승리’에 파리의 도시 계획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 3세) 황제는 자신에게 충성하면서도 파리 재개발을 원하는 자신의 뜻을 공유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가 필요했다. 오스만 남작이 적격자였다. (중략)
여러분이 도시재건을 원한다면 독재자의 지원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오스만은 민주적인 시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낸 후 그들이 살던 집을 헐고 파리의 상징물처럼 된 넓은 대로를 만들었다.(중략)
오스만은 또한 파리의 높이를 약간 더 끌어 올렸다. 1859년에 파리의 고도제한은 16미터에서 19미터로 상향 조정됐다. 그렇지만 오스만 시대 사람들은 계단을 올라 다녀야 했기때문에, 엘리베이터가 흔한 20세기에 세워진 후대 도시들에 비해 이 당시 건물들의 높이는 여전히 낮았다. (‘도시의 승리’ 279~280쪽)
파리의 스카이라인(sky line)이 19세기의 산물이라니 놀라웠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도 산업혁명에 동참하며 도시화의 물결이 본격화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거주할까.
주택 공급과 집값의 상관관계
파리 인구는 1801년 약 55만 명에서 1851년 약 100만 명으로 50년 동안 두 배가 늘었고, 1876년에는 200만 명을 돌파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고도제한을 완화하자는 제안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파리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에 대한 자긍심이 워낙 높다 보니 파리 북서부에 만들어진 신도시 라데팡스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주택공급이 이를 충족하지 못하니, 파리의 집값은 급등할 수밖에 없다. 방 2개짜리 소형 아파트의 매매가격은 100만 달러(약 11억1590만 원)를 넘어선지 오래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 드는 비용이 500달러(약 55만 7950원) 이상인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런던도 마찬가지다.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의 크리스티안 힐버, 올리비에르 쉬니 박사는 영국 지역계획당국(Local Planning Authority)의 엄격한 규제가 런던의 주택가격 상승을 불렀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2016년 4월 발표한 ‘영국, 스위스 미국 주택 정책의 교훈(Housing Policies in the United Kingdom, Switzerland, and the United States: Lessons Learned)’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런던 및 남동부에 적용되는 규제 수준이 완화된다면, 2015년 지금의 주택가격은 30% 이상 낮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공급부족으로 인해 주택가격이 30% 이상 더 상승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파리와 런던 두 도시 모두 강력한 규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집값은 런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파리의 집값은 런던보다 쌀까?
도시의 부동산 가격, 철도가 좌우?
이유는 철도망의 차이에 있다. 카타리나 크놀 독일 베를린자유대 교수 등은 1870년부터 2012년까지 14개 주요 나라의 실질 주택가격을 분석해 2017년 2월 ‘아메리칸이코노믹 리뷰’에 발표했다.doi:10.1257/aer.20150501 여기서 ‘실질’ 가격이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주택 가격을 의미한다. 크놀 교수팀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전세계 실질 부동산 가격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상승했다(위 그래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13년의 주택가격을 100이라고 가정하면, 1960년 실질 부동산 가격은 148에 불과했다. 그런데 1980년 326, 2000년 427, 2016년에는 무려 512까지 상승했다. 1960년까지는 세계 부동산 시장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지루하고 심심한 시장이었지만, 이후에는 상승률이 가파른 매우 역동적인 시장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렇다면 왜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부터 오르기 시작했을까. 이에 대해 크놀 교수팀은 철도망의 축소에 주목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은 철도 건설에 열정을 불태웠다. 예를 들어 1900년의 철도 총연장이 100이라면 1950년에는 245였다. 50년 만에 철도의 총연장 규모가 2배 반 가까이 늘어날 정도로 철도 건설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교통의 주역으로 부각되면서 철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드는 일이 일반화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 시내를 다니던 전철이 없어진 대신 종로나 마포대로가 큰 자동차 도로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세계 주요국의 철도 총연장은 이후 60년 넘게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철도 총연장의 감소는 주택 가격의 상승으로 연결됐다. 왜냐하면, ‘철도 건설’이 일종의 택지 공급의 측면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철도망이 건설돼 일할 곳이 많은 대도시로의 통근이 편해지면, 이는 도시 면적이 확대된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프랑스, 특히 파리의 주택 가격이 런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이유는 베르사유를 비롯한 주변 도시로 이어진 광역철도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프랑스의 총 철도 연장은 3만2000km로 영국(1만7000km)의 약 두 배에 이른다. 인구가 1억 명이 훌쩍 넘는 철도대국인 일본의 총 철도 연장이 2만km 남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 철도의 영향력을 조금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프랑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철도대국이다. 특히 최근에는 신분당선을 비롯한 광역철도망까지 지속적으로 갖춰지며,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대부분의 지역이 거미줄처럼 촘촘한 철도망으로 연결되고 있다.
물론 한국의 집값은 그리 싸지 않지만, 2008년 이후 10여 년 간 다른 나라에 비해 급등하지 않은 이유가 일산(경기 고양시)부터 진접(경기 남양주시)까지 수도권 1~2기 신도시를 철도망으로 연결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홍춘욱
1993년 12월부터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있으며, ‘환율의 미래’ ‘인구와 투자의 미래’ 등 다양한 책을 통해 경제 지식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이며, 블로그(blog.naver.com/hong8706)를 통해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hong8706@naver.com